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44호] 3·8민주의거의 역사적 함의

3·8민주의거의

역사적 함의

     

특별기고

  


  

3·8민주의거 기념비

  

Ⅰ.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지난 3월 8일 대전시청 남문광장에서는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고 처음으로 ‘3·8민주의거 기념행사’가 열렸다. 6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서야 3·8민주의거가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것을 지켜보았던 당시의 주역들은 감격에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러나 마산 3·15의거는 알아도 대전 3·8민주의거는 잘 모르는 시민이 많다. 간단히 3·8민주의거를 요약하면 지금으로부터 59년 전인 1960년 3월 8일 대전고등학교 학생 1,000여 명이 당시 자유당 정권의 부정한 독재에 항거해 분연히 일어나 거리로 뛰쳐나와 불의에 침묵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뜨거운 함성과 정의의 몸짓을 보였던 날을 말한다. 그날의 3·8 민주시위는 2·28 대구 민주화운동, 마산 3·15의거와 함께 민주의 도화선이 돼 4·18, 4·19혁명으로 이어져 이승만 대통령 치하의 자유당 독재정권이 무너지는 전기가 되었다. 이러한 당시 고등학생들의 순수한 민주와 정의를 향한 열정은 60년대는 물론 70년대의 긴급조치와 80년대의 신군부 치하 속에서도 줄곧 이어져 1987년 6·29선언이란 성과로 이어졌고 2016년 국민들의 촛불시위로 번져 정권교체를 가져오는 결과로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을 보면서 필자는 3·8민주의거를 돌아보는 동시에 역사의 준엄함을 느끼며 새삼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져 보게 되는 것이다. 역사는 개개 사건과 사람들의 생각이 부딪쳐 일어나는 시간의 흐름이지만, 그 흐름 속에는 어떤 의미와 나름의 법칙이 있다고 보는 게 역사학자들의 견해다. 유구한 역사의 흐름을 대하면서 우리는 겸허해야 한다는 것과 함께 역사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역사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에 앞서 우리 조선시대를 보면 역사는 아주 중요한 통치시스템 속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은 조선왕조실록은 물론 홍문관과 같은 통치기구를 두어 역사기록을 통해 정치의 바른 구현을 통치의 전범으로 삼으려 했고, 사관은 당시 최고 엘리트를 선별해 배치할 정도로 투철한 역사의식을 강조하고자 했다. 서양의 경우 독일의 관념 철학자인 G·W·F 헤겔(1770~1831)은 역사철학이란 저작에서 역사를 ①근본적 역사 ②반성적 역사 ③철학적 역사로 나누어 역사를 고찰하는 한편 ‘절대정신의 자기전개 과정’이라는 세계사의 유명한 명제를 내놓았다. 유럽이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이성의 시대로 넘어가는 데 기여한 헤겔이었지만, 이로 인해 기독교적 역사관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고장 출신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은 역사를 ‘我와 非我와의 투쟁’으로 보았는데 당시 나라를 빼앗긴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나온 역사관이 아닌가 여겨진다. 또 영국의 역사학자 E·H 카(1892~1982)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가 역사라고 보았다. 과거 속에서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읽어 내 나름의 교훈을 얻는 게 역사적 고찰이란 해석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실천적 역사가인 함석헌 선생(1901~1989)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역사는 하나”라고 했는데 이는 역사 전체를 꿰뚫는 하나의 큰 뜻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밖에도 과학철학자 칼 포퍼(1920~1994)는 “역사의 미래과정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펴내 역사주의를 반박했다. 이외에도 많은 역사학자들의 견해가 있지만, 이를 길게 논하는 것은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역사를 개개 사건의 나열로 보는 데서 벗어나 어떤 관점을 갖고 보아야 진정한 역사의식을 가질 수 있다고 보는 게 필자의 견해다. 이와 함께 역사는 오늘날 많은 전 세계 관광객의 주요 볼거리라는 점에서 도시의 역사가 중요시된다는 점을 부연해 두면서 다음으로 3·8민주의거를 살펴보기로 한다.

