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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45호] 누운 소에 기대어 사람이 산다
누운 소에 기대어
사람이 산다
대전여지도128
대전광역시 서구 평촌2동(와촌, 질마루)
와촌마을 전경
대전 서구 남단인 평촌동은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들어가야 했다. 지금은 가수원동부터 이어지는 길이 반듯하게 나면서 접근하기가 훨씬 편하다.
이곳 평촌이 최근 세간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건 ‘평촌일반산업단지’ 개발과 관련해서다. 지난 3월 19일 대전시는 한국서부발전, 대전도시공사와 개발 예정인 평촌일반산업단지에 1천 MW급 LNG발전소 등을 건설한다는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친환경 첨단 산업단지를 만든다 해 놓고 주민과 협의 과정 없이 전체 터의 절반에 발전소를 건립하겠다는 양해각서를 체결한 것에 관한 우려와 반발이다. 발전소가 주민과 환경단체 반발을 무릅쓰고 들어설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개발은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진입도로 공사도 진행할 계획이고 올 하반기 수용 토지 보상도 진행한다고 한다.
이번에 답사한 평촌2동 와촌마을과 질마루마을은 일반산업단지 예정 터에서는 비켜났다. 마을 옆으로 개발이 이루어진다. 산업단지가 들어서면 와촌과 질마루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와촌과 질마루는 야트막한 산이 주변을 둘러싸고 서쪽과 북쪽으로는 갑천 상류가 지나는 안온한 마을이다. 북쪽으로는 뒷산이 마을을 지지한다. 북쪽 갑천 상류와 마을 사이에는 당고개가 있다. 기성초등학교길헌분교장 바로 뒤다. 당고개를 넘어 오른쪽으로 가면 흑석동이나 기차를 탈 수 있는 원정역에 닿았다. 왼쪽으로 가면 벌곡에 갈 수 있었다.
“와촌이 소가 누운 모양새라고 허대, 여기 당고개가 소 허리 부근이랴. 근디 일본 놈들이 기를 끊겠다고 저기를 잘라 놓았다는 겨. 그래서 젊은 사람도 많이 죽고 우리 마을에 남자가 별로 없다는 얘기를 들었어.”
막 당고개를 넘어오던 길에 만난 김춘실(80) 할머니 얘기다. 대전역사박물관 홈페이지 대전의 지명 편에는 ‘이여송이끊은혈’이라고 기록한다. 임진왜란 때 이여송이 끊었다는 전설이다. 왜 끊었는지 모르겠다. 당시에 조선을 돕기 위해 출병했는데 굳이 힘들게 산허리를 끊을 이유가 없었을 텐데, 마을 주민 김춘실 할머니 얘기가 더 논리적이다.
위 문헌에도 류혁연의 묘를 쓴 곳이 와우형의 명당이라는 얘기를 적었다. 그래서 이 마을을 와촌이라 불렀단다. 다른 유래도 전한다. 기와를 구웠던 와요지가 있어서 그랬다고 하는데, 주민 사이에서는 확인이 어려웠다. 와요지에 관한 이야기를 물었더니, 마을 남쪽으로 사기점골이라고 그릇을 굽는 곳이 따로 있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같은 기록에는 이 마을 남쪽 낮은 구릉지에서 비교적 근대(100여 년 안쪽)까지 기와를 구웠던 자리가 있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과거에는 잣나무가 많아 백목리, 혹은 백목동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작은 마을치고는 적지 않은 이야기를 담았다.
