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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41호] 비행장과 현충원, 그리고 최고의 주택 단지
비행장과 현충원,
그리고
최고의 주택 단지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1.
‘갑동’이라는 지명을 지금껏 남긴 마을 자리엔 국립대전현충원이 들어섰다. 현충원 북쪽, 갑동 위쪽으로는 ‘맷돌’이라는 지명을 가진 자연마을이 있었다. 풍수상 명당이다. 매화꽃이 떨어진 자리, 매화낙지형이다. 국립현충원을 아무 곳에나 들이지는 않았을 터다.
옛날 이곳이 갑소(甲所)여서 갑골, 갑동으로 마을 이름이 변했다는데, 자세한 설명은 없다.
2014년에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발행한 《한국지리지》 ‘대전’(299p)편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유성의 갑동(甲洞)은 고려조에 갑소(甲所)가 있어 뒤에 갑동이라 불렀는데, 현재 갑옷을 입은 사람 즉 군인들이 묻히는 장소가 되었으니 예언적 지명이다.”
같은 책과 다른 기록에도 ‘갑소’는 옛날 기관이라 해설한다. 대전시립박물관 지명 자료에는 ‘옛날 이 지역이 갑소였으므로’라고 설명한다. 지명이 아닌 기관을 지칭하듯 말이다. 마치 이곳이 ‘역원이었으므로’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고려조에 기관으로 따지면, 역사 시간에 배운 향, 소, 부곡의 바로 그 소가 맞다. 복잡한 문제는 빼고 담백한 내용만 뽑아 보면 소의 주민은 광산물이나 해산물, 먹·자기·종이 등 수공예품을 국가에 공급하는 역을 담당했다. 갑소도 분명 저것 혹은 유사한 종류의 무엇을 국가에 공급했던 지역이었을 것 같은데, 그것이 갑옷이었는지, 아니면 해당 마을에 자연 지명으로 남아 있는 사기점골에서 생산한 자기였는지는 모를 일이다. 서울에는 갓을 만들던 갓전이 갓동네, 후에 갓동, 갑동으로 변한 사례도 있으니 정말 모를 일이다.
옛날에는 마을이 없었던 곳에 지금은 집이 많이 들어섰다
2.
유성구 갑동에 들어선 대전국립현충원은 1979년 착공해 1985년 완공한 시설이다. ‘소(所)’라는 관리 단위가 존재했던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갑동이라는 마을이 있던 곳은 바로 이 현충원 자리다.
지금 갑동 마을에 사람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곳은 안진배(혹은 안진바위)라고 부르는 지역이다. 사료를 보면 이곳 마을 앞에 ‘앉은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확인할 길 없는 이 바위는 “조선 태종이 신도안에 도읍을 정할 즈음에 유성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이곳을 지나며 앉았던 바위”라고 한다. 대전지명지《大田地名誌, 大田直轄市史編纂委員會, 1994》에 나오는 이야기다. 신도안에 도읍을 정하려 했다면, 태종이 아니라 태조가 아닐까 싶다. 여하튼 왕이 앉았던 그 바위가 아예 인근 지명으로 굳어진 모양이다. 안진배에 마을이 본격적으로 들어선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최소한 고려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갑동 본마을에서 삽재를 넘어가는 태조의 행렬을 보아 이 이야기가 전해 오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마을이 막 들어섰을 때 커다란 바위를 보고 신도안과 태조, 유성온천을 엮어 마을에 살던 이야기꾼이 만들어 낸 얘기일 수도 있다. 계룡산 지역 주변으로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도읍을 정하는 과정에서 있었을 법한 이야기가 곳곳에 산재한다. 앉은 바위 이야기도 그중 하나다. 도읍으로 결국 선정되지 못한 것에 대한 이곳 주민의 안타까움과 아쉬움, 자부심 등이 뒤엉킨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마을 서쪽으로는 갑하산이 우뚝 솟았다. 안진배에서 삽재 쪽으로 눈을 올리면 바로 보이는 산이다. 산꾼들에게는 제법 잘 알려진 산이다. 봄에 갑하산에 올라 계룡산 쪽을 바라보면 녹색 융단이 펼쳐진 비경을 마주할 수 있다.
갑동은 또다른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다양한 카페와 갤러리, 식당이 곳곳에 자리를 잡았고 한창 공사 중이다
3.
“현충원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그곳에 갑동 1, 3구가 있었고 여기 안진배는 갑동 2구였지요. 지금은 그냥 다 갑동이고요.”
