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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40호] 목적 없는 우연 - 《에브리맨》, 그리고 필립 로스
목적 없는 우연
- 《에브리맨》,
그리고 필립 로스
로와의 책탐
모든 사람에게 그렇듯이 자신에게도 삶이 우연히, 예기치 않게 주어졌으며, 그것도 한 번만 주어졌으며, 거기에는 알려진 또는 알 수 있는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에브리맨》, 130쪽)
필립 로스(Philip Roth). 최근 1년 동안 내가 읽은 그의 책은 여섯 권쯤 된다. 읽은 순서대로 한번 꼽아 보자. 《죽어가는 짐승》, 《The breast》, 《에로스학 교수》, 《에브리맨》, 《네메시스》, 《전락》, 《사실들》. 그중에 《The breast》는 직수입까지 해 가며, 1989년 출판된 《에로스학 교수》는 절판된 책을 웃돈까지 얹어 가며 샀다. 그뿐이랴. 구매해서 제목만 읽은(!) 《포트노이의 불평》,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아버지의 유산》, 《굿바이, 콜럼버스》, 《미국의 목가1》, 《울분》, 《유령 퇴장》, 《휴먼 스테인1》도 있다. 그렇다면 번역된 로스 책 중에 내가 안 산 책은? 그렇다. 제2권들뿐이다. 제1권을 못다 읽어서 아직 못 산 것뿐.
로스는 많이, 오래, 끈질기게, 썼다. 그는 진정한 프로였다. 《에브리맨(Everyman)》에서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86쪽)는 표현 그대로. 물론 데뷔 때부터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었기에 그가 이렇게 꾸준히 소설을 쓸 수 있었으리라.
1933년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필립 로스는 26세에 발표한 《굿바이, 콜럼버스》가 다음해 1960년 국가도서상을 수상하면서 주목받는 작가로 등단했다. 2010년 10월 발표와 동시에 절필을 선언한 《네메시스》까지 그는 41년 동안 대략 30권의 중장편 소설과 에세이를 출판했다. 작가적 분신인 네이션 주커만(Nathan Zuckerman)을 내세운 아홉 권, 실명 로스를 화자로 여섯 권, 관능탐구자 데이빗 케피시(David Kepesh) 소설 세 권, 네메시스를 다룬 소설 네 권, 그리고 딱히 분류가 어려운 여덟 권. 비영리단체 미국도서관(Library of America)은 2005년부터 2013년에 걸쳐 로스 작품 전집을 출판하기도 했다. 살아 있는 작가의 전집을 발간하기는 대단히 이례적인, 실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토록 필립 로스는 이견 없는 미국의 대표 소설가다. 이름 자체가 브랜드인, 성공한 소설가.
나는 로스 작품으로는 에로스와 죽음에 관한 소설들인 《The breast》, 《에로스학 교수(The professor of desire)》, 《죽어가는 짐승(The dying animal)》을 먼저 접했다. 야하다니까 재미있을 듯했지만 썩 그렇지도 않았다. 철저하게 남성-그것도 가슴 패티쉬-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기술되는 욕망이었기에. 더구나 책이 더 강조하고 싶던 이야기는 에로스와 타나토스, 미국의 68혁명 문화사로 보였다. 내가 다음에 읽은 로스 소설이 바로 《에브리맨》이었다.
《에브리맨》은 《울분(Indignation)》, 《전락(The humbling)》, 《네메시스(Nemesis)》로 이어지는, 로스가 절필 시까지 꾸준히 탐구한 주제인 운명에 관한 소설들 중 첫 작품이다. 육체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건강하고 게다가 부자이기까지 한 형과 그 두 가지 모두 썩 변변치 않은 동생이 등장한다. 소설 첫 장면부터가 동생의 장례식이다. 주인공인 동생은 작품 끝까지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로스는 이런 방법으로 그를 보통남자 《에브리맨》으로 만들기에, 독자를 그에게 감정 이입시키기에 성공한다. 영악한 소설가다. 주인공은 광고업이라는 직업상 접하게 되는 모델들의 육체를 끊임없이 탐했었다. 모델뿐이랴. 사무실 바닥에 엎드린 여비서의 머리를 붙들고 바지 지퍼만 내려 뒤에서 밀어 넣곤 하다가 상사에게 걸리기도 했다. (왜 허리나 엉덩이가 아니고 머리지? 로스 소설은 늘 내게 자세를 연구하게 한다. 《죽어가는 짐승》 침대 장면이 그랬듯.) 그런 좋은 시절도 어느덧 지나고, 늙고 병들어 걸어 다니는 종합병동이 된 그는 홀로 남겨진다. 착한 딸이 근처에 산다는 게 위로라면 위로였다.