류혁연 묘소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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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바라볼 때 당고개 오른쪽 산은 모두 일반산업단지 터라 허물어질 예정이다. 소 허리 밑으로 다 잘리는 셈이다. 류혁연의 묘와 재각이 있는 쪽은 남는다. 마을에서 만난 주민은 문화재 자료 제28호인 류혁연의 묘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왕이 지정한 묘지가 딸린 산을 허물기는 부담이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류혁연(1616~1680)은 조선 효종 때 사람으로 삼도수군통제사와 어영청대장, 공조판서, 훈련대장, 한성판윤, 포도대장 등을 역임했다. 이후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숙청될 때 유배되어 사사되었다. 1681년 숙종 명으로 신위지(神位地)를 택하여 이장하였다. 와촌 뒷산이 바로 그곳이다. 왕의 명으로 고른 묏자리니 오죽 명당이었을까? 재각 앞을 지나 짧은 소나무 숲길을 통과하면서 만난 묘지는 무대 위 조명이 쏟아지듯, 초봄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 내리쬔다. 평온하기 그지없다.
동네 사람들은 류혁연을 류 대장이라 불렀다. 마을 초입에 일반적인 묘보다 좀 큰 묘 두 기를 보았는데, 그 앞에 옹기종기 앉아 있던 할머니들에게 물으니, “류 대장네 묘”라고 답한다.
여러 관직을 역임했지만 어영청대장, 포도대장, 훈련대장 등 유난히 대장 직함을 많이 갖긴 했다. 류 대장의 신도비는 와촌마을 남쪽에 세웠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면서 마을 고샅길에 주민이 한 사람 두 사람 나타난다. 마을 경로당에 주민이 모여 매일 점심을 함께하기 때문이다. 와촌마을과 질마루마을 사람이 함께 모이는 경로당은 질마루에 있다.
“마을에 샘이 두 개 있었지. 저 우짝으로 둠벙샘이 있었고 저 아래짝으로 옹달샘이 있었어. 아이고, 매일 저녁 물지게에 물을 져 나르는 게 일이었지. 지고 오면서 흘려 가지고 도착하면 반밖에 안 남았어. 지금은 물이 우째 그렇게 흔햐. 하도 배를 곯아서 밥이라도 실컷 먹고 싶어 시집왔더니, 여기도 배곯기는 마찬가지더라고. 점심이면 고구마 삶아 먹었어. 지금이나 그때나 변한 건 없어. 지붕만 새로 해서 이었지. 거의 그대로여. 저기 보이는 밭이 대부분 논이었어. 지금은 밭을 맹길었지만.”
막 대문을 나서 경로당으로 향하던 김하분(66) 씨 얘기다. 처음 시집왔을 때 땅이 하도 질어 장화를 신지 않으면 살기도 힘들 정도였다. 빠진 발을 꺼내 올리는 것도 일이었다. 토질이 온통 황토라 그러했다.
“아니, 밥도 밥이지만 이렇게 가야 사람들하고 얘기도 하고 좀 웃지. 안 그러면 힘들어서 못써. 여기는 예부터 얌전한 동네여. 아주 살기 좋은 동네지.”
살짝 언덕진 길을 걸으며 여러 차례 쉬어 가는 박영례(79) 할머니는 스물여덟 살에 광주에서 시집왔다. 남편 할아버지 때부터 100년을 넘게 사는 마을이다. 예부터 어른들에게 이곳이 ‘피난곶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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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주민을 따라 올라서니 질마루다. 이곳은 질마루라 부르기도 하고 길마루라 부르기도 하고 돌마루라 부르기도 했다. 마을 곳곳에 있는 공식 표기도 모두 그렇게 다양하게 썼다. 대전역사박물관 대전의 지명 자료에는 낮은 산등성이에서 진흙이 나는 마을이기에 ‘길지’라 하여 명당 찾는 풍수객들이 자주 찾았다는데, 낮은 산등성이에서 진흙이 나는 것과 명당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길’이 ‘질’로 구개음화한 것으로 보면 길에 마루를 더한 마을 이름이다. 와촌마을보다는 지대가 높으니 ‘마루’라 불러도 무리가 없다. 마룻길, 혹은 길마루라 이름 붙여도 무척 잘 어울리는 지형이다.
