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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2호] 이 베를린이 그 베를린?
이 베를린이
그 베를린?
로와의 책탐
《퍼킹 베를린(Fucking Berlin)》(소니아 로시)
“탄야의 남편은 정말로 그녀가 여기서 청소를 하는 줄 알았나요?”
“내 생각엔 그랬다면 베를린은 여기서 청소부로 일하는 러시아 여자들 때문에
벌써 오래전부터 거울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어야 해.”
(222쪽)
낯선 사람에게서 나와 비슷한 모습을 발견하고 친숙함을 느끼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이에게 짐작도 못한 일면을 발견하고 선득해지는 순간도 있다. 《퍼킹 베를린Fucking Berlin》(소니아 로시)이란 책이 딱 그랬다. 우연히 헌책방에서 내가 2년간 살았던 도시가 제목에 달린 책이라 호기심에 샀다가 정말 ‘쇼킹’한 충격을 받고 말았다. 마치 솔제니친류의 수용소 문학처럼, 인생의 또 다른 극한을 본 듯한.
이 책은 19세 이탈리아 여성 소니아가 독일 베를린대학에 유학 왔다가 생활비 때문에 시작한 후 5년간 이어졌던 성매매 경험일기다. 카페 아르바이트 등의 ‘정상적’인 일로는 생존은 가능하나 생활은 불가능한, 유럽 천 유로 세대가 당면한 경제 현실이 담담히 그려져 있다. 돈이 절실했던 이유는 남자 때문이기도 했다. 불법체류자 신분이던 애인 라디야를 먹여 살리느라 매춘하고, 그의 신분을 보장하느라 결혼하고, 매춘에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그가 어질러 놓은 식탁을 치워야 하는 생활의 반복. 배우지 않으면 영원히 탈출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녀는 같은 반 중국인 친구의 삶을 택하지는 않았다. 중국인 클래스메이트는 기숙사 좁은 방에 틀어박혀 늘상 공부만 하기에 돈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으니. 하지만 소니아는 공부도, 쇼핑도, 연애도 하고 싶어 매춘을 선택했다. 생존 이상의 삶을 원하는 욕구도 선택이라 불러야 한다면.
우리 사회는 유독 성에 관해 색안경이 진하다. 조선시대 유교에서 시작된 관습 때문인지, 여성에게는 더욱 편파적이다. 심지어 강간을 당해도 오직 ‘피해자다움’을 충분히 보였을 경우에만 보호해 주겠다는, 지극히 가부장적 관점이 사회전반에 숨 막히도록 깊게 뿌리내려 있다. 여성조차도 나고 자라고 교육받는 동안 가부장적 색안경을 사회가 하사한 유전자로 물려받게 된다.
단 5년 만에 그녀는 깊고도 오랜 인생을 살아 버렸다. 대학 강의실보다는 침대에서 더 많은 인생을 배웠다. 그녀는 사랑에 빠진 유부남 애인 밀란과의 사이에 아이를 뱄다가 중절수술을 받는다. 갈등과 후회를 남기며. 그래서 남편 라디야의 아기를 배었을 때는 그와 이혼하더라도 낳겠다고 결심한다. 밀란과의 사랑과 밀회는 계속된다.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는 포기하고 사랑하지 않는 남자의 아이는 낳아 키우게 된 셈. 인생이란 것이 흔히 그렇듯, 그녀 인생도 온통 모순투성이다. 혼외연애로 고민하는 소니아에게 나이 든 손님이 이런 조언을 한다. 예전과 달리 아름다운 여인들의 손길을 느끼기 위해서는 돈을 내야 하는 슬픈 나이라며 한탄하면서.
그냥 즐겨요. 애인과 함께하는 시간을 즐기고 남편과 함께하는 시간도, 그리고 가능하면 세 번째 애인도 구해. 당신만 좋다면 다 해 봐. 양심의 가책 느끼지 말고. 언젠가는 당신도 늙을 것이고 그땐 이미 다 늦어 버린 뒤야. (147쪽)
인생 마지막 순간에 과연 나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후회할까? 일회성 인생에서 참고할 수 있는 건 일종의 대리인생인 책, 그리고 인생을 먼저 살아 본 사람들의 이야기 정도다. 손님이나 동료의 목소리로 책 속에 나타난 조언들은 고상하진 않지만 깊이 와닿는다. 양복 갖춰 입고 넥타이를 조여 맨 전문가의 젠체하는 말씀이 아닌, 벌거벗고 욕망에 충실한 인간의 진솔한 목소리이기 때문일까.