  
Ⅱ. 3·8민주의거와 당시의 시대적 배경
대전에서는 일제 강점기부터 학생운동이 면면히 이어져 왔다. 광주항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1930년 1월 중순부터 대전공립상업보습학교학생들은 동맹휴학을 결의하고 ‘조선인 학생 석방’을 외치며 지금의 인동사거리까지 행진한 것을 비롯, 대전중학교의 ‘선우회’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1932년 군시제사대전공장의 파업사태에도 앞장서는 등 학생들의 항일의식이 이어졌다.
한편, 3·8민주의거가 일어난 1960년 이전 우리나라의 시대적 배경을 잠시 살펴보면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에 불과했을 만큼 국민들은 절대빈곤에 놓여 있었고, 해방 당시 문맹률이 86%로 국민들의 교육 수준은 오늘날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었다. 이런 국민들의 생활 수준은 어떤 점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정부 수립 후 독재로 가는 토양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짤막하게 자유당 정권과 이승만 대통령이 독재로 간 12년의 과정을 보면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 당선→1952년 부산 정치 파동 속 이승만 대통령에 재선→1956년 5·15선거에서 이승만 3대 대통령 당선→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으로 85세 이승만 당선→1960년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 사임 성명 발표 후 대통령직 사임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이 네 차례의 선거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치러지지 못한 채 온갖 편법과 술수가 동원된, 민주주의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선거였으며 그런 속에서 이승만의 독재체제는 장기집권에 집착하는 모습으로 이어졌다. 그런 12년의 독재체제 속에서 대구의 2·28민주화운동과 대전의 3·8민주의거, 마산의 3·15의거가 솟아 나오면서 4·19혁명으로 이어지면서 자유당 정권이 붕괴된 것이다.

  
Ⅲ. 3·8민주의거의 전개과정
자유당 말기인 1960년 3월 8일 대전고등학교 학생들이 민주와 정의의 함성을 세상에 외친 3·8민주의거의 전개과정에 대해 당시 참여했던 대전고 동문들이 많은 기록물과 자료를 통해 상세히 밝히고 있다. 필자는 2005년 사단법인 3·8민주의거 기념사업회와 대전·충남 4·19혁명동지회가 발간한 《3·8민주의거》 창간호에 실린 3·8의거 당시 대전고 학도호국단 대대장이자 3·8민주의거 기념사업회 부의장이었던 박제구 동문이 쓴 <3·8민주의거의 배경과 전개 과정>을 요약 소개하는 것으로 3·8의거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이 자리를 빌어 이 글을 쓴 박제구 님에게 고마운 말씀을 드린다.) 
  

