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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2호] 비밀의 정원은 새로운 봄날을 기다린다
비밀의 정원은
새로운 봄날을 기다린다
테미오래
(옛 충남도청 관사촌)
봄이면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만개한 벚꽃이 가득한 테미공원. 그 아래 조용한 주택가 골목에 ‘비밀의 정원’이라 불리는 공간이 있다. 옛 충남도청 관사촌으로 과거 충남지사를 비롯해 부지사, 실국장 등이 사용하던 관사 10동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이다. 오랜 시간 시민이 쉬이 다가갈 수 없는 공간이었지만, 지난 2016년 대전광역시는 관사촌을 매입해 시민의 문화예술 향유공간으로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오는 4월 공식 개관을 목표로 두고 있다. 비밀스럽던 관사촌은 걸어 잠근 빗장을 풀고 ‘테미오래’라는 이름으로 시민이 발걸음하길 기다리고 있다.
한 번도
시민의 공간이었던 적은 없다
보문산 끝자락에 위치한 보문로205번길. 동네는 한없이 조용하다. 길을 거니는 사람도 거의 없을 정도로 평화롭게 단독주택이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있는 그 사이에 옛 충남도청 관사촌이 함께 어울려 있다. 플라타너스 나무가 길을 따라 길게 늘어섰고, 그 길 양옆으로 주택과 관사가 자리했다. 플라타너스 길 시작점에는 충남도지사가 머물던 도지사 공관이 이 길 정면을 바라본다.
옛 충남도청 관사촌은 1932년 공주에 있던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도지사 공관과 더불어 6동의 관사를 짓고 나머지 4동은 1970년 후반에 새롭게 생겨났다. 여러 동의 관사건물이 한곳에 밀집되어 있는 경우는 소제동 철도 관사촌를 제외하고 전국에서 이곳 관사촌이 유일하다.
서양식과 일본식이 혼재되어 있는 양옥 형태의 도지사 공관은 대전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돼 있고, 1·2·5·6호 관사는 국가등록문화재인 근대건축물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관료들이 사용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2012년까지 충남지사와 도청 간부들이 관사촌에 머물렀지만, 충남도청이 충남 홍성 내포신도시로 조성·이전하면서 빈 공간으로 남았다. 관사촌은 80년간 자기 역할을 다 해내고는 한동안 사람 없이 머물러 있었다.
관사촌은 처음 생겼을 때부터 시민에게 개방했던 적은 없었다. 처음에는 일본 관료들이 사용했고, 해방 이후에 우리나라의 것이 되었지만, 그마저도 고위급 간부들이 사용하며 시민이 쉬이 방문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지난 2014년 관사촌 소유기관인 충청남도와 대전시가 ‘5년 무상임대-무상대부 계약’을 맺고, 2015년 처음 개방 행사를 진행했다. 시민들은 처음으로 우리와 함께 세월을 보내던 관사촌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지만, 그 기간이 지속되진 않았다.
2층 다다미방에 작은 출입문을 열고 나오면 정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테라스가 있다
관사촌,
보문로205번길의 이웃이 되다
충남도청이 홍성으로 이전하면서 관사촌 활용에 관한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지난 2014년 12월 문화예술촌 조성 기본계획 수립을 시작으로, 대전광역시는 관사촌 매입과 더불어 예술촌 조성에 박차를 가했다. 지난해 시민공모를 통해 ‘테미오래’라는 이름이 선정되면서 시민의 공간으로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 테미오래는 ‘테미로 오라’는 뜻과 ‘테미와 관사촌의 오랜 역사’를 의미하는 중의적 표현을 지니고 있다. 또한 ‘오래’는 동네 몇 집이 한 이웃이 되어 사는 구역 안을 이르는 뜻을 담고 있어, 공동체적 의미를 더한다.
현재 테미오래는 수탁기관으로 민간단체인 (사)대전마을기업연합회, 여행문화학교산책, 소제창작촌, 마을과복지연구소 총 네 개 단체가 컨소시엄 형태로 운영에 참여했다. 주관단체는 (사)대전마을기업연합회다. 이들은 3년간 테미오래를 도서관, 시민·작가 공방, 레지던스 및 청년 공유공간 등으로 조성·운영할 계획이다.
