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호 145호] 꼭 뭘 해야만 즐거운 건가요?
꼭 뭘 해야만
즐거운 건가요?
다섯 시간의 자유를 얻다
직장인에게 평일은 묶인 시간이다. 회사 규정대로 정해진 시간은 꼬박 업무에 몰두해야 하는 게 당연한 법. 그중 잠깐씩 휴식을 가질 수는 있어도 온전한 자유 시간을 얻는다는 건 연차나 반차를 내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만약 나에게 다섯 시간의 자유가 주어진다면? 가정이 아니라 정말 그 시간이 주어졌다. 골똘히 생각해 본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휴식. 집으로 돌아가 늘어지게 잠을 자 볼까 싶지만, 이건 재미가 없으니 그냥 넘긴다. 그럼 다음으로 하고 싶은 건? 그런데 굳이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걸까? 지금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자유 시간마저 머리 굴려 가며 계획을 짜고 있는 내가 한심했다. 그래 일단 이곳을 벗어나자.
오후 12:25 _ 남은 시간 4시간 35분
식당으로 향하는 길, 부동산 간판이 보인다. 문득 이 다섯 시간을 집 알아보는 데 쓸 걸 하는 아쉬움이 든다.
다섯 시간이면 내가 원하는 집을 얻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무계획이 계획
원래는 차를 타고 바닷가에 가려 했다. 가슴이 답답하다 싶을 때 바다를 보면 속이 뻥 뚫릴 것 같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많이들 그렇게 하니까 나도 한번 해 보자 싶었다. 하지만 오늘의 답답함은 운전도 하기 싫을 정도로 나를 옥죄었다. 어딘가에 신경을 쏟는 것 자체가 기운 빠지는 날이다. 그래서 다 재끼고 무작정 가방을 챙겨 밖으로 뛰쳐나왔다. 젠장, 될 대로 되라지.
회사를 벗어나 무작정 걷기로 했다. 아, 그전에 밥은 먹어야겠다. 이렇다 할 계획은 없어도 점심 계획은 세웠다. 두 달 전부터 가고 싶었던 식당을 찾았다. 직장인에게 점심시간은 한정적이다. 그리고 모든 직장인이 같은 시간에 쏟아져 나오니 어딜 가나 사람이 많다. 특히 이곳은 맛집이니 줄을 서면 섰지, 자리가 남을 리 없는 곳이다. 기다릴 시간이 없어 매번 발길을 돌려야만 했지만 오늘은 그럴 걱정이 전혀 없다. 나에게는 아직 네 시간 하고도 50분이 남았다. 다섯 시간을 기다려야 한대도 오늘은 기필코 먹을 작정이다.
오후 12:41 _ 남은 시간 4시간 19분
드.디.어. 이따다끼마스-!
오후 13:30 _ 남은 시간 3시간 30분
하얀 방앗간과 주인 아저씨의 빨간 오도바이
계획은 없고요, 규칙은 있습니다만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길을 나섰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인지 아까보다 힘이 난다.
막상 걸으려니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하다. 그래도 휴대폰을 뒤적거리지는 않는다. 시간 계획 대신 몇 가지 규칙을 정했다.
첫 번째, 검색이나 지도 어플은 절대 켜지 않는다. 검색을 하거나 지도를 보는 순간 도착지를 정하고 시간을 가늠하며 계획을 세울 게 뻔했다. 그럼 애초에 계획을 버린 게 물거품이 되어 버리니 그건 안 될 일이었다. 어떤 도움도 없이 그저 길을 걷는 게 계획이라면 계획이고 목적이다.
오후 13:51 _ 남은 시간 3시간 19분
오늘은 내가 가는 길이 런닝머신이다
두 번째, 조급해하지 않는다. 다섯 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을 두고 언제라도 시간을 들여다보며 조급해할 것 같았다. 무엇이든 한정되고 정해진 것은 자꾸만 나를 조급하게 만든다. 천천히 여유를 갖고 이리저리 흘러들자.
