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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45호] 사람이 어떻게 꿈만 먹고사니 꿈으로 먹고살면 안 되니
사람이 어떻게 꿈만 먹고사니
꿈으로 먹고살면 안 되니
라이터스: 글 파는 가게
광고 없이 동영상을 볼 수 있는 유튜브 프리미엄은 한 달에 7,900원. 자체 제작 콘텐츠 강자 넷플릭스는 한 달에 9,500원. 한국형 콘텐츠 특화 플랫폼 왓챠플레이어는 한 달에 4,900원. 그 어느 때보다 문화 콘텐츠에 쉽게 지갑을 여는 시대가 왔지만, 텍스트는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한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실시한 ‘출판산업 동향(2018년 상반기)’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 가구의 월평균 서적구입비지수는 매년 감소하는 추세를 보인다. 이제는 낯설지도 않은 이야기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지난해 상반기 서적출판업 생산지수는 전년 동기 대비 4.6p 증가했다. 여기에 출판사를 거치지 않고 책을 발행하는 독립서적의 수를 더하면 책을 구입하는 사람은 줄어드는데 책을 만드는 사람은 증가하는 추세다.
라이터스 김민관 대표
수요 없는 물건도 공급해 보렵니다
주인장 취향에 따라 책을 비치하고 다양한 문화 활동을 펼치는 독립서점이 여전히 증가 추세다. 유명한 책보다는 자신의 책방에 걸맞는 특색 있는 독립출판을 선호하는 경향을 띠면서 독특한 출판디자인을 전면에 내세운 1인 출판물도 늘어나고 있다. 자기 생각을 글로, 책으로 쏟아 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늘어나는데 출판 시장은 녹록지 않다. 매년 책을 구입하는 비율은 줄어들고 있으며 대형 출판사의 그럴싸한 마케팅이 녹아든 가벼운 서적은 판매 순위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다.
경제학적인 논리에서 보면 수요 없는 물건을 공급할 이유가 없는데, 이상하게 출판 업계에서는 이 논리가 먹혀들지 않는다. 아무도 사지 않는 책을 만드는 사람들. 글을 쓰고, 책을 만들고 싶지만 이를 통해 수익을 내지 못하는 작가들. 이들은 꿈으로 먹고살 수 있을까. 라이터스는 이러한 고민을 가진 청년들이 모인 독특한 곳이다.
라이터스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다양한 형태의 기업과 청년 단체들이 모여 있는 서울혁신파크에 자리한다. 이 거대한 건물 안 작은 사무공간이 글로 먹고살고 싶은 작가들이 모이는 아지트다.
“라이터스가 정식으로 설립된 건 작년 5월 13일입니다. 서울혁신파크에 공간을 마련하며 어엿한 단체를 설립했죠. 페이스북을 중심으로 요일별로 작가들이 돌아가면서 글을 쓰는 프로젝트가 라이터스의 시작이었어요. 이 글을 엮어서 잡지 《라이터스》도 발행했는데, 잘 안 됐어요. (웃음) 잡지를 만드는 일도, 이를 판매하는 일도 힘들더라고요. 글로 먹고살 수는 없을까 고민하던 중 떠오른 아이디어가 ‘글 파는 가게’였어요.”
글 사실 분 어디 없나요?
정말 하고 싶어 시작했던 잡지 《라이터스》는 제4호를 발행하지 못하고 중단됐다. 고민 끝에 라이터스 김민관 대표가 ‘글 파는 가게’라는 프로젝트를 떠올렸다. 미국 작가 댄 헐리의 ‘60초 프로젝트’를 벤치마킹한 프로젝트였다. 의뢰인이 글을 의뢰하면 30분 이내라는 짧은 시간 안에 글을 써 주는 일로 수익을 내는 방식이다. 한 줄로 배열된 책상 한쪽에 작가들이 줄을 맞춰 앉는다. 이때 작가들은 저마다 자신의 콘셉트를 적은 간단한 안내문을 비치한다. 의뢰인이 계산대에서 1만원을 지급한 후 자신에게 맞는다고 생각하는 작가를 선택하고,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으면 작업이 시작된다. 시와 소설 중 장르를 고르고 자신이 원하는 주제를 말한다. 작가는 때로는 짧고 또 때로는 제법 긴 대화를 나누며 의뢰인이 어떤 글을 원하는지 파악한다. 이 과정이 끝나면 작가는 의뢰인의 성향, 현재 상황, 감정에 따라 글을 지어 나간다. 일반적으로 글을 쓰는 시간은 30분 내외지만 상황에 따라 조금 길어지기도 한다. 글이 완성되는 동안 의뢰인은 개인적인 볼일을 보면 된다. 작가가 작업한 글은 부스 한편에 놓인 프린터를 통해 출력되는데, 엽서 크기인 완성작은 글의 길이에 따라 여러 장이 되기도 한다.
“처음 글 파는 가게를 연 건 2015년쯤이었어요. 생각보다 호황이었죠. 80여 명의 사람이 글을 사 갔고, 한 작가당 여섯 명 내외의 의뢰를 받았어요. 글 파는 가게가 저희에게는 큰 프로젝트이다 보니 아직은 지원 사업을 통해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원받은 사업이 없을 때는 저 혼자 문화 행사를 진행하는 곳을 찾아 글을 팔고요.”