「1960년 3월 15일은 대한민국 제4대 정·부통령 선거일로 당시 집권 여당인 자유당은 이승만 대통령을 다시 대통령 후보로 앞세우고 이기붕 부통령마저 당선시키기 위해 각종 부정부패는 물론 강력한 조직력과 금력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전횡하고 있었다. 사회 각계각층으로 각종 부정선거 방법을 총동원했다. 학원도 교장선생님은 물론 선생님들을 중심으로 학부형들을 3인조, 4인조 등으로 조 편성까지 하도록 획책하고 걸핏하면 각종 행사에 학생들을 동원하는 것은 물론 수업시간을 중단하고 교내방송을 통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미화된 사상과 담화문을 듣게 하는가 하면 왜곡 보도로 메워진 정부여당지 《서울신문》을 강제 구독하도록 했다.
2월 28일 대구 수성 천변에서 거행될 민주당 부통령후보 유세장에 학생들이 참석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일요일인데도 시내 모든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학기말시험 등 갖은 명목으로 등교시키기로 하자 경북고등학교 학생 전원이 학교 단위로는 처음으로 시위를 감행했다. 그들은 “백만학도여! 정의의 피가 있거든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고 외치며 백만학도의 동참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신문 보도를 보고 온 다음 날 아침부터 교내 어느 교실이고를 막론하고 동병상련의 분위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3월 7일 월요일 나는 그동안 수차례 주변 친구들과 의견을 모아 두었던 터라 전교생 동원계획을 성공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기율부장 최정일을 만나 도서관을 배회하며 2·28 경북고생들의 시위를 거론하자 상기된 얼굴로 변하는 것이었다. 대대장과 기율부장이 아니더라도 누구든지 앞장서기만 하면 시위는 성공할 것 같은 분위기에서 의기투합했다.
7교시 후 대전중 동창인 보문고 강무송의 집에 최정일, 박선영 등 10여 명이 모였다. 한 시간여 만에 시위를 계획했다. 3월 8일 오후에 민주당 유세장인 대전공설운동장을 일차 집결지로 하고 시위코스는 대흥동 로타리-공설운동장-인동사거리-대전역-도청앞-모교로 하였고 대전 시내 전 고등학생들이 연대해 총궐기하기로 했다. 결의문은 대대부관인 홍석곤이 써오도록 하고 낭독은 운영위원장인 박선영이, 구호는 학생 신분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현실적인 불만을 표시하도록 ①서울신문 강제구독을 반대한다 ②신성한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로 정하는 한편 공고, 상고, 보고, 사범, 대전여고, 서여고, 호수돈여고의 대표격인 학생들에게 우리의 시위계획을 알리고 이를 협의하기 위해 8일 오전 11시까지 YMCA(전 중앙동사무소)에서 각 학교 대표들이 회동하도록 임무를 분담했다.
8일 아침 1교시가 끝나면서 2학년은 물론 1학년 교실에도 시위 분위기가 출렁이고 있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런데 2교시 끝날 무렵 학생과장 선생님이 교실로 찾아와 나를 잡고 교무실로 가자는 것이었다. 교무실에 가서 앉자마자 “너 데모하려고 계획했다며,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일제 때에 우리도 다 시도해 봤지만 쓸데없는 짓이야. 끌려가서 죽도록 맞고 몸만 병신된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교장실로 데려갔는데 어제 저녁 우리들의 모의 사실과 오늘의 계획까지 소상히 알고 있었다. 잠깐 머뭇거리다 반항조로 이런 어려운 일은 젊은 피가 넘치는 백만학도가 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있을 때 교장선생님이 들어오셨다. 교장선생님은 이미 전후 사정을 다 알고 계신 듯이 “너희들의 의지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중요한 것이다”는 말씀을 하는 것이었다. 교장선생님이 학생과장에게 “학생간부들을 전부 교장실로 불러오세요”라고 지시해 나는 학생과장님을 따라가는 척 교장실을 빠져나와 YMCA로 향했다. 

  

