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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44호] 어느덧, 1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어느덧,
1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유성5일장
초등학교 때 집 근처 시장에 엄마 손을 잡고 가는 날이 많았다. 대형마트가 생기고 난 이후에도 엄마는 시장을 자주 찾았다. 불편하게 무슨 시장까지 가냐는 말에도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엄마와 시장에 가는 날이면, 꼭 핫도그, 떡볶이와 같은 간식을 사 먹었다. 시장에서 먹는 음식은 유난히 맛있게 느껴졌다. 가끔은 심부름으로 혼자 시장에 나서기도 했다. “엄마는 어디 가고 혼자 왔어”라고 웃으며 반갑게 맞아 주던 가게 아주머니는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골라, 골라! 없는 게 없어요
지난 14일, 버스를 타고 유성터미널로 향했다. 목적지는 유성5일장이 열리는 장대동 일원이다. 다행히 하늘이 맑은 날이었다. 바람이 조금 불었지만, 다가오는 봄이 느껴졌다.
유성시장은 5일장이다. 1916년부터 100년 넘게 이어 온 시장이다. 매달 숫자 4와 9가 들어가는 날일 유성5일장이 선다. 도심 속 전통장인 이곳은 전국에서 두 번째로 큰 5일장이다. 유성5일장이 규모만 큰 것은 아니다. 1985년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 전국에서 처음으로 을미의병이 유성시장에서 일어났다. 유성의병사적비에는 “이곳 장대동은 유성을 비롯한 대전일대의 사민(士民)들이 을미사변으로 시해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전국에서 가장 먼저 병을 일으킨 역사적 현장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유성시장에서는 1919년 3월 16일과 31일 두 차례에 걸쳐 3·1만세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당시 일제 헌병과 수비대 보병들의 무력적 탄압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많은 인사가 체포되었다. 충청권 일대의 사람이 모였던 유성시장은 하나의 광장 역할을 했다. 100년이라는 가늠하기 어려운 시간만큼 상징성이 큰 장소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많은 것이 함께 변했지만 사람들은 장날이 되면 어김없이 이곳을 찾는다.
평일 낮임에도 유성5일장은 사람이 북적였다. “골라, 골라.”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정신없이 오가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정겨운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온다. “이거 좀 깎아 줘.” “아휴, 뭘 이걸 깎고 그래!” 가격 흥정을 하는 손님도 보인다. 이제는 쉬이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유성5일장은 각종 채소부터 해산물, 주전부리, 소모품까지 그야말로 없는 게 없다. 이날 가장 인기 있는 상품은 프리지어였다. 골목을 지날 때마다 꼭 한두 명씩은 프리지어를 손에 들고 있었다. 아직 피지 않은 꽃망울을 보며 다시금 봄을 느꼈다.
실로 오랜만에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걸었다. 어깨를 부딪칠 때면 별일 아니라는 듯이 눈인사를 나눴다. 자연스럽게 걸음이 느려지면서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물건을 사는 아주머니에게 무얼 산 것인지 묻는다.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열 마디 대답이 돌아온다.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가 허물어진다. 어쩌면 이곳은 처음부터 타인에 대한 경계라는 것이 없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유성5일장 곳곳에는 재개발 반대 현수막이 걸려 있다
유성5일장 이전은 가능할까
유성구는 지난 2007년 ‘도시재정비촉진을 위한 특별법’에 따라 장대동, 봉명동, 구암동 일대를 ‘유성시장 도시재정비촉진지구’로 선정했다. 해당 사업은 기존 도심에서 토지소유주가 조합을 결성해 자체 개발하는 방식이다. 조합 설립부터 주민 간의 갈등이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초기부터 사업 진행에 차질이 생겼다. 결국 지난 2016년 장대A구역과 봉명D·E구역이 존치관리계획으로 변경되면서 사실상 재정비 구역이 해제되었고, 올해 1월 장대C구역 역시 재정비 구역이 해제되었다.
현재 재개발이 가능한 곳은 도시환경정비사업 지구로 지정된 장대B구역이 유일하다. 장대B구역은 유성5일장이 열리는 자리이다.
장대B구역 재개발 사업은 주택재개발을 통한 주택 조성사업이다. 2020년까지 유성구 장대동 14-5번지 일원 97,213㎡에 지하 4층~지상 49층 규모의 아파트 3,072세대와 오피스텔 216실, 공원과 상업지를 조성하는 것이 사업계획이다.
