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42호] 공깃밥 한 병 더 주세요

공깃밥 한 병

더 주세요

 

정덕재의 일상르포

 


 

오랜 습관 탓으로 돌리기에는 치명적인 실수였다. 한 번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격언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지난해 봄, 모처럼 아들 녀석과 식당에서 저녁을 같이 먹었다. 늘 그렇듯, 나는 소주와 맥주를 황금비율로 조제해 위장을 촉촉하게 적셨다. 아들은 안주를 반찬 삼아 젓가락을 분주하게 움직였다. 내가 술 반병을 다 먹기도 전에 녀석은 밥 한 그릇을 비웠다. 뒤돌아서면 배고프고, 쇠도 소화시킬 20대 청춘이기에 밥 두 그릇은 기본이다. 나는 호기롭게 종업원을 향해 외쳤다.
“여기 공깃밥 한 병 더 주세요.”
아차, 아뿔싸,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들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고 나는 눈을 둘 데가 마땅치 않아 천장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공깃밥 하고 술 한 병 더 드려요?” 종업원은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무의식적인 습관이라고 하기에는 치욕적인 외침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한동안 아들의 놀림감이 됐다. 예를 들면 밥을 먹을 때 “아빠 소주 한 그릇 줄까”, “냉장고엔 반찬은 없고 안주만 있는데”, “아예 공깃밥 두 병을 미리 갖다 놓고 드시지”, 이런 식의 어법을 구사했다.

 

금주 한 달이 지나고
지난해 12월 중순, 십이지장 출혈로 열흘 가까이 병원 신세를 졌다. 후유증 탓에 술잔을 들어 본 지 한 달이 훌쩍 지났다. 집 안 베란다에 있는 소주와 맥주병은 외롭게 주인의 처분을 기다리며 뽀얀 먼지를 쌓아 가고 있는 중이다. 비상 안주로 마련해 둔 골뱅이는 깜깜한 캔 안에서 한 줌의 빛을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장기간 술을 마시지 못한 사례는 세 손가락에 꼽는다. 모두 내 의지라기보다는 질병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예전 같으면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음주운전 단속현장을 지날 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다. 지금은 침이 튈 정도로 음주측정기에 숨을 크게 내뱉는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다. 물론 언제까지 금주 기간을 이어 갈지 장담할 수 없지만, 족히 꽃피는 춘삼월까지는 이어 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회복 정도에 따라 그 기간이 길어질 수도 있지만 말이다.
술잔을 들지 않는 날이 하루 이틀 늘어나면서 지나온 술자리의 기억이 스멀스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반성인지 그리움인지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내가 처음 술을 마셔 본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문예부 활동을 같이하던 친구네 집 골방에서였다. 
“술맛이 쓰다 넌 어떠냐?”
“인생이 쓴맛이라더니 술맛이 인생이네.”
녀석은 다소 낭만적인 취기로 술과 인생과 문학을 얘기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는 박인환의 시를 낭송했다. 그러면 나는 이어지는 시 구절을 읊조렸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술 한 병을 비워 가면서 십 대 청춘들의 객기 어린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글 쓰는 사람은 술을 잘 마셔야 한다는 근거 없는 이유를 들어가면서 달짝지근한 쥐포를 질겅질겅 씹었다. “술이라고 하면 수주를 뛰어넘을 자가 없고 담배라고 하면 공초를 뛰어넘을 자가 없다”는 현대문학사의 에피소드를 주절거리며 시인과 소설가들의 음주 이력을 들춰가며 낄낄댔다. 
고3 시절에는 보문산 포장마차를 종종 찾았다. 술기운을 빌어 야외음악당 무대에서 음정 박자도 맞지 않는 노래를 불렀고 밤하늘의 별과 달을 보며 감상의 시기를 보냈다. 공식적으로 당당하게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은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대학 입학과 함께 강의실보다 더 자주 찾은 곳은 막걸리 집이었다. 맥주병에 막걸리를 담아 한 병에 2백 원씩 파는 술집에서 문학에 대한 열정(?)은 깊어 갔다. 
옥천에서 학교를 다니던 소설 쓰는 선배와 함께 대전역 광장에서 술을 자주 마셨다. 학교 앞이나 대흥동에서 한 잔 걸치다가 마지막 자리는 대전역으로 이어졌다. 옥천행 마지막 기차를 타기 위해 선배는 대전역으로 향했고 그를 따르던 후배들은 오합지졸처럼 광장 바닥에 앉았다. 한 장의 신문지는 쟁반으로 쓰였고 그 위에는 소주와 새우깡이 놓여 있었다. 새우깡은 항상 남았고 술은 늘 부족했다. 선배는 마지막 기차를 보내고 난 뒤 이청준의 지식인 소설과 이문구의 사투리 문체의 탁월함을 들려줬다. 윤흥길과 윤후명의 작품도 자주 안주로 등장했다. 술병 위로 햇살이 비출 때 우리는 비로소 일어나 집이 아니라 다시 학교로 향했다. 학교 앞 술집에 다시 등교를 했다.