경찰에 집단연행 되어 가면서도 “학원에 자유를 달라”고 외치는 대전고등학교 학생들

  
그런데 우려했던 가장 나쁜 상황이 나타났던 것이다. 약속시간을 20분가량 더 기다리다가 학교로 돌아왔는데 교실에 갔더니 분위기가 대단히 고조되어 있었다. 교무실로 해서 교장실로 갔으나 이미 길 건너 교장 사택으로 학생 대표들이 전부 감금된 상태에 있었으므로 나는 그곳으로 갔다. 어디 갔다 왔느냐는 교장선생님의 추궁에 약 봉투를 꺼내며 병원에 다녀왔다고 했다. 나는 어지러워서 벽에 조금 기대어 눕겠다고 문을 열고 옆방에 갔다. 그리고는 내 곁으로 다가오는 몇몇에게 그동안의 분위기를 물어보고 몇몇과 대화를 나누었다. 점심을 짜장면으로 시켜 먹고 계속 감금상태에 있었다. 민주당 강연이 끝날 때까지 잡아 놓으려는 학교 당국의 계산인 모양이었다. 세 시간가량의 감금으로 교장선생님의 심기는 조금 풀린 듯했고 답답함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울타리 너머 교정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오고 또 그 소리가 잦아지고 있었다. 교내에서는 5교시가 끝나고 1, 2학년 가릴 것 없이 전교생이 앞다투어 선봉장으로 나서겠다는 분위기였다. 이때 일부 강경파는 집결지인 농구장에서 서성이기 시작하며 교문을 나서려는 분위기가 되었던 차에 최정일이 나에게 다가와 “너는 교장선생님을 꼭 붙들고 있어. 내가 먼저 앞장서서 담을 넘어 뛸 테니. 우리 학교만이라도 계획대로 하는 거야” 하며 서둘렀다. 그가 뛰자 거의 반사적으로 모든 간부가 담을 뛰어넘었다. 나는 교장선생님을 가로막고 있었고 교장선생님은 나를 붙들고 있으면 큰불은 끄리라는 생각이 맞물려 있는 것 같았다.
이때 교장선생님이 교무실로 전화를 하시는데 앞장서 뛰어나온 시위대가 교장 사택 정문에 도착해 대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박제구가 나와서 행렬에 앞장서라는 것이었고 이 자리에서 결의문을 낭독하고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결의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의와 진리를 사랑하는 우리들 대고 건아는 최근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도와 학교당국의 처사에 대하여 이의 조속한 시정책을 촉구하는 바이며 이로써 대고의 명예와 우리의 앞날을 더럽히지 않도록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외부세력의 학원침투 방지, 교내에서 선거운동 반대, 서울신문 강제구독 사절, 언론탄압 반대!”
당황한 교장선생님이 나를 붙잡았지만 시위에 앞장섰다. 그런데 지금의 교문 앞 도로에서 대대간부와 기율부원들이 늦게 교문과 울타리를 넘어온 학생들을 모아 대열을 추스르는 중에 나를 제지하시는 선생님들과 실랑이를 하는 사이 나머지 대대간부와 기율부원들이 구호를 선창하고 대열에 호응하며 빠른 속도로 행진해 이미 대흥로타리에 닿은 듯하고 후미는 대흥파출소까지 질주하고 있었다. 간신히 선생님을 뿌리친 나도 뛰었다. 공설운동장 앞에 거의 선두가 다다랐을까 생각하며 겨우 행진대열 끝에 따라잡았을까 하는데 선두에서는 출동 중인 무장경찰과 경찰백차의 제지를 받고 몇 개 집단으로 갈려지고 끊어진 대열의 일부는 뒤로 밀려오고 있었다. 나는 이때 앞서 선생님들과의 심한 실랑이로 교복 단추도 다 떨어지고 손바닥은 피투성이 된 채 얼마나 빨리 뛰었든지 얼굴이 창백해지고 숨이 막힌 상태였는데, 한 후배가 근처 자취방에서 잠깐 진정하고 가자고 해 잠시 쉬었다가 다시 부랴부랴 우리가 계획했던 코스를 앞질러 대흥동 로타리를 거쳐 대흥교, 중교, 목척교로 뛰었으나 대열과 합류할 수 없었다.
그런데 시위대열은 사정없이 후려치는 무장경찰의 총부리에 피투성이가 되기도 하고 목덜미를 끌려 연행되기도 하고 논바닥에 밀려 반흙투성이가 되며 근처 똥통에 빠지기도 했다. 경찰백차에 실려 가면서도 대오를 정리하고 스크램을 짜고 구호를 외쳤다. 중교에 이르자 경찰백차의 저지를 당해 복잡한 중앙시장으로 쫓기며 다시 구호를 외치고 다음은 대전역 광장에 이르렀다. 백차, 기마대, 무장경찰의 집중저지에 맞서며 총부리에 맞고 쓰러진 대원을 연행하는 경찰을 향해 공세를 취하기도 하다가 돌을 주워 경찰에 던지는 투석전도 했다. 또 일부는 신도극장 쪽으로 해서 보문고, 목척시장을 거쳐 도청 앞으로, 일부는 서여고, 대흥동 시외버스터미널(지금의 대림빌딩)로 온통 대전 시내가 출렁이고 있었다. 시민들은 “참 잘했다. 우리가 할 일을 너희가 해 주었구나” 하며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시민들의 분노와 격려의 눈빛을 받으며 학교로 왔다. 농구장에는 이미 돌아온 학생들이 나머지 학생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대하면서 운집해 있었다. 한참 후 교장선생님의 훈시가 있었다. “잘했다. 이것으로 끝이다. 너희들은 이 시대의 학생으로서는 할 만큼 다했다.” 학생의 신분으로 돌아가라는 재발 방지성 훈화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연행된 동료들이 다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맞서고 있었다. 나는 연행된 70~80명의 학생들이 주모자가 누구냐는 경찰의 추궁에 곤혹을 치른다는 말을 듣고 경찰서로 향했다. 2층 사찰계로 갔으나 동료들은 사방으로 분리 취조당하느라 볼 수가 없었다. 2시간 정도 후 지하고문실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질문하다 협박하다 주먹질, 발길질, 꿀밤은 보통, 배후조정자가 누구냐는 것이었다. 20~30분이 지났을까 아니 2~3일이 지난 것과 같은 공포의 시간 그 자체였다. 그런데 심문하던 한 사람이 밖에 갔다 들어오면서 경찰국장 지시라고 하면서 연행자들을 즉각 서장실로 데려오라는 명령을 했다. 이때 서장실에 박선영과 나만 남아 있고 모든 학생은 방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두세 시간이 흘렀을까, 총동창회장과 양정목 씨(박선영이 기거하던 절의 주지)가 오셔서 신원보증을 서고 재발을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관용 지프차를 타고 귀가했다. 새벽 2시가 넘었다.」