“현재 ‘장대B구역 재개발 조합설립 추진위원회’는 장을 이전하겠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상 여기에 고급 아파트가 들어오고 나면 여기서 장을 할 수 있을까요? 민원이 당연히 생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장이 사라진다고 봐야죠. 도시계획에 따라서 만들어지는 공원 자리에 5일장을 이전해 주겠다는 말도 있는데 법적으로 공원에서는 상행위를 할 수가 없어요.”
‘장대B구역 재개발 해제주민대책위원회’ 양충규 총무는 부흥생활마트를 15년 넘게 운영했다. 부모님 때부터 하던 장사를 이어 받았으니, 족히 40년은 넘었다. 양충규 총무는 마트 앞에서 유성5일장 재개발 관련 반대 서명을 받고 있다. 시장 상인들은 확성기를 들고 직접 서명을 받기 위해 나섰다. “유성장을 살리자”는 호소에 오가는 시민들이 기꺼이 펜을 든다.
지난 2월 장대B구역 재개발 조합이 창립했다. 조합을 창립하면서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사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후 조합설립인가를 신청했지만, 유성구청은 면적요건 미달을 사유로 신청을 반려했다. 조합설립요건은 다수요건 75%와 면적요건 50%가 충족되어야 한다. 장대B구역은 국공유지가 35%를 차지한다. 국공유지 관리처의 입장이 재개발의 쟁점이다.
“어제 대전시가 시 소유지 토지 사용 공문을 보냈다고 해서 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왔어요. 지금 여기가 100년 된 장이에요. 이런 전통시장을 없애면 안 되죠. 여기 오는 시민들도 다들 여기 무슨 아파트냐고 그렇게 이야기들 하세요.”
유성5일장 곳곳에는 재개발 반대 현수막이 걸려 있다. 몇몇 상가는 반대 피켓을 붙여 두기도 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장대B구역 조합 창립총회 개최 축하 현수막도 곳곳에 걸렸다. 자본은 서로를 등 돌리게 만들었다.
그곳에 사람이 있다
“절대 안 돼요. 절대로 안 돼. 왜냐. 먹고 사는 것도 먹고 사는 거지만, 전통적인 걸 살릴라면 이걸 없애면 안 돼. 진짜요. 10년만 돼도 강산이 변하는데 100년이 되면 어떻겠어. 여기 전국에서 사람이 와요. 우리나라 지금 아파트 남아돌아. 내가 여기서 35년 동안 쌀장사부터 악세사리까지 별거별거 다 했어요.”
가을네 꽃집을 운영하는 이경화 씨는 대구 사람이다. 대전으로 시집와 유성5일장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벌써 35년째, 이제는 대전은 고향이나 다름없다. “예쁘게 사진 찍어 주고 다음에 또 와. 커피라도 한 잔 줄게.” 아주 잠깐 대화 나눈 것뿐인데 금세 다정한 대화가 오갔다.
“못 없애지. 못 없애. 옛날에는 여기가 다 판자촌이었어. 그러다가 저쪽 가생이에 집 짓고, 여기도 짓고 한 거여. 이 골목에서만 58년 장사했어. 쌀장사만 51년하고, 그전에는 고추 장사했지. 유성시장에서 우리가 제일 오래됐지. 여기 마을 세운 것도 우리가 다 동네에서 돈 모아 가지고 한 거야. 그런데 이걸 없앤다면 말이 안 되잖어. 없는 걸 잘되라고 만들어도 모자랄 판국에.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니께. 이런 얘기 좀 많이 해 줘.”
유성시장에서 덕성미곡상회를 운영하는 오희득 씨는 남편 성정모 씨를 만나 결혼한 후 쭉 이곳에서 장사하며 살아 왔다. 지나온 시간을 거칠어진 손이 대신 이야기해 준다.
“장날만 장사하지. 준비가 이틀 걸려. 유성장 살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에이 여기 안 없어질 거야. 추억이 많지. 재개발 안 되는 게 더 좋지. 아들이랑 남편이랑 같이하고 있어. 아이고. 우리 딸 같애. 이거 챙겨 줄게 가져가서 먹어. 따뜻한 거로 골라 줄게.”
명자네 전집을 운영하는 서명자 씨는 괜찮다고 손사래를 쳐도 전을 한가득 챙겨 준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딸 같아서.’
저녁 시간이 다가올수록 유성5일장에는 사람이 붐볐다. 고소한 냄새와 시끌벅적한 이야기 소리를 뒤로하고 유성5일장을 빠져나왔다.
글 사진 이지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