관사촌 총 10동의 공간은 저마다 역할을 가진다. 문화재 공간 5동 중 도지사 공관과 1호 관사는 테미오래 근현대전시관으로 쓰인다. 도지사 공관은 상설전시관(테미오래의 역사 전시), 1호 관사는 기획전시관(연극·문학)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2호 관사는 시민 요구에 따라 작은만화도서관으로 운영한다. 공간 자체가 작아 안정감을 느낄 수 있어 독서하기에 더없이 좋은 공간이다. 맞은편 5호관은 트래블 라운지 공간으로 테미오래 사진관과 여행 관련 이야기로 꾸며진다. 6호관은 시민과 레지던시 예술가가 이곳에서 전시할 수 있는 시민갤러리와 대전여성사기록관으로도 활용할 예정이다. 7·8·9·10호 관사는 테미오래 창작촌으로 활용한다. 7호관에는 연극·문학 레지던시를, 8호관은 주민 창작공방과 공유주방, 9호관에는 유튜버(Youtuber) 코워킹 공간을, 10호관은 해외작가 레지던시 공간으로 구성했다. 각 공간 사이에 쪽문을 설치해 시민이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
도지사 공관 안 정원에는 노송이 여럿 심어져 있다. 노송은 시간 흐름에 따라 방향을 달리했다. 운치 있게 휘어진 형태가 그를 대변한다
보이지 않는 관계의
문턱을 허무는 것
“골목 초입에 붙어 있는 현판처럼 테미오래는 문화 힐링 공간이에요. 시민의 공간이기 때문에 우선되어야 할 것은 시민들과의 원활한 소통,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 내는 것이죠.”
테미오래 유현민 부촌장은 주민들과의 소통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말한다. 공간 속에 이야기가 녹아들고 따뜻함이 배어 있어야 공간으로써의 제 역할을 똑똑히 해낼 수 있다. 테미오래 이전의 관사촌은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공간으로 쓰였다. 그 주변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관사촌은 높은 담을 쌓고 항상 고립되길 자처했다. 유현민 부촌장은 소통을 강조하며 중요한 이야기 하나를 꺼냈다.
“아시다시피 이곳은 오랫동안 폐쇄되어 있던 공간이에요. 얼마 전 마을 통장님과 주민분들이 왔었어요. 그때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들었죠. 이곳 주민분들은 30년 넘게 쭉 사신 분이 많아요. 그런데 그분들이 예전에는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다니지 못했다고 해요. 아무래도 불편했던 거죠. 담도 높고 경비도 있으니, 죄진 것도 없는데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요. 이곳이 시민의 공간으로 거듭나면서 편안한 공간이 되길 바라요.”
소수의 공간에서 시민 전체의 공간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단순히 역사적 의미를 지닌 공간에서, 나아가 소통의 공간, 치유의 공간으로 거듭나길 기대하고 있다. 유현민 부촌장은 실제로 높은 담장을 무너트리는 건 어렵겠지만, 보이지 않는 담장, 관계의 문턱을 낮추는 것은 가능하다 말한다. 과거 오랜 시간 소제창작촌에서 활동하며 주민들과의 소통을 통해 터득한 유현민 부촌장 나름의 노하우다. 소통과 배려, 기다림을 통해 그 경계를 허무는 것 말이다.
“무엇보다 이곳은 시간의 때가 묻은 공간이잖아요. 각자 살아온 시간이 다른 만큼 시간의 결 또한 다르죠. 그 결을 무시하고 우리의 결대로, 시대에 맞춰 억지로 끌고 가는 것은 지양해야 해요. 이곳이 가진 시간의 결을 알고, 가지고 가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나가고 싶어요.”
4월 정식 개관을 목표로 두고 있는 테미오래는 현재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골목 곳곳에는 공사 관계자들이 바삐 움직이고 공사 소리가 동네에 울려 퍼진다. 여름의 기억을 간직한 푸른 청록 빛의 잎사귀는 사라지고, 가지 또한 다 잘려 나간 플라타너스가 길가에 촘촘히 서 있다. 그 사이로 찬바람이 스친다. 이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몸뚱이만 남아 보잘 것 없는 플라타너스가 다시 가지를 뻗고, 싹을 틔우며 푸른 거리를 만든다. 한없이 한적하고 조용하기 만한 동네는 벚꽃 흩날리는 봄이 오기를, 전에 없던 활기와 소란을 기다리고 있다.
글 사진 이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