 
-박제구 <3·8민주의거의 배경과 전개 과정> 요약

  

이상 당시의 3·8의거 때 참여했던 당사자의 회고를 통해 3·8 당일의 시위 모습을 살펴보았는데 다음 장에서는 대전의 역사 속에서 3·8의거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Ⅳ. 100년 도시 대전역사 속 3·8의거의 역사적 함의
21세기 들어서 세계는 말 그대로 지구촌화되고 있다. 정보화, 세계화의 급속한 진전으로 지역의 일도 세계인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지극히 쉬운 일이 되었다. 세계화가 되면서 지역의 가치가 더 주목받는 역설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는 게 지금의 세계 모습이다. 아울러 21세기의 세계인들은 걷기와 여행을 통해 전 세계를 돌고 있으며 이런 흐름 속에서 다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돌아보는 세계인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관광자원화해 관광산업으로 국부를 창출하고 있다. 관광객이 여러 문제를 유발하기도 하지만,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 될 수 있고, 산업시설이 없이도 고용유발 효과와 수입을 올려 준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그 나라, 지역의 이미지를 높여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전 세계 국가들이 관광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보게 된다.
대전은 도시의 형성 역사가 100년 남짓된, 다른 지역에 비해 역사가 짧은 도시에 속한다. 1904년 경부선철도와 1913년 11월 호남선이 개통되고 1932년 공주에 있던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해 오면서 대전은 교통도시, 행정도시로 부상했고, 이에 따른 상공업시설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1935년 부(府)로 승격한 전형적인 일제의 신흥식민도시가 되었다. 오늘날의 잣대로 보면 대전은 일본인들이 그들의 식민지 건설에 부합하는 ‘신도시’로 건설된 것이다. 조선 속의 도시이면서 대전역에 내렸을 때 보이는 도시풍경은 ‘일본인들과 일본의 도시풍경이었다’는 일제 강점기의 풍설은 대전이 어떤 도시였는가를 말해준다. 8·15해방과 함께 대전에는 교통도시로의 장점에 따라 인근과 영·호남 등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6·25전쟁은 대전을 ‘피난 도시’, ‘피난 속 수도’로 만들면서 특히 이북에서 내려온 많은 피난민이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개발연대를 거치면서 일약 100만 명의 인구로 팽창했다. 70년대부터 시작된 대덕연구단지와 1993년의 대전엑스포는 대전을 세계적인 과학도시, 문화도시로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그 후 인근에 국가행정기관이 들어서는 세종시가 되면서 대전은 또 하나의 도시 변신 계기를 맞고 있다.
이러한 대전의 100년 역사 속에서 오늘 논의의 주제인 대전고 3·8의거는 어떤 의미를 지니며 이를 어떻게 대전이라는 도시의 역사자원으로 삼아야 하느냐가 필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이다. 3·8의거가 일어난 대전고의 역사는 멀리 19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4년 경부선 철도 건설과 함께 들어온 일본인들은 대전을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건설하기 시작했다. 황무지나 다름없던 대전은 이렇다 할 토착세력이 없었고, 철도건설로 전국의 한가운데라는 이점은 물론, 당시 만주까지 연결되는 철도로 대전은 물류의 수송이 원활한 장점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대전의 지리적 이점에 주목했고 또 순박한 인심에도 이 도시의 가능성을 보았을 것이다. 일본인들은 총독부의 지원으로 충남의 최고행정기관 도청을 이전시키는 데 성공해 대전은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온다. 바로 그런 도시 중심에 1917년 경성중학교 대전분실이 설치되고 다음 해 대전중학교가 되어 해방 때까지 대전중학교는 충청·호남지역 엘리트 배출의 산실이 되었다. 해방 후 대전중학교는 1950년 학제개편에 따라 다음 해인 1951년 8월 대전고등학교로 재인가되어 오늘에 이르렀고 2017년 개교 100주년을 맞았다. 
