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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45호] 마지막 인류는 숲으로 이동, 그곳에 '셸터'를 지었다
마지막 인류는
숲으로 이동,
그곳에 '셸터'를 지었다
소리방앗간
코터 발모스(루마니아), 2012
1.
보름이가 가게 ‘수평선’ 문을 닫았다. 장터도 열고 모임도 하고 음식도 팔던 복합공간이다. 보름이가 세를 얻었던 제민천 옆 건물이 다른 사람에게 팔렸단다. 때로는 가게 건물이 팔리면 세입자는 별다른 수가 없다.
“가게 그만두고 취미로 유리공예를 배우고 있어요. 기술인이 되어야 나중에 안 심심한 할머니가 될 것 같아서….”
보름이는 공주를 떠났고 난, 보름이가 없는 공주에 갔다.
2004년부터 시작한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는 지난해에 열렸다. 짝수 해에 시작했고 두 해마다 열리니, 홀수 해에는 비엔날레가 없다. 대신 상설전이 열린다. 월요일을 제외하곤 항상 문을 열어 둔다. 전화를 했을 때 관계자는 무척 미안한 목소리로 “지난 3월부터 상설전을 시작했지만, 올해부터 관람료가 5천 원이다”라고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다. 예술작품 감상 비용은 적절하게 책정해야 한다. 모든 예술 감상을 무료로 제공할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예술 문화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드는 출발 지점이다.
비엔날레 개최 기간에는 심포지엄이나 체험 프로그램이 있고 행사가 끝나면 만날 수 없는 작품도 있다. 그럼에도 비엔날레가 끝난 후 작품 대부분을 감상할 수 있는 건 특혜다. 2018년 비엔날레는 물론이고 2014년, 2016년 작품도 만날 수 있다.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가 열리는 곳은 공주 연미산이다. 봉우리 사이를 통과하는 고갯길을 중심으로 위, 아래로 나뉜다. 지난 2016년 비엔날레부터 아래에서 열린다. 덜 가파르다.
고갯길을 넘으면 금강 옆 쌍신생태공원이다. 그곳에서도 강과 바람, 햇볕과 함께 더 오래 전 설치한 다양한 자연미술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자연미술 작품에는 작가도 어쩔 수 없는 한 가지 요소가 작용한다. ‘시간’이다. 자연 속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멸하거나 변해 가는 작품을 감상하는 건, 감상자에게 또 다른 사유 기회를 제공한다.
2.
대전광역시와 바로 이웃한 공주시가 부러운 것 중 하나는 ‘야투(野投)’다. (사)한국자연미술가협회_야투. 1981년 창립한 자연미술 연구 단체다. 간혹, 대전시립미술관이나 대전 갤러리에서도 야투 작가를 만날 수 있다. 자연 안에서 인간을 무척 깊게 사유하는 그들의 작품은 늘 인상적이다. 자연을 객관적으로 보거나 대상화하지 않아서 좋다.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는 공식적으로 2004년 출발했지만 그 뿌리는 다양한 자연미술 국제교류전을 시작한 199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연미술비엔날레는 창립 후 ‘야투’가 축적한 경험을 바탕으로 탄생했다. 갑자기 정책적으로 기획하고 예산을 쏟아부어 탄생한 행사가 아니다. 내공을 축적하며 적절한 때를 만나 시작했다. 이조차도 ‘자연’스럽다.
2018년 비엔날레 주제는 <자연-사적공간-셸터>다. 아스트반 에러스가 전시 총감독을 맡았다.
“2018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의 목표는 건축과 미술이라는 두 영역을 분석하고, 이 둘 사이의 연결 관계를 경험해 보는 것이다. 자연환경과 창작된 사적공간에서의 담론을 주제로 작품 창작을 촉진하는데 그 목적을 둔다.”
지난해 아스트반 총감독이 밝힌 목표다.
고슴도치 통
조셉 타스나디, 게르게이 타스나디(헝가리), 2018
거대한 움직임-이주(유목)프로젝트
아마르사이칸 남스라이야브(몽골), 2018
3.
아스트반 총감독이 생각한 2018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목표는 달성했는지 모를 일이다. 입장료 5천 원을 내고 1천 원짜리 가이드북도 사 들고 산비탈을 내려갔다. 점이 찍히듯 옅은 붉은색 진달래가 곳곳에 피었다. 군데군데 다양한 셸터가 눈에 들어온다. 어린 시절 뒷산에 나뭇가지로 얼기설기 만들었던 비밀기지가 떠오른다. 이 땅에서 구한 소재를 주재료로 사용한 셸터는 이질감을 확실히 덜어 낸다. 전혀 어색하지 않다. 예술가는 사유와 상상으로 존재한다. 그 결과물을 공유하는 즐거움이 감상이다. 각국에서 모인 예술가가 사유와 상상을 버무려 만들어 낸 셸터는 독특한 색깔을 자아내며 숲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주최 측은 셸터를 비바람, 위험, 혹은 공격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도록 지은 창작 구조물이라고 정의했다. 셸터는 대부분 한 사람 혹은 두서넛이 들어갈 수 있도록 제작했다.