의뢰자가 받는 소설과 시
글로 먹고사는 세상 한번 만들어 봅시다
글 파는 가게를 관통하는 두 가지 중심축은 ‘글로 먹고사는 세상’과 ‘작가를 위한 촉매제’다. 라이터스라는 단체의 입장에서 프로젝트보다는 판매자의 입장을 먼저 고려한 결과다. 이 중 ‘글로 먹고사는 세상’은 김민관 대표의 경험에서 나왔다.
“저는 소설을 쓰던 작가였어요. 《슈퍼맨 로망스》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먹고사는 게 힘들었어요. 먹고, 자고, 입는 것 없이 살 수는 없잖아요. 희망하는 일, 글 쓰는 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가게를 설립하고 싶었죠. 작가로서 가장 힘든 게 글을 팔 통로가 없다는 거였다는 걸 중점에 두고 작가가 독자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재밌는 통로를 만들어 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이와 함께 김민관 대표는 작가들이 글 파는 가게를 통해 창작 활동에 욕심을 내길 바란다. 프로젝트의 특성상 독자인 의뢰인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 이를 통해 작가들이 글 쓰는 행위에 더욱 열정을 느낄 거라고 생각했다.
“반려동물을 주제로 글을 의뢰하시는 분들이 꽤 있어요. 예전에 의뢰인이 키우는 강아지에 대한 글을 판 적이 있어요. 의뢰인의 이야기를 한참 듣고 글을 써서 드렸는데, 그걸 보시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시는 거예요. 강아지를 의인화한 글이었는데, 글을 읽으니 강아지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면서요. 글을 쓰는 일이 이렇게나 감동을 줄 수 있는 일이구나, 생각이 많아졌죠. 글을 쓴다는 게 정말 힘들고, 그걸 판다는 건 더 힘든 일인데, 그래도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는 일로 먹고살 수 있으니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 프로젝트가 다른 작가들에게 때로는 고된 창작의 촉매제 역할을 했으면 좋겠어요.”
라이터스 사무실 전경
차별성을 가진 작가가 되는 법
글 파는 가게는 의뢰인과 소통하는 방식, 글을 쓰는 방식에 큰 제약을 두지 않는다. 온전히 작가에게 글을 맡기고 이를 통해 의뢰인은 보다 다양한 글을 선택한다. 그렇지만 글 파는 가게에 참여하기 위해 작가들이 필수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다.
의뢰인이 만족할 만한 글을 받아볼 수 있도록 라이터스는 작가 교육을 진행한다. 공개 모집된 글을 팔고 싶은 작가들은 워크숍 동안 글을 의뢰받는 법, 제한 시간 안에 글 쓰는 법 등을 배우고, 글쓰기 연습, 심리학 수업 등의 과정을 밟는다. 작가를 선별할 때는 김민관 대표가 직접 인터뷰를 진행하며 의뢰인과 충분히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인지, 글을 파는 데 적합한 사람인지를 파악한다. 인터뷰 중 ‘글을 30분 안에 어떻게 쓸 건지’와 ‘어떤 콘셉트의 글을 쓸지’ 등을 묻기도 한다.
“우리의 마케팅 방법은 글을 빨리 써 주는 거예요. 작가가 빠르게 글을 쓰고 판매하도록 교육에 신경 쓸 수밖에 없죠. 올해 글 파는 가게에서 활동할 작가는 20~24명 정도예요. 대부분이 20~30대인 젊은 작가들이죠. 글로 수익을 내겠다고 모인 사람들이니 이에 대한 교육을 라이터스가 제공하는 건 당연한 일인 것 같아요.”
교육과정에서 작가의 특성과 정체성이 드러나는 콘셉트를 찾아 주는 일도 라이터스의 몫이다. 차별성 없는 글은 쓰기도, 팔기도 어려운 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활동에 참여한 작가의 주제가 겹치더라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작가의 색채에 따라 같은 의뢰에도 다른 글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쉽지는 않지만 참여한 작가와 의뢰인 모두 활동에 큰 의미를 부여해요. 글로 먹고살고 싶어 모인 사람들이니 인간적으로 결이 잘 맞는 부분도 있고요. 의뢰인들도 문화 심리치료를 받는 것 같다고 자주 말해요. 프로젝트로 큰돈을 버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조금씩 글로 먹고사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고 싶어요.”
기술이 발전하며 사회에 필요한 노동인구는 계속해서 줄어든다. 취업할 곳이 없는 청년들은 좋아하는 일보다는 생계를 먼저 걱정해야 한다. 출산율은 놀랄 정도로 줄어들고 노인인구는 날이 갈수록 많아진다. 혼란스러운 사회의 흐름에 넋 놓고 있다가는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기 십상이다. 어찌 보면 글 파는 가게는 작은 실험일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가 하고 싶은 일, 어른들이 절대로 먹고살 수 없다고 말했던 일, 노동의 가치가 낮다고 생각했던 일이 먹고사는 일로 변화할 때가 되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실험 말이다.
글 사진 오시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