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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40호] 연결되거나, 단절되거나
연결되거나,
단절되거나
정덕재의 일상르포
지난 11월 말, 한 대형 통신사의 통신망 화재사고는 수많은 혼란과 함께 여러 사람을 공황상태로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자연스러웠던 것이 불편해졌고 소통이 불가능했고 급기야 커다란 피해로 이어졌다. 인터넷강국과 IT코리아를 외치던 목소리가 한순간에 무색해졌다.
뉴스를 진행하는 한 앵커는 이렇게 논평했다. “작은 불씨 하나에서 비롯된 ‘디지털 원시시대’, 인공지능의 시대를 살고 있는 도시인의 삶은 한순간 암흑의 시대로 회귀했습니다.” 휴대폰이 불통되고, 문자메시지는 도착하지 않고, 식당에서 카드결제가 되지 않고, 병원의 전산망에 문제가 생기고, 방범시스템에 구멍이 뚫리고, 112 출동에 영향을 미치고. 그날의 화재사고가 가져온 파장은 말 그대로 디지털 원시시대의 한 단면을 구현했다. 통신망 사고를 지켜보면서 디지털 네트워크에서 벗어난 삶을 떠올려 본다. 아날로그 전화만으로도 충분한 사랑을 나누었던 그 시절로 돌아가 본다.
동전 떨어지는 소리
잔뜩 흐린 날이다. 창민은 맥심 커피를 탔다. 프림 두 스푼, 설탕 한 스푼은 그가 고집하는 레시피이다. 커피 잔을 들고 창문 가까이 다가갔다. 하늘은 첫눈 예보가 맞을 것이라는 것을 애써 감추고 있는 표정이다. 금세라도 내릴 기세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자리로 돌아왔다.
“어머, 눈이다.”
창가 자리에 책상이 있는 여직원의 목소리에 작은 떨림이 있었다. 창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송이가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다. 하늘나라 선녀님들이 송이송이 하얀 솜을, 밖으로 내뱉기 쑥스러운 동요 멜로디가 입안에 맴돌았다.
“얼른 일하고 정시 퇴근해야지.”
여직원은 다소 들뜬 상태로 보였다.
“왜 차 막힐까 봐?”
군대 간 아들을 둔 50대 초반 김달숙 씨가 대꾸를 했다.
“언니는 참, 차 막히는 게 문젠가요. 첫눈 왔는데 남자친구 만나야죠.”
“남자친구, 참 좋을 때다. 그래 봐야 남자 다 소용없어. 하루가 멀다 하고 술 퍼마시고 들어오고, 갑부집 아들도 아닌데 술값 외상이나 하고.”
파마머리를 긁으며 달숙 씨는 남편 흉을 보기 시작했다.
“언니도 전화 한번 해 봐요. 혹시 알아요. 아저씨가 첫눈 오는 날 아내의 전화를 받고 싶었는지….”
젊은 여직원이 전화라는 말을 하자 창민은 기다렸다는 듯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갔다.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그는 사무실 맞은편 버스 승강장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로 달려갔다. 수화기를 들고 잠시 숨을 안정시켰다.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 전화기 위에 올려놓았다.
“누구요? 아! 미영이, 여기 있었는데 안 보이네, 잠시만 기다려 봐요, 찾아볼게요.”
여자 친구의 회사 동료는 친절하게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미영을 찾는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이후 종종 어수선한 잡음이 이어졌다. 대기시간이 길어졌다. 전화기 위에 놓은 동전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마지막 동전을 넣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끊겼다.
산에 언덕에
끝내 통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6시 정각이 되자 창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 문을 나서는데 책상에 있는 전화기의 벨이 울렸다. 흘낏 쳐다보고 벽시계를 봤다. 퇴근시간이 1분 지났다. 업무시간이 지나면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마음을 먹은지라 그냥 나왔다. 창민은 미영을 자주 만나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오르는 창민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미영의 환한 얼굴을 볼 수 있을까. 하지만 주인 이외에는 낯선 얼굴뿐이었다.
