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43호] 민간인 통제구역 '밤'을 허하다

민간인 통제구역

'밤'을 허하다

  

캠프 그리브스

  


  

 

1.
복잡한 서울 강변북로를 벗어나 자유로로 접어들면서 분위기가 확연하게 달라졌다. 상대적으로 도로는 한적하고 좌측으로 길을 따라 이어지는 철조망은 수십 년간 이어온 현실을 드러냈다. 그나마 요즘 분위기 때문인지 철조망은 좀 다른 느낌이다. 냉전시대를 상징하고 기억하는 거대한 설치작품 정도로 여겨졌다. 아렸다. 멀지 않은 시간에 저 철조망조차 걷어 버리는 상상을 했다.
자유로 끝에 다다라 통일대교 검문소를 만났다. 임진강 위를 건너는 다리다. 자율의지를 가지고 갈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이다. 통일대교를 건너기 위해서는 예통 심사를 받아야 한다. 현장에서 신분증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 미리 방문자 이름과 생년월일, 주소 등을 군부대에 통보해야 한다. 이 역시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검문소 앞에 차를 세우고 앳된 초병에게 신분증을 건넸다. 표정이 밝고 환하다. 초소 안에는 푸른 눈의 미군이 편하게 앉아 무엇인가를 본다. 사실, 스웨덴 군인인지 미군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나라 군인인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 땅 검문소 안에 외국 군인이 있다는 것 역시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앳된 초병은 어디론가 무전을 했고 사전 방문자 등록 여부와 본인이 맞는지를 확인했다. 신분증은 가져가고 기호와 숫자를 적어 코팅한 종이를 건넨다. 출입증이다. 현실에 비해 참 보잘것없다.
차량 진행을 방해하는 철 구조물을 요리조리 피하며 차량을 전진시킨다. 당장이라도 뒤에서 목덜미를 낚아챌 것처럼 불안감이 찾아든다. 구조물을 통과하는 것치고는 제법 빠른 속도로 검문소 하나를 더 통과해 진행한다. 정신을 차리고 내비게이션을 확인하니 이미 네트워크 상에 내 위치는 오리무중이다.
사전에 안내받은 길찾기 방법을 떠올렸지만 내비게이션 의존도가 한없이 높아진 길찾기 능력은 거의 바닥이다. 오른쪽 왼쪽도 헷갈리고 도로에 세워 둔 각종 안내판은 뒤섞여 해독이 어렵다. 몇 번 방향을 꺾으며 군부대를 지나 ‘캠프 그리브스’에 도착했다. 통일대교에서 차로 채 10분도 걸리지 않는다.

 

 

2.
키가 무척 큰, 철문이 캠프 그리브스 경계를 구성한다. 지나쳐 온 바로 옆 군부대와 달리 초병도 없고 문은 활짝 열렸다. 바로 그 출입문 앞에는 ‘ism ism 잊음 잊음’이라는 네온이 반짝거린다. 노랑색, 빨강색, 초록색, 파랑색, 가지각색이다. 군부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이질감에 잠깐 당혹스러웠지만 의미는 금방 직관적으로 읽힌다. 앞서 우리 현실을 보여 준 모든 것은 결국 ism에서 출발했다. 국제 정세와 강대국의 자국 이익 추구가 더해지며 완성됐다. 이념을 뜻하는 ism을 잊어야 하고, 그 위에 다시 평화를 구축해야 한다는 작가 의도가 분명하다. 인세인박 작가 작품이다. 지난 2018년 진행한 ‘캠프 그리브스 DMZ 평화정거장 사업’의 흔적이다.
캠프 그리브스는 행정구역상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에 속한다. 이곳은 DMZ 남방 한계선에서 불과 2km 떨어진 곳으로 서울보다 개성이 훨씬 가까운 곳이다. 한국전쟁 이후 50여 년간 미군이 주둔하던 공간이다. 미 2사단 506연대가 머물렀다. 미군 철수 이후 철거를 검토했지만 경기도와 경기관광공사가 2013년 민간인을 위한 평화안보 체험시설로 리모델링했다. 출입문을 지나 오른쪽으로는 드라마 <태양의 후예> 촬영 세트장을 그대로 남겨 둬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체험거리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캠프 그리브스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옛 군 시설을 리모델링해 만든 유스호스텔이다. 민간인 통제구역 안에 있는 유일한 체험형 숙박시설이다. 총 4층 규모 건물 한 동이다. 각 층별로 객실이 있고 4층에는 식당과 강당, 세미나실 등을 잘 갖춰 두었다. 객실은 인솔 교사나 버스 기사 등 숙소를 제외하고는 모두 군 병영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했다. 각 10명씩 쓸 수 있는 객실은 군 내무반 침상처럼 나무 마루에 수납장을 갖췄다.
민간인 통제구역 안에서 하루를 묵는 경험은 많이 색달랐다. 높지 않은 산 구릉을 따라 도로를 만들고 곳곳에 미군이 사용했던 공간을 철거하지 않은 채 전시관이나 아카이브 공간으로 활용했다.

 

 

3.
아직 재활용을 진행하지 않는 공간은 세월의 흔적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변함없이 그 자리에 꼿꼿하게 서 있다. 얕은 구릉을 따라 도로를 만들고 필요한 곳에 점점 건축물을 늘려 갔다. 건축 양식이나 낡음 정도에 따라 어떤 순서로 지었는지 대충은 가늠해 볼 수 있다.
캠프 그리브스를 가장 독특하게 드러내는 건축물은 퀀셋 막사(Quonset Huts)다. 설명에 따르면 한국전쟁 직후 임시로 짧은 시간 주둔할 것을 예상하며 빠르게 짓고 빠르게 철거할 수 있는 퀀셋 막사를 세웠다고 한다. 둥근 원이 땅을 뚫고 올라오다가 절반 정도 지점에서 딱 멈춰 버린 모양새다. 간결하며 규모가 크지 않지만 무척 실용적이다. 첫 퀀셋 막사를 세울 때만 해도 50여 년을 그 자리에 뿌리 박고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터다. 일부 리모델링을 끝낸 퀀셋 막사는 흥미로운 작품을 전시하거나 아카이빙을 하는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넓지 않지만 공간은 그 안에 놓인 작품과 사물에 집중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특징이 있다.
오솔길을 따라 이리저리 소요하며, 출입문 근처에서 보았던 작품과 같은 프로젝트로 설치한 작품을 만났다. 사람을 가운데 둔 사격 표지판과 낙하하는 미사일에 사선을 긋고 원을 둘러씌운 표지판이다. 모두 잠깐 생각하지 않으면 본래 그곳에 있었던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정보경 작가 작품이다.
제주도에서 차를 운전하다 보면 결국 바다가 내다보이는 끝에 다다르는 것처럼 캠프 그리브스를 돌아다니면 곳곳에서 울타리를 만난다. 그곳이 끝이다. 다양한 절차를 거치며 힘들게 들어온 DMZ 민간인 통제구역 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 동선은 분명하다. 그나마 야간에는 활짝 열렸던 출입문도 굳게 닫힌다. 허락된 공간 안에 머물러야 하는 것에 영 적응이 쉽지 않고 그 현실 또한 마뜩찮지만 통제구역 안에 들어와 밤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 다양한 감각을 일깨우는 경험이다.
하늘은 허락된 울타리를 벗어나 한없이 내달린다. 총총히 박힌 별빛이 아름답다.

 


글 사진 이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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