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 142호] 천재 시인 백석의 생애와 문학세계
천재 시인 백석의 생애와
문학세계
백석의 생애와 업적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이다. 그는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석동에서 수원 백씨 시박(時璞)과 단양 이씨 봉우(鳳宇)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백시박은 당시로써는 드물게 사진 기술이 있었다.
그는 오산보통학교와 오산고보를 졸업했다. 오산고보 시절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1883~1950)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같은 학교의 선배 시인 김소월(金素月, 본명 김정식, 1902∼1934)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백석은 오산고보를 나오고서 집안 사정으로 진학하지 못하고, 고향에서 책을 읽으며 소일했다. 그러다가 고향 부자 방응모가 운영하는 조선일보사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아오야마(靑山) 학원 전문부 사범과(영문과)에 입학했다. 최우등으로 학업을 마친 백석은 1934년 아오야마학원 졸업과 함께 교원 검정시험에 합격하고 귀국하여 바로 《조선일보》에 입사해 계열 잡지인 《여성》의 편집을 맡았다.
백석은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모와 아들>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그는 1934년에 《조선일보》에 산문 <이설(耳說) 귀ㅅ고리>를 비롯해 번역 산문 <임종 체홉의 6월>, <죠이쓰와 애란(愛蘭) 문학>을 발표했다. 1935년에는 《조선일보》에 단편
<마을의 유화(遺話)> 등을 발표하고, 《조광》에 시 <정주성(定州城)>, <산지>, <주막>, <나와 지렝이>, <비>, <여우 난 곬족(族)>, <흰 밤> 등을 발표했다. 1936년에는 35편의 시를 묶어 100부 한정판으로 시집 《사슴》을 조광인쇄주식회사에서 발간하면서 일약 문단의 총아로 평가받았다.
백석은 《인문평론》에 <팔원>(1939)을, 《문장》에 <두보와 이백같이>(1941) 등을 발표했다. 그리고 어려서 배운 한문을 비롯해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일본어에도 능통하여 1940년에는 토마스 하디의 장편소설 《테스》를, 1942년에는 러시아 작가 바이코프의 작품 《밀림유정》을 번역 출간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에 백석 시인은 북한에 남아서 문필 활동을 계속했다. 1947년에는 《학풍》에 <적막강산>을, 1957년에는 《아동문학》에 <멧돼지> 등 동시를 발표했으며, 1958년에는 시평 <사회주의적 도덕에 대한 단상>을 발표했다. 그리고 1949년에는 숄로호프의 소설 《고요한 돈강》과 《그들은 조국을 위하여 싸웠다》를, 1954년에는 러시아의 농민시인 이사코프스키의 《시선집》을 번역 출간했다. 이 밖에도 백석은 문학잡지에 수많은 시와 수필과 야화 등을 발표했다.
백석은 1959년에 시 <이른 봄> 등 7편을 《조선문학》에 발표했고, 압록강 인근 양강도 삼수로 이주해 농사일을 하면서 청년 문학도들에게 문학을 가르쳤다. 그러다 남로당 계열 인물로 분류되어 숙청되고 말았다.
백석은 신구(新舊) 지식을 섭렵한 천재 문인이었다. 19살에 이미 <그 모(母)와 아들>이란 단편소설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될 만큼 글재주가 뛰어났다. 그는 큰 키와 잘생긴 얼굴, 뛰어난 언변과 유머 감각으로 여성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시인 백석의 작품세계
백석의 첫 시집 《사슴》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을 담은 명시집이다. 한편 《사슴》은 도시문명으로 상징되는 ‘식민지 근대화’에 대한 반격이다. 백석 시인은 일제가 근대화를 운위하며 숨통마저 끊어 버리려 했던 한국의 가치와 전통을 되새기고 그 부활을 꾀하였다. 그리하여 소설가 이효석은 “잃었던 고향을 다시 찾았다”라며 찬탄했고, 시인 박용철은 “모국어의 위대한 힘”을 재삼 느끼게 되었다고 호평하였다.
백석의 대표 시로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여승>을 들 수가 있다.