 

술을 멀리하니 다른 생각이
술잔을 멀리하면서 찻잔을 가까이하고 있다.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의 연속이다. 카모마일, 루이보스, 라벤더 향을 맡으며 그 어떤 냄새도 알콜 기운을 대신할 수 없다는 확고부동한 생각을 조금씩 지워 나가고 있다.
그동안 물과 술 이외의 마실 거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피자를 먹을 때 콜라가 필요하다는 수준을 넘지 않았다. 피자가 소주 안주로 손색이 없다는 탐구까지 이어진 이후엔, 피자와 콜라도 충분히 떨어질 수 있는 관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요즘 주로 마시는 것들은 양배추 달인 물과 느릅나무를 우려낸 물이다. 양배추 물은 아들이 고등학교 때 여드름 치료용으로 먹기도 했다. 당시 나도 몇 번 먹어 본 기억을 시로 옮긴 적이 있다. “양배추 달인 물을 처음 마신 날/ 아들은 잘 말리지 않은 행주 냄새가 난다며/ 행주수라 명명했다/ 베란다를 보며/ 웃는 날은/ 빨랫줄에 행주가 널려 있다/ 햇볕 좋은 날/ 아들은 빨래가 잘 마르도록 뒤집어 준다”(〈양배추와 행주〉 중에서 일부)
느릅나무 껍질은 강원도에서 약초를 캐는 분한테서 직접 공수를 받아 달여 먹는다. 양의학적 효과로 의사가 언급을 하지 않지만 한방이나 민간에서는 훌륭한 요법으로 쓰이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약초와 채소들의 효능을 검색하며 위장, 십이지장, 심혈관 등에 좋다는 것들을 하나둘 챙기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다. 급기야 한의학연구원에서 파일로 제공하는 옛 의학 문헌을 살펴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술을 마시지 않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저녁시간이 더욱 풍부해졌다. 모임에 빠지는 횟수가 늘어났고 꼭 가야 할 자리에선 물끄러미 앉아 있다가 돌아온다. 술자리에서 물이라도 건배를 하자는 권유에 소주잔에 물을 따르는 풍경은 일종의 블랙코미디다. 술을 마시지 않으니 책을 읽는 시간이 늘어났고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동안 몸에 대한 초보적 이해도 향상됐다. 가끔씩 들춰 보는 책의 내용이 가슴 깊이 다가온 건 몸 안에 변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 몸은 하나의 상황, 내가 맞닥뜨리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하거나, 상황을 부정하거나 긍정할 어떤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몸만으로 상황 전체가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몸과 나의 관계는 언제나 내 세계로 규정되며 변화한다.”(헤르베르트 플뤼게, 《아픔에 대하여》 중에서)
몸이 나의 관계를 통해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은 분명하다. 단순히 육체를 치유하는 과정을 넘어 정신적 변화까지 이끌어 낸다. 스스로 세계관의 엄청난 변화나 영적 각성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습관이 달라진 것만으로 긍정적인 요소가 많아졌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제는 소주 첫 잔에서 들려오는 낭랑한 소리가 아득하다. 막걸리 익어 가는 소리를 들으려고 새벽 4시의 고요 속에서 항아리에 귀를 기울이던 시간도 오래된 저편이 되었다. 아직 술을 끊을 때가 아니라는 깊은 갈증과 그동안 마신 술이 인생 총량을 넘었다는 외침이 내 안에서 서로 부딪힐 때, 아들은 소주와 맥주의 아름다운 조화를 떠올리라며 이렇게 말한다. 참으로 공손하게.
“아버지, 오늘은 흰쌀과 현미를 섞은 폭탄밥으로 한 병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글 정덕재(시인,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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