마을 이름은 따로 갖고 있지만 주민들은 웃마을 아랫마을로 부르며 와촌과 질마루를 한마을로 인식한다. 버스가 다니는 좁다란 도로가 지나고 그 양 옆으로 집이 들어섰다. 버스를 타러 나온 주민을 대상으로 상권이 형성되었을 것 같은데, 그냥 주택이 들어섰다.
그중에 주택보다는 가게였을 것 같은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경로당 바로 앞에 똑같이 지은 쌍둥이 건물 두 채다. 단층인 건물이 묘한 분위기다. 지금은 비었다. 1970년대 전후로 영업을 했던 가게다. 석유가 주요 품목이었던 모양이다.
“옛날에는 막걸리며 담배며 과자도 팔고 무엇보다 석유를 팔았던 곳이에요. 문 닫은 지는 한참 되었어요. 저 가게 문 닫고 경로당 옆에 있는 저 건물에서도 잠깐 가게를 했는데 저기도 문을 닫았지요.”
아내와 함께 트럭을 타고 내린 한 주민이 해 준 얘기다. 회색빛 콘크리트 건물은 질마루에 찍어 둔 도장 같다. 건물이 어떤 형태로든 남아 질마루가 지나온 시간 흐름을 증명해 주었으면 좋겠다.
경로당에서 갑천 상류 증촌마을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해비타트 주택이라 불리는 다세대주택 몇 채가 눈에 들어온다. (사)한국해비타트 대전지회에서 이곳 질마루에 2008년부터 2011년까지 모두 22가구가 입주할 수 있는 다세대주택을 지었다. 2011년 11월 25일에 입주 헌정식을 가진 주택이다. 새하얀 외관을 지닌 주택이 마을에서 도드라진다. 제대로 마을에 녹아들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해 보인다.
그곳에서 증촌마을 방향으로 계속 이어지는 길 주변으로는 작은 텃밭과 주택이 들어섰다. 와촌마을 집과는 또 다른 색채를 띤다. 규모가 작지 않은 기와집부터 최근에 새로 지은 듯한 현대식 주택, 1980년대 전후로 지은 것으로 보이는 벽돌주택까지 다양하다.
그 사이, 질마루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축물은 언덕빼기에 ‘제라’다. 1986년에 지은 교회 건물이다. 비어 있던 교회 건물을 김영헌 바리스타와 김수정 가드너 부부가 ‘제라’라는 이름의 예쁜 카페로 바꿔 문을 열었다.
“시아버지가 이곳에서 목회자로 일을 하셨어요. 저희는 귀촌을 했고요. 귀농귀촌한 젊은 사람들이나 주민들은 요즘 산업단지에 발전소가 들어온다는 것 때문에 걱정이 많지요. 우리는 마을이 편하게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바뀌기를 원했거든요. 공기도 좋고 길도 닦아서 대전 시내하고도 멀지 않고요.”
김 씨 부부는 고민이 많아 보였다.
과거 마을 가게 노릇을 했던 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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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촌과 질마루는 이런저런 변화 앞에 놓였다. 민간에서 자연스럽게 조금씩 끌어가던 변화의 바람은 기관이 개입하며 거센 급류를 탔다. 그런 것치고는 봄 햇살 아래 놓인 마을은 한없이 고요하기만 하다. 마을로 진입하기 전, 큰 도로에 나붙은 현수막 몇 개가 지금 상황을 얘기해 줄 뿐이다.
지금 경관 전체를 바꿔 버릴 산업단지 개발이 어떤 결과를 보여 줄지 가늠이 쉽지 않다. ‘친환경 첨단산업’이라는 사전 계획처럼, 익숙하게 알고 있는 번잡한 산업단지 말고 대안으로 제시할 만한 산업단지 개발은 불가능한 건지 모르겠다.
기존 산단 모습을 와촌과 질마루에 대입하기에는 하늘은 무척 예쁘고 햇살은 한없이 따스하다. 마을 공기는 맑고 갑천 상류는 충분히 아름답게 흐른다. 그 안에 자연을 닮은 사람들이 산다.
글 사진 이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