창민과 미영은 가톨릭문화회관 옆에 있는 ‘산에 언덕에’라는 커피숍을 자주 이용했다. 커피숍의 이름은 신동엽 시인의 시 제목이기도 하다, “그리운 그의 얼굴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들은 커피숍에서 낮은 목소리로 시를 함께 낭송하기도 했다. 창민은 웃을 때마다 보조개가 들어가는 미영의 얼굴을 보고만 있어도 행복했다. 1년 가까이 만남을 이어 가면서 창민은 첫눈 오는 날 영원한 사랑을 고백할 계획이었다.
커피 두 잔을 마시는 동안에도 미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옆자리에 있는 젊은 남녀의 얼굴엔 두 시간 동안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시곗바늘은 저녁 8시를 지나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오는 바람에 자리를 비워 줄 수밖에 없었다. 창민은 커피숍을 나왔다. 대흥동 성당 방향으로 가는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성당 마당에 설치된 크리스마스 트리는 해맑게 깜박거렸다. 성당 옆 건물 지하 가배다방으로 들어가는 젊은이들의 발걸음은 경쾌했다. 인근에 있는 봉봉제과에도 젊은 청소년들이 많았다. 모두가 첫눈과 연말 송년모임을 즐기는 분위기다. 갑자기 외로움이 밀려왔다. 갈 곳을 잃은 창민은 근처에 있는 문경서적으로 향했다. 책방은 미영과 가끔 가던 곳이다. 매장이 넓어 젊은 남녀들의 약속장소로 많이 찾았다. 그는 서점 한 켠에 마련된 시집 코너를 둘러보면서 딱 한 권 꽂혀 있는 신동엽 시인의 시집을 골랐다.
“어, 신기하네. 한 달 동안 한 권도 팔리지 않던 시집이 오늘만 벌써 두 권째네. 재고가 두 권 남았었는데.”
계산을 하던 직원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창민의 눈이 커졌다.
“이 시집 사 간 사람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시나요?”
“글쎄요. 자세히 안 봐서, 젊은 여성이던데, 단발머리에.”
다시, 산에 언덕에
미영은 계단을 오르면서 창민이 있을까 내심 기대를 했다. 약속을 하지는 않았다. 미영이 창민에게 전화를 건 것은 6시 1분, 창민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녀는 커피숍을 들어갈 때마다 계단에서 잠시 멈춰 서 숨을 깊게 내쉬곤 했다. 그리고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살폈다. 오늘은 더욱 길게 숨을 뱉었다. 문을 밀고 들어서자마자 늘 앉던 창가를 바라보았다. 빈자리는 없었다. 평소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주인과 눈인사를 나눴다. 커피숍 주인은 미영을 보자마자 전화기를 건넸다. 그녀는 영문도 모르고 얼떨결에 수화기를 잡았다. 주인의 한마디에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텔레파시가 통했나 봐요. 아까 두 시간 동안 기다리더니 어떻게 알고 전화를 했지?”
통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10초 남짓. 미영은 커피숍을 나와 빠르게 걸었다. 치맛자락이 가볍게 나풀거렸다. 단발머리는 찰랑거렸다. 멀리 창민이 뛰어오고 있었다. 흔드는 손에는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미영은 가방에서 시집 한 권을 꺼내 흔들었다.
2019년, 단절을 위해
우리는 늘 연결되어 있다.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불안하다. 스마트폰, 네트워크, 빅데이터, 인공지능 등은 하루 24시간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는 말이다. 그렇게 문명의 속도는 빨라지고 변화는 급격하다. 우리가 기계를 다루는 게 아니라 기계에 의해 삶이 맞춰지는 느낌이다. 때로는 기계가 원하는 방향으로 향한다. 묶이고 얽히고 거기에서 벗어나면 낙오자가 되는 환경이다. 하지만 디지털 원시시대의 재앙을 경험한 만큼 우리에겐 종종 단절의 세계가 필요하다.
거침없는 속도와 거미줄 같은 연결망을 벗어날 때,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보인다. 허우적거릴 때마다 더 빠져드는 자본의 늪에서 벗어날 때, 잃어버렸던 자아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2019년에는 가끔은 연결되지 않는 일탈의 삶을 꿈꾸었으면, 종종 단절이 주는 기쁨을 느꼈으면, 그것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공동의 삶을 찾을 수 있기를. 우선은 원고를 끝내고 전화기를 꺼야겠다.
글 정덕재(시인, 르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