마을 회관이 북적인다. 평소에 사람이 거의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였지만 이날은 예외였다. 매주 수요일마다 마을 노인회 회원이 모여 점심을 함께 한다. 이날은 특히 송년회를 겸해 다른 곳으로 가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11시 30분에 출발하기로 했지만 몇몇 주민이 일찌감치 마을 회관에 나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이 자리에서 유병열 통장을 만날 수 있었다.
“지금은 집이 많이 들어섰지만, 옛날에는 이곳에 마을이 없었어요. 현충원이 들어선 갑동 본마을에나 마을이 있었지요. 여기는 대신 일제 강점기에 비행기 활주로가 있었다고 해요. 마을 가운데 길이 활주로 자리고, 주변에 참나무와 소나무가 많아서 비행기를 그 아래 숨겨 두었다고 하더라고요.”
지금도 마을을 동서로 지나는 마을 길이 무척 길다. 일제 강점기 비행기가 뜨고 내리기에는 아무 무리가 없었을 듯하다.
“광복 이후에 한국전쟁이 일어났잖아요. 그때 피난민이 내려와서 처음 안진배에 자리를 잡았다고 해요. 예닐곱 집 정도가 처음 들어선 것 같은데…. 물론 그 전에도 한두 집은 있었을지 모르지요. 이곳에 새로 터를 잡은 사람들은 화전민마냥 농사를 지었다고 해요. 본인이 일군 땅을 네모반듯하게 표시해 두었지요. 이후에 정부에 세를 내고 살다가 불하를 받았는데, 보통 2~3천 평씩 가지고 있었어요. 1세대들이 가지고 있던 땅은 거의 매매가 이루어졌어요.”
지금은 200세대 가까이 사는 곳으로 변한 마을에 처음부터 이 동네에 터를 잡고 산 사람들은 이제 여남은 집 정도 남았다. 유 통장은 갑자기 외부에서 들어온 세대가 늘면서 마을을 운영하기 위해 ‘운영위원회’를 만들었다. 위원 8명 중 5명이 비교적 최근에 새로 들어온 주민으로 다양한 계층과 조건이 섞이도록 고려했다.
마을 구판장은 마을 역사와 함께 했다
4.
갑동 마을 인근 안진배에 피난민이 자리를 잡고, 갑동 본마을에 현충원이 들어선 것만큼이나 지금 갑동은 또 다른 변화를 맞이 하고 있다. 한때 대전시에서는 서쪽으로 공주 경계에 인접해 들어선 마을로, 구석진 곳이었을 뿐이었는데, 지금은 최고의 전원 생활지로 각광을 받는다.
산 밑을 떠나 평지에 번잡한 도시를 만들어 두었다가, 다시 산 밑으로 회귀한다. 다양한 카페와 갤러리, 식당이 곳곳에 자리를 잡았고 한창 공사 중이다.
“옛날에는 여기 장사가 잘 되었지. 골프장 캐디가 많이 살았어. 저 큰 길 건너가 골프장이잖아. 거기서 일하는 캐디 아가씨들이 이 동네에 살았으니까. 집은 많지 않아도 집집마다 사람은 꽉 차서 북적북적거렸지. 그러니까 당연히 장사도 잘 되었고.”
마을회관 앞에 있는 마을 구판장에서 이영분 씨를 만났다.
마을회관 앞 광장 한켠에 조립식 건물로 조그맣게 지은 마을 구판장도 마을 역사와 함께 했다. 마을 주민에게 우선적으로 운영권을 부여하는 마을 가게다. 장사가 잘 되던 시절에는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구색을 갖추었고 간단한 막걸리 안주와 술도 한 잔 마실 수 있는 공간이었다. 지금은 모든 것을 최소한으로 구비했다.
“쓰레기봉투 보면 아이스크림 봉지도 섞여 나오곤 하던데, 먹기는 먹는 것 같은데 밖에서 다 사가지고 오는 가벼. 구판장이야 급할 때 소주 한 병 사가는 정도지. 장사가 잘 안 돼.”
마을에 사람이 다시 늘기 시작했지만 장사는 예전 같지 않다.
평일 한낮 마을 골목은 한없이 고요했다. 산 밑 마을이지만 마을 남쪽 너머로 해가 넘어가면서 보내는 햇살이 넉넉하다. 일찍 산 뒤로 모습을 감춰야 하는 아쉬움이 가득 묻어 포근한 따스함이 더하다.
건축가의 정성이 한껏 느껴지는 건축물부터,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었을 성싶은 오랜 건축물과 더는 사람이 살지 않아 빈 채로 허물어지는 집까지 다양한 요소가 지금 갑동을 구성한다.
시대의 변화와 흐름을 마을 하나가 온전히 받아 내고 있는 듯하다.
글 이용원 사진 이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