백석이 만주로 떠나 자야와 헤어지면서 마지막 선물로 남긴 시가 바로 그 유명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 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의 대표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전문
이 시는 백석이 1938년에 발표한 대표적인 서정시로 현실을 초월한 이상, 사랑에 대한 의지, 소망을 노래한 작품으로 당시 연인들의 연가가 되어 인기가 많았다.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냄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山)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 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 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망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백석의 대표 시 <여승(女僧)> 전문
<여승>은 백석의 첫 시집 《사슴》에 수록되어 있는 대표적인 서사시이다. 이 시는 여승의 비극적인 삶을 평안도의 토속적인 언어를 사용해 실감나게 사실적으로 잘 표현한 명시이다. ‘가지취’, ‘금점판’, ‘섶벌’, ‘머리오리’ 등과 같은 단어는 평안도에서만 사용하는 토속적인 방언으로 향토색이 짙어 정감 간다.
백석의 문학 세계는 순수 모국어를 통한 토속적인 북방정서와 민중의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민족의 영혼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모국어를 수호 보존하고 모국어로 민족적 삶을 담아내는 것을 백석 자신은 시인의 사명으로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외국어 사용에 부정적이었다. 특히 백석 시인은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를 많이 발표했는데, 지방적·민속적·향토적인 것에 집착하며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데 성공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사람들은 백석 시인을 가리켜 한국 현대문학 한 세기를 대표하는 문인으로, 민중의 가슴속에 가장 깊숙이 자리한 시인으로 꼽힌다.
백석의 시는 윤동주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윤동주는 백석의 시집 《사슴》(1936)을 필사하여 보관하고, 여기저기 메모까지 해 가며 몰두했다. 윤동주는 대표시 <별 헤는 밤>을 창작하면서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를 참조했다.
백석의 문학작품들은 국토 분단 이후 4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념의 덫에 걸려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1987년에 해금이 되자 창작과 비평사에서 《백석 시 전집》(1987)이 간행된 이후 《가즈랑집 할머니》(1988), 《흰 바람벽이 있어》(1989), 《멧새 소리》(1991)가 시 선집으로 간행된 바 있다. 그 후 백석은 최고로 사랑 받는 시인으로 떠올라 한국 문단에서 샛별 같은 존재가 되었다. 백석의 첫 시집 《사슴》은 가격이 폭등해 일반인은 소유할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되었다.
백석이 1936년에 상재한 첫 시집 《사슴》은 100부밖에 찍지 않아 전문가들 사이에서 희귀본으로 꼽힌다. 1936년 1월 출간 당시 시집의 가격은 2원이었는데, 지난 2014년 11월 19일 진행된 경매에서 5,500만 원으로 입찰이 시작돼 7,000만 원에 낙찰되며 79년 만에 무려 3,500배나 폭등했다.
남쪽에는 정지용(鄭芝溶, 1902~1950)이 있고 북쪽에는 백석(白石) 백기행(白夔行, 1912~1996)이 있다고 할 정도로 정지용과 백석은 한국 문학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특히 백석은 우리 한민족의 보편적인 정서에 어울리는 민속과 토속어를 잘 활용하여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걸출한 문학 작품을 많이 창작하고 외국어도 능통하여 토마스 하디(Thomas Hardy, 1840~1928)의 대표 소설인 《테스》를 번역하여 훌륭한 국제적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천재 시인 백석과
수필가 김영한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
1935년 6월, 경성의 조선일보사에 근무하던 24살 백석은 통영 출신 이화여고 학생 란(蘭)을 짝사랑하였다. 북방 출신이었던 백석에게 해풍을 머금고 자란 란은 무척 이국적인 소녀로 보였다. 시인의 첫사랑이었다.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던지 백석은 그녀가 살았던 통영을 세 번이나 직접 방문했고, 그때마다 아름다운 시를 지어 <통영>이란 제목의 시가 세 편이나 있다. 란을 보고 한눈에 반했던 백석은 불행히도 그녀에게 자신의 뜨거운 속내를 고백하지도 못했다. 사실 란은 친구의 애인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처지가 서러웠던 걸까. 1936년에 25세였던 백석은 조선일보사를 사직하고 함경남도 함흥의 영생고보 영어 선생으로 부임했다.
