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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05호] 골목길 산책, 기억의 퍼즐 맞추기
골목은 그 성격상 아파트 단지에는 만들어질 수 없다. 덩그러니 서 있는 15층 혹은 30층 아파트의 경계를 구획하는 것은 골목이 아니라 건물의 동 호수를 알려 주는 표지판이다. 아파트가 늘어나면서 골목은 하나 둘 사라져 갔다. 크고 작은 도시 할 것 없이 개발의 과정에서 골목의 재잘거림과 평상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안부를 묻는 어르신들의 잔기침 소리를 듣기가 어려워졌다.
대전 선화동의 예만 보더라도 그렇다. 옛 대전문화방송 건물이 있던 뒤편에는 골목에서 길을 잃어 버릴 정도의 미로가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지금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두 사람이 어깨를 부딪히며 지나가야 하는 작은 골목길에는 오래된 길 만큼이나 많은 사연이 풀어져 있었다. 사연을 거두고 이어가기보다는 건물을 올리는 게 소중한 개발의 논리는 골목 안 사정을 애써 감추거나 모른 채 할 수밖에 없다. ‘골목길 접어 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라는 노랫말 같은 가슴 뛰는 그녀의 창문도 사라진 지 오래다.
골목에서 딱지치기와 구슬치기를 했던 시절이나 시멘트 벽에 기대어 밀어를 속삭이던 청춘의 시기를 기억하는 이들은 간간이 골목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이른바 ‘응팔의 추억’에 잠기곤 한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은 골목 안 사람들의 이야기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각각의 인물들은 사랑에 가슴 아파하고 처진 어깨의 애잔함을 다독거리며 살아간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자잘한 에피소드의 중심에는 골목이라는 지형이 자리잡고 있다.
기억 속의 골목과 옛 거리의 풍경에 대한 그리움은 우리만이 갖는 정서는 아닌 모양이다. 쿠스미 마사유키와 타니구치 지로가 공동작업한 《우연한 산보》라는 만화책을 보면 우리의 심정과 닮아 있는 거리의 정서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일본의 한 문구회사에 다니는 중견 영업사원 우에노하라가 거리와 골목을 산책하면서 발견하는 정겨운 풍경과 회상을 담고 있다.
주인공은 헌책방에서 찾아낸 그림책을 보면서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거나 세월을 간직한 오래된 가게를 보며 상념에 잠긴다. 여러 삽화 중에서 재개발을 앞둔 마을의 골목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가이드북을 만들어 골목을 널리 알리는 캠페인을 벌이자.”라는 주민의 말에 “이런 골목길은 가이드북에 의지하지 말고 그냥 걷는 게 재미있다.”라는 대응은 골목을 걷는 의미를 배가시키는 데 충분하다.
주인공은 걷다 보면 자기 스스로 재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목적 없이 자기 마음대로 느긋하게 걸으며 오는 기쁨이 산보의 매력이라는 것이다. 골목과 거리 걷기를 산보라고 표현한 것은, 아마도 목적을 향한 걸음이 아니라 해찰을 부리거나 여유롭게 풍경을 즐기라는 뜻일 것이다.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 플롯 역시 산책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저자는 작품을 구상하며 세 가지 규칙을 만들었다고 한다. 첫째, 조사하지 않는다. 둘째, 옆길로 샌다. 셋째,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얼핏 보면 무원칙한 규칙으로 보이지만 그는 의미 없이 걷는 즐거움을 느끼기 위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지도를 본다고 해도 재미있어 보이는 방향의 샛길로 샌다는 규칙은 산책의 묘미를 증대시키는 방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전의 원도심에도 골목이 주는 즐거움이 가득하다. 옛 충남도청에서 대전역까지 좌우로 펼쳐진 골목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젊음의 기운이 풋풋하게 느껴지는 으능정이 거리, 대흥동의 갤러리와 소극장 골목들, 그리고 정동 인쇄골목을 걷고 있으면 시간은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돌아간다.
한병철 교수는 그의 저작 《피로사회》에서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고 지적했다. 또 그는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라고 진단한 바 있다. 현대인들의 이러한 피로를 달랠 수 있는 방법으로 골목길 산책을 추천하고 싶다. 잠시나마 경쟁의 피로를 뒤로하고 정신을 무장해제 한다면 피로의 고독감을 잊게 하는 오래된 기억의 파편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조각들을 맞춰나가면 잊고 지냈던 그 ‘무엇’들이 깨어나지 않을까.
《우연한 산보》의 쿠스미 마사유키는 산책의 비법을 천천히 걷는 것이라고 말한다. 급하게 걸을 때 보지 못한 사실이 더 많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산책을 ‘우아한 헛걸음’이라고 정의를 내린다. 주인공이 도시를 바라보며 “우리는 50년 뒤에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라고 남긴 독백은 오래된 골목을 기억하는 우리 모두가 함께 생각해 볼 말이다.
글 스토리밥 작가협동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