이 책이 진지하지만은 않다. 그녀가 5년간 직업상 보고 듣고 겪은 온갖 이야기들도 함께 버무려져 있다.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다른 도시 프라이브루크까지 가서 온종일 바깥에 나가지도 못한 채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손님을 상대하다가 하루 종일 섹스해 댄 그 침대에서 쓰러져 자는 단기 일거리는 그다지 충격적이지도 않을 정도다. 부인에게 담배 사러 다녀온다고 했다며 10분 안에 섹스를 끝내고 돌아서는 남자, 15세부터 탈옥과 매춘을 반복당한 러시아 여성, 18세가 되자마자 엄마라는 이름의 포주에게 끌려와 성매매를 강요받는 성전환자 소년, 항문에 장미를 꽂고 무릎으로 기며 황홀경에 빠져 ‘나는 꽃병이다’를 외치는 남자(이걸 읽은 다음부터는 장미꽃이 좀 달라 보인다), 여자가 입에 똥을 싸 주는 대가로 1천 유로를 선지불한 후 누워서 똥을 받아먹으며 흥분하는 말쑥한 신사, 임신한 창부의 음부 사진이야말로 최고의 흥분제라는 판사 등등. 수용소 문학과는 또 다른 방향으로 극한인 세상.
맙소사, 여기가 베를린이라니. 매일 저녁 8시 정도면 온통 적막하고 한산하던 그 도시라니. 2년 반 동안 나는 대체 거기서 뭘 보고 살았을까? 그래, 어쩌면 나는 인생 마지막 순간에 이런 것을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그때 그곳”을 충분히 누리지 못했음을, 그 장소와 그 순간에 온전히 충실하지 않았음을. 지금 내가 놓치고 있는 건 뭘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무언가를 팔아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산다. 그렇게 사회 시스템은 유지된다. 한 사람이 시장에 내놓고 팔 수 있는 것은 다양하다. 미모, 지력, 시간, 체력, 섹스, 글, 자본, 때로는 몸속 장기까지도. 누가 무엇을 팔든 비난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그저 그 사람에게 가장 적절한 그 무엇을 팔았을 뿐일 터이니.
하지만 이 사회는 유독 성 노동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어쩔 수 없었는지 혹은 좋아서 한 것인지가, 성 노동자를 대할 때는 더더욱 중요하고 예민한 판단기준이 되곤 한다. 그러나 온전히 순수하게 자발적이기만 한 노동이, 자본주의 노동시장에 과연 존재하기는 한단 말인가? ‘먹고사는 일’은 누구에게나 다소 ‘더럽고 치사하지만 참아내는’ 면이 있지 않나. 그게 바로 퇴근 후에 약간의 힘만 남아 있으면 집에 가는 대신에 술집에 들러 술잔을 기울이는 이유이자 핑계 아닌가. 애초에, 온전히 자발적인 일에는 노동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는다. ‘취미’라 부르지.
5년 후, 그녀는 성매매에서 탈출하여 아들과 함께 인턴사원으로 일을 시작하며 책이 끝난다. 성매매에서 탈출하는 건 천 명 중 한 명이라면서. 이 책은 유럽 베스트셀러에 2016년에는 영화까지 만들어졌다 하니 판권만으로도 잘 살고 있지 않을까. 책 말미에서 대학생, 창녀, 아내, 그리고 애인 등 여러 역할을 한꺼번에 살아내던 그녀는 이제 자신에겐 엄마라는 역할까지 더해졌다며 이렇게 일갈한다.
페미니즘의 한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에는 대부분의 여자들이 아이들과 함께 집에 남아 있고, 달라진 것이라고는 이제 돈까지 벌어야 한다는 것이다. (308쪽)
그러게 말이다. 인스턴트 볶음밥 따위가 어떻게 애들 아침밥이냐는 배우자의 힐난을 들어 가며 꾸역꾸역 출근하는 아침에, 다른 도시 출장 후에 ‘집’이라는 제2의 무급직장에 출근해서 더러운 그릇들이 전시된 저녁 식탁을 치우는 밤 11시에, 나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다. ‘사랑이 넘치는 불평등한 가정’의 근간인 잘못된 계약, 결혼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서류라는 게 대개 그렇듯, 중요 항목은 생략되어 있거나 안 보일 만큼 작은 글씨다. 풍선, 꽃다발, 반지, 촛불, 사랑, 영원이라는 말로 포장된 남자의 프러포즈 이벤트에 숨겨진 행간의 뜻, 정직한 프러포즈는 바로 이것이다.
나랑만 섹스하고 내 씨를 받아 아이를 길러 주고, 24시간 가사, 돌봄, 성 서비스를 해 줄 사람을 모집합니다. 숙식(주거 공간과 살림 비용 일부) 제공 (《붉은 선(홍승희)》, 208쪽)
옛날 광고카피가 떠오른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
10년만 좌우한다면 감사하겠다.
글 로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