세 번째, 거창한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 이건 계획을 세우는 것과 똑같은 짓이다.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그 순간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오늘의 할 일이다.
네 번째, 최대한 익숙하지 않은 길로만 걷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지만, 익숙한 곳에 머무르기는 싫었다. 낯설고 조금 무섭더라도 새로운 길을 걷고 싶었다. 무엇보다 6년을 살면서도 여전히 대전이 익숙지 않아, 낯선 길만 들어서면 조급해지고 지도 어플을 켜기 바빴다. ‘지구는 둥그니 길은 어디로든 통한다’라는 생각으로 익숙함을 외면하기로 했다.
오후 14:03 _ 남은 시간 2시간 57분
한창 장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어르신들. 슬쩍슬쩍 기웃거려 봤지만 장기판만 바라보느라 신경도 안 쓴다
오후 14:18 _ 남은 시간 2시간 42분
대전천변 벤치에 앉았다. 책을 조금 읽다가 지나는 차를 보다가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다 이내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누군가 나에게 그랬다. “이곳에 살면 나는 매일 여길 걸을 거야.”
오후 15:00 _ 남은 시간 2시간
시간을 낚는 사람들 너머
시간을 달리는 사람들
가장 큰 변수는 역시나 날씨, 그것 빼고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온전한 내 시간에서 나를 따라주지 않는 것은 날씨뿐이었다. 회사를 나서는 순간에도 날이 흐려 비가 올까 걱정했는데, 정말 비가 내렸다. 다행이라면 자유 시간이 거의 끝나갈 즈음 비가 내렸다는 것이다.
그것 빼고는 모든 것이 완벽했고 만족스러웠다. 굳이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즐거웠다. 조급할 것이 없어 한없이 늘어졌다. 고민하지 않고 아무 골목으로 들어섰고, 처음 만나는 낯섦은 꽤나 즐거웠다. 신경을 자극할 만한 큰 소음도 없었다. 내가 가는 길은 한없이 조용하고 아늑했다. 어쩌면 무심코 그런 골목만 골라 걸은 건지도 모르겠다.
오후 15:04 _ 남은 시간 1시간 56분
네잎크로버를 찾아본다. 살면서 한 번도 네잎크로버를 찾아본 적이 없다.
이번에도 역시나. 한창 집중해 찾고 있는데, 신나는 뽕짝 노래가 들린다.
뒤를 돌아보니 전동기를 탄 할아버지가 나를 빤히 본다. 큼큼. 다시 길을 걷는다
길을 걷다 힘이 들면 어디에든 앉았다. 지나는 사람들은 내가 여행객처럼 보이는지 한 번씩 쳐다보고 갔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옷차림이 그다지 단정하지는 않았다. 낯설게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좋았다. 마치 이방인이 된 기분에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행동했다. 힘이 들면 앉았고, 따분해질 때면 책을 읽었다. 그러다 졸리면 잠시 눈을 감았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 다시 걸었다.
돌아가는 길에는 자전거를 탈까 했지만 비가 내려 지하철을 타고 복귀했다. 돌아가는 내내 아쉬움이 남았다. 한 정거장 전에 내려 다시 걸었다. 비가 내렸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모자가 달린 재킷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뚜벅뚜벅 걸었다. 지하철 안에서 묻은 덥고 건조한 기운이 바깥의 적당한 습기를 만나 말끔히 사라졌다. 시원한 빗방울의 촉감이 좋았다.
날씨마저도 완벽한 다섯 시간이었다.
오후 15:13 _ 남은 시간 1시간 47분
유등천을 지나다 낚시하고 있는 사람이 많이 보여, ‘여기 뭐 건질 게 있기나 해?’ 하며 다리 밑을 살폈다.
웬걸, 팔뚝만한 물고기가 하나 둘 셋 넷… 대략 열 마리쯤 있었다.
한참 보다가 옆을 돌아보니 한 학생이 날 따라 다리 밑을 보고 있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머쓱…
글 사진 이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