통영 출신의 이화여고생 란에 대한 짝사랑의 기억이 가시기도 전인 1936년 가을에 백석은 함흥에서 조선권번 출신의 기생 김영한을 선생들의 회식자리에서 만났다. 백석은 첫눈에 반하여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입니다. 죽기 전에 우리에게는 영원한 이별은 없습니다” 하며 그녀에게 이백의 시를 인용해 자야(子夜)라는 아명을 지어 주었다. 궁중무용을 포함한 가무에 능했던 당시 21세의 미인 자야를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진 백석은 함흥에서 그녀와 3년이나 동거하게 되었다. 그 후 서울로 올라와 청진동 진향의 집에 머무르면서 시를 썼다. 그런데 자야와의 동거 생활은 계속 불안하기만 했다. 동거 기간 중 부모의 강권으로 두 번이나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때마다 백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인을 버리고, 다시 자야의 품에 안겼다.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너무도 강해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정리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마침내 백석은 1939년 자야에게 만주로 도망가자고 제안했다. 그렇지만 백석의 장래를 걱정했던 자야는 그의 의견을 따를 수 없었다. 그래서 28세가 된 백석은 그해 늦가을, 싸늘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만주로 가는 기차에 홀로 몸을 실었다. 백석이 자야와 헤어지면서 마지막 선물로 남긴 시가 바로 그 유명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다.
한국전쟁으로 국토가 남북한으로 분단되자 시인 백석과 기생 자야는 생이별해 백석은 고향인 정주에서 자야는 서울에서 서로 그리워하며 한(恨) 많은 인생을 살아야 했다.
기생 김영한은 백석과 헤어진 후 서울 성북동에 대원각이라는 고급 요정을 차렸다. 제3공화국 시절 당시 대원각은 기생관광, 요정정치의 본산으로 술, 여자, 섹스 등 세속적 욕망의 대명사였다. 김영한은 한국 화류계의 대모로 불리며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다. 1980년대 후반에 법정스님의 저서인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은 김영한은 법정스님과 만나 10여 년 간 교류하다가 불심이 깊어져 인생 말년인 1990년대 후반에 법정스님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당시 시가 700억 원 상당의 가치를 지닌 최고급 요정인 대원각을 시주하며 무소유를 실천했다. 법정스님은 그녀에게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과 함께 108범주 한 벌을 목에 걸어 주었다. 그때 기자들이 아깝지 않느냐고 질문하자 김영한은 “그이(백석)의 시 한 줄 값도 안 된다”고 말했다. 그녀는 백석을 그리워하며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백석에 대한 회고록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은 이름》(1989), 《내 사랑 백석》(1995) 등 두 권의 단행본을 발간했다. 1997년에는 창작과 비평사에 사재 2억을 기증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스님 김영한은 2년 뒤인 1999년 84세의 나이로 염주를 목에 걸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2018년 10월 새움출판사에서 백석 작품 선집인 《흰 바람벽이 있어》를 발간해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책에는 백석 시집 《사슴》(1936)에 실린 시 전부와 신문 잡지 등에 실린 백석의 작품들을 해방 이전과 해방 이후로 나누어 발표된 순서대로 선별하여 정리해 놓았다. 그리고 백석이 남긴 수필과 서간문, 북에서 발표했던 번역시들도 일부 발굴하여 수록해 놓아 백석 문학을 전반적으로 고찰해 볼 수 있다.
<참고문헌>
1. <백석(白石)>, 네이버 지식백과, 2015.12.16.
2. 신상구, <천재 민족시인 백석 이야기>, 《한비문학》 Vol.121(2016년 5.6월호), 도서출판 한비, 2016.6. pp.165~171.
3. <길상사에 다녀오다.>, 인산 안태승, 《행복이 손바닥 위에 있어도》(안태승 제3수필집), 문경출판사, 2018.11.10. pp.39~62.
4. 김응교, <릴케와 윤동주>, 국립중앙도서관, 《근대문학》Vol.07, 2018.11. p.35.
5. 김택근, <서울 성북동 길상사 애틋한 연정 승화된 자리, 도량은 맑고 향기로웠다>, 법보신문, 2013.3.5일자.
6. 낭산 이기순, <토속어와 고향의식의 천재시인 백석(白石)>, 문학기행, 2013.10.1.
7. 송지희, <김영한(길상화) 보살, 향락의 상징 ‘대원각’을 청정도량으로…무주상보시 전형>, 법보신문, 2013.10.16일자.
8. 최동호, <(최동호 새벽을 열며) 백석 초간본 시집 ‘사슴의 경매’>, 서울신문, 2014.12.1일자. 31면.
9. 신상구, <대전을 중심으로 고서 나눔문화 확산>, 충청투데이, 2014.12.10일자. 20면.
10. 백승종, <시인 백석 - 식민지 근대화는 제국주의 가면…전통 살아있는 근대를 소망했다>, 한국일보, 2015.12.14일자. 25면.
11. 송유미, <백석을 죽도록 사랑한 여인 김영한이 시주해 생긴 성북동 길상사>, 뉴스 핌, 2018.9.21일자.
글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대산 신상구(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문학평론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