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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03호]관계의 내밀한 속정을 섬세하게 그리다
#1.관계에 대한 은유'헤드락'
‘헤드락headlock’은 팔로 머리를 속박하여 상대를 꼼작하지 못하게 하는 레슬러들의 기술을 이르는 말이다. 연극 [헤드락]은 이 단어에 감정적, 관계적 은유를 담았다.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헤드락을 걸고 있는 포스터는 궁금증을 유발한다. 연극의 내용을 모른 채로 그 포스터를 보았을 때 며느리 입장에서 다소 속이 시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고 보면 참 짠한 이야기가 그 한 장면에 담겨 있다.며느리 춘설은 프로레슬러다. 불혹을 앞두고 은퇴하기 직전인 그녀는 시아버지 중달만 남아 있는 고향집으로 내려온다. 같은 프로레슬러 선수였던 남편 철진은 사고로 죽었다. 아내도 아들도 사고로 잃고 혼자 살아가는 시아버지 중달은 젊은 나이에 혼자가 된 며느리가 안쓰러워 시집을 가라며 등을 떠민다. 춘설은 고아다. 시아버지를 친아버지처럼 따른다. 툭툭, 서로 쥐어박는 소리를 하기도 하는 허물없는 두 사람. 둘은 서로를 생각하는 정이 깊다. 귀찮다, 가라 하면서도 관계가 끊어질까 두려운 마음을 숨긴다.
연극 [헤드락]은 제14회 서울 2인극페스티벌 작품상(극작 이선희)을 수상했던 작품이다. ‘아트컴퍼니 제로’가 기획, ‘국제연극연구소 휴’가 제작해서 대전 관객에게 선보인다. 2009년 [소풍가다 잠들다]로 전국연극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던 대전대 김상열 교수가 연출을 맡았다.
#2.연극이라는 마법
11월 공연을 위해 10월부터 연습에 들어갔다. 공연을 3주 정도 앞둔 시점에서 연습실을 찾았다. 대흥동 소극장 핫도그 맞은편 형네낙지 3층에 연습실이 있었다. 연극 포스터들이 붙어 있는 복도를 지나 연습실 문 앞에 섰다. 문 안쪽에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만 같아 설렜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자 평상 위에 세 배우가 앉아 있었다. 배우들이 내뿜는 남다른 기운이 느껴졌다.98년 대전연극협회 연극인상을 수상한 이시우 씨(51)는 시아버지 중달 역을 맡았는데, 눈빛의 결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김상열 교수와 작품을 여러 번 했었다는 문성필(39) 씨는 원작에는 없었던 춘설의 죽은 남편 철진 역으로 극에 입체감을 더해 줄 예정이다. 춘설의 유쾌함과 깊은 속내를 동시에 보여 주기에 신선희(34) 씨보다 적합한 여배우는 없을 것 같았다. 세 사람은 김상열 교수가 오기 전에 대본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다.
김상열 교수가 바삐 들어서고 곧 본격적인 연극 연습이 시작되었다. 거울이 붙어 있는 벽, 포스터, 덩그러니 놓인 평상이 전부인 연습실에서 배우들은 감정을 잡고 각자의 위치에 섰다. 일상이라는 평범한 시간의 흐름 가운데 ‘연극’이라는 특별한 마법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그곳에 서 있는 이들은 더는 배우 누구누구가 아닌 중달, 춘설, 철진이었다.
연습은 중달이 평상에 앉아 혼자 소주를 마시는 장면으로 시작되었다. 중달은 며느리 춘설을 기다리고 있었다. 춘설은 중달이 소개해 준 사람을 만나러 가서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쓸쓸해진 중달은 혼자서 술을 마시며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감정의 섬세한 각인
더없이 좋은 일이 있었던 듯 명랑하게 등장하는 춘설은 중달이 소개해 준 사람이 마음에 들었던 듯 쉼 없이 재잘거린다. 하지만 조금만 더 가만히 바라보면 그것이 기쁨만이 아닌 슬픔을 감추려는 행위라는 걸 알게 된다. 중달을 부추겨 자신에게 헤드락을 해 보라는 춘설. 은퇴를 앞둔 프로레슬러 춘설은 헤드락을 주무기로 삼는 정공법 스타일의 선수이기도 하다. 그 장면에서 두 사람이 감춰 둔 마음이 폭발하듯 튀어 오른다.(춘설이 중달을 헤드락 한다.)
중달 : 이제 고마해라. 혈압 오른다.
춘설 : 몇 번을 말하노 절대로 못 풀려난다고. 대단하제. 이게 바로 정공법이라는기다.
중달 : 고마 안 하나. 시집갈 생각하니까 힘이 솟는갑지.
춘설 : 우리 오빠한테는 내가 헤드락이다. 시집을 우째 가노.
헤드락으로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어찌 보면 우스꽝스러운 장면에서 춘설은 자신 역시 철진을 잊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여기서 ‘헤드락’은 속 깊은 관계, 오랜 정, 상처나 아픔을 끌어안은 소중한 인연들의 상징으로 읽힌다. 그리고 뒤이어 춘설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고백한다. “그런 게
아니라고. 나 30분도 안 되가 (소개 자리에서) 나왔삤다고. 쪼매 걸었다고. 골목 좀 걸었다고. 예전에 오빠야 만날 때 그랬거든. 골목을 돌고 돌고 돌고. 헤어지기 싫어가 몇 바퀴를 돌았는가. 혼자서 몇 바퀴를 돌았다고. 간만에 오빠야 만나가, 손도 잡고 뽀뽀도 했다고. 안 보인다고 없어지는 거 아니라고. 그런 거 아이라고. 아부지 듣고 있나? 너무 그라지 마라.”
중달에게 보였던 능청이 모두 거짓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춘설을 맡은 신선희 씨가 순식간에 뿜어내는 감정에 공기가 들썩인다. 우리가 잃어버렸던 어떤 것도 보이지 않지만 이 어딘가, 가슴 가까이 다가와 있을 것만 같아 코끝이 찡해진다. 자신의 연출 스타일이 감성적인 부분을 디테일하게 가는 것이라는 김상열 교수의 말대로, 이 한 장면이 인상 깊게 각인된다. 우리는 모두 삶의 ‘헤드락’에 자처해서 걸려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처와 원망이 뒤얽혔지만 따스한 속정이 깃든 깊은 인연의 자리 말이다.
드림아트홀
11월12일(목)~29일(일)
쉬는 날 없이 평일 오후 8시,주말 오후 4시
문의 042.321.1638
글 이혜정사진 이혜정, 웹매거진 커튼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