조셉 타스나디와 게르게이 타스나디(헝가리)가 제작한 <고슴도치 통>은 나무를 이용해 반원 모양으로 지었다. 그곳에 나무 해먹을 설치했다. 짧게 자른 나무는 앵커로 이어 편안한 관절처럼 자유롭게 움직였다. 딱딱함에서 경험하는 부드러움이 묘하다. 셸터 안에는 바람과 햇살이 끌어안고 내려온 풍성한 솔향이 가득하다.
아마르사이칸 남스라이야브(몽골) 작가가 만든 <거대한 움직임-이주(유목) 프로젝트>는 마차 위에 게르를 올려둔 형태다. 연미산에서 확보한 나무로 만든 마차 뼈대는 거칠지만 당장이라도 말이나 소에 멍에를 씌우면 움직일 듯하다.
“마차에는 푸른 하늘과 더불어 온갖 것들이 다 담겼다. 마차의 바퀴는 하늘과 땅과 영원히 연결된다. 초원의 감추어진 특징은 하늘과 땅 사이에 마차들이 이동하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면 마치 하늘과 땅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가이드북에서 읽은 작가 얘기다.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무엇’에 관한 정의다.
이날 하늘과 땅 위에는 수많은 셸터가 있었다. 셸터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각국에서 모인 작가가 셸터를 제작하며 이미 고려한 자리에 사람이 들어설 때 비로소 완벽하다.
렛잇비(Let it Bee, 창의적 수분 스튜디오; 지식 공간을 시도하다
스테파노 데보티(이탈리아), 2018
4.
야트막한 산 위, 그중 높은 곳에서 둘러보면 미래 어느 시점으로 시간 이동을 한 느낌이다. 다양한 모양새를 갖춘 셸터 군집은 흡사 인류의 마지막 집단 주거지처럼 보인다. 높은 아파트와 빌딩 등 콘크리트 구조물로 가득 채운 도시가 결국 파멸에 이르고, 생존한 인류 몇이 도시괴물에서 도망쳐 숲에 도달해 만든 새로운 주거지 말이다. 2018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이전에 설치한 작품이 곳곳에 남아 셸터와 묘한 조화를 이루며 이런 느낌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과거 혈거인이 동굴에 벽화를 그리듯 마지막 인류는 숲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예술 작품을 창작했다.
미래 마지막 인류의 숲속 집단 주거지를 완성한 것은 중앙부분에 설치한 스테파노 데보티(이탈리아)의 작품 <렛잇비(Let it Bee), 창의적 수분(受粉) 스튜디오; 지식 공간을 시도하다>다. 비엔날레 측은 이 작품에 <사이언스월든-자본>이라는 특별전 이름을 붙였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자발적으로 들어가 살았던 ‘월든’이 ‘과학’이라는 낱말과 붙어 특별전 이름을 구성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월든이 과거라면, 사이언스월든은 다가올 미래다.
“벌은 항상 완벽한 공동체와 생산성의 모델이었다. (중략) 오늘날 자본주의의 위기와 집단지성, 사이버-스페이스 인류학과 같은 개념 사이에서 벌과 벌집은 창의적인 소비주의와 지식공간의 가장 좋은 모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벌집 구조를 연상케 하는 셸터 주변에는 실제 벌이 윙윙거리며 날아다닌다. 각 구조물 끝에 벌통을 설치했다. 작가는 이 작품에 관해 “신성 기하학(Sacred Geometry)의 원형을 바탕으로 고도의 지속가능한 생물체계, 첨단기술장치 및 데이터 클라우드가 벌을 돕거나 벌이 우리를 돕도록 도와주는 스튜디오를 육성하고자 했다”라고 의도를 설명한다. 도시 멸망을 무기력하게 목도한 인류가 다시 신성에 의지하며 자연에 순종하려는 의지처럼 읽힌다.
고도로 발달한 문명이 인류를 파멸로 내몰고, 다시 숲에 다다른 마지막 인류가 셸터를 지은 후 벌을 키우는 모습은 경건하다.
사이를 채우다
로버디 킨거(헝가리), 2018
5.
연미산 셸터 군집이 들어선 산 아래로는 바로 금강이 흐른다.
서쪽으로 넘어가는 태양빛에 반짝이는 강물로 흘러들어 가는 숲 끝자락에서 로버디 킨거(헝가리) 작가가 창작한 <사이를 채우다>라는 작품을 만났다. 2018년 국제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공주에 머문 작가다.
“돌 하나를 주워 당신의 슬픔을 그 안에 담아 내려놓으며 자유함을 얻으라(까미노 데 산이타고에서 행사는 순례의식). 그리고 곰의 머리 아래에 있는 돌탑에 돌을 하나 얹어서 고마의 몸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해 보라.”
로버디는 공중에 매단 곰 머리를 만든 돌은 금강 변에서 주웠다. 그 아래 돌탑은 땅에서 주운 돌로 만들었다. 로버디는 “이 두 부분을 연결할 때 자연과 인간, 과거와 현재 그리고 전설과 현실의 사이가 좁혀질 것이다”라고 밝혔다.
숲속 셸터와 다양한 조형물을 감상하고 내려선, 강이 내려다보이는 그곳에서 마주한 로버디의 작품은 마침표였다.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의 가장 위대한 작품은 어쩌면 연미산 숲과 금강일지도 모르겠다.
보름이가 이곳에 들러 곰 머리 아래 돌탑에 돌 하나 얹으며 슬픔을 내려놓고 자유를 얻었기를 바란다.
글 사진 이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