짤막하게나마 대전고의 역사를 이야기한 것은 이 학교의 역사가 곧 대전의 역사요 대전의 역사적 흐름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대전고는 ‘한강 이남의 경기고’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엘리트 교육의 대명사였고, 특히 3·8의거가 일어나기 전인 1957년 10월 ‘제1회 남녀고등학교 학술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성과를 올렸다. 당시 부임한 박관수 교장은 일본 광도고등사범학교와 동경제대에서 교육학과 심리학을 전공한 엘리트였으며 사회의 여러 요직을 거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공부만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교단풍토 속에서 사회정의와 불의 척결을 외치는 1960년 3·8의거가 일어났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 대전의 고등학생들로 인한 사건이지만, 과거 식민도시였던 대전이 이제 당국의 눈치를 보는 타율적인 시민에서 스스로 민주주의를 의식한 시민의식이 싹튼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이라는 게 필자의 해석이다. 
이 3·8의거가 일어날 당시인 60년대부터 대전은 한때 ‘야당 도시’로 불릴 만큼 시민들의 정치의식이 높아졌고, 그 후 4·19혁명에서 대전고 출신 손중근, 고병래, 이기태 세 사람이 고귀한 목숨을 바쳤다. 이러한 정의와 불의에 저항하는 정신은 1970년대의 민주화 투쟁과 1980년대의 신군부에 대한 반대 투쟁으로 6·29선언이란 결과를 이루어 냈고, 한 외국 기자가 말했던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보는 것은 쓰레기통 속에서 장미를 보는 것과 같다”는 비아냥을 잠재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대전은 민주세력이 꾸준히 활동을 펴 왔고 2016년 전국적인 촛불시위에도 많은 시민이 참여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순수한 학생들의 행동으로 촉발된 3·8의거는 대전 100년의 역사 속에서 민주시민을 각성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평가받을 수 있고, 이제 그 숭고한 뜻이 인정돼 49번째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필자는 이제 대전이 역사가 일천한 도시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근대도시, 또는 현대사의 굴곡에서 숱한 역사의 켜를 도시 대전의 자원으로 삼아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둔산에 세워진 3·8민주의거 기념탑과 함께 그동안 3·8기념사업회에서 주장해 온 ‘3·8기념관’ 건립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할 사안이다. 3·8뿐 아니라 대전의 100년 역사를 보여 주는 많은 기록과 자료를 한눈에 보여 줄 수 있는 가칭 ‘대전역사자료관’을 건립해 대전을 찾는 내외국인에게 대전의 역사 전모를 보여 줌으로써 대전을 ‘세계 속의 도시’로 각인시켜 나갈 때 3·8의거의 의미도 더욱 조명될 수 있을 것이다. 미국과 유럽 등 이른바 선진국들이 자국의 오래된 역사적 기록과 유물을 소중히 간직하는 것은 이를 통해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정신 속에서 어제보다 진전된 현재와 미래를 창출해 왔기 때문임을 3·8을 계기로 다시 재조명해보게 된다.

  


글 조성남(前중도일보주필·대전고100년사 집필위원)

사진 월간토마토, 《3·8민주의거》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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