그는 더 이상 남성이 반응하지 않는 나이에 이르러서도 끓어오르는 욕망, 즉 “모든 것과 바꾸어도 좋을 만한 구멍”(118쪽)으로의 끌림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어느 남성 독자는 이것이 바로 소위 ‘수컷으로 사는 괴로움’이라 하던데, 암컷인 내가 그걸 어찌 알까? 조깅하는 사람의 흔들리는 엉덩이나 탄탄한 허벅지를 봐도 나는 욕망이 일지 않는다. 차라리 갑자기 훅 끼쳐 오는 냄새가 내 속의 암컷을 깨운다면 모를까. 하지만 ‘모든 것과 맞바꿔도 좋을 만한’ 체취? 그런 건 모른다. …이번 생은 틀린 건가?
‘보통남자의 꺼지지 않는 욕망’이 로스가 소설을 네 권이나 써 가며 꼭 하고 싶던 이야기는 아닐 거다. 독자를 유인하려는 일종의 수단이자 곁가지 정도라면 모를까. 40여 년간 인간을 분석해서 재조립하는 직업 소설가로 살아온 그가 마지막 숙제처럼 제출한 운명 시리즈에서 꾸준히 그가 강조하는 점은 내게는 단 한 가지로 읽힌다.
운명의 주인은 목적 없는 우연이다.
그는 최후 발표작 《네메시스》에서도 화자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했다.
누구의 인생이든 우연이며, 수태부터 시작하여 우연-예기치 않은 것의 압제-이 전부다. 나는 켄터 선생님이 자신이 하느님이라 부르던 존재를 비난했을 때 그가 정말로 비난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우연이라고 생각한다. (《네메시스》, 243쪽)
인간은 의인화하기를 좋아하나 실상 자연은 아무 감정이 없다. 그러니 인생에 갑작스레 무슨 일이 일어나건 탓할 대상이라고는 없다. 인생은 이제 비극인 듯 희극이 되어 버린다. 로스가 묻는다. “뭐가 그리 심각해?” 이게 아마 《전락》에서 주인공이 녹색 딜도 때문에 여자에게 여자 친구를 뺏기게 된 이유이리라. 논리적 인과율이나 적절한 권선징악은 동화책에나 있는 것.
인생의 아이러니는 서머셋 몸(Somerset Maugham)의 단편 《개미와 베짱이》에도 그려져 있다. 술, 여자, 도박이라는 삼박자 쾌락을 고루 섭렵하는 잘생긴 동생과 그의 모든 뒤치다꺼리를 대신해 주는 형. 어찌나 시달렸던지 10년도 더 늙어 보이는 형은 오직 한순간을 기다리며 모든 것을 감내해 왔다. 말썽쟁이 동생이 방탕했던 인생을 진심으로 후회하는, 즉 ‘겨울 맞은 베짱이’가 될 때를 말이다. 하지만 몸은 동화 작가가 아니었다. 동생은 부자 미망인의 유산을 상속받아 형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큰 부자가 되고 말았다. …만약 이웃이었다면 로스와 몸은 막역한 친구이지 않았을까?
한 권 두 권 읽다 보니 작가 로스의 팬이 된 나는 소재 출처를 찾아 뒤적거리기도 했다. ‘자서전’ 《사실들》에는 로스의 형이 광고업자이자 화가였다고 적혀 있다. 《에브리맨》 화자와 얼추 겹치는 면이 없지 않다. 형의 개인적인 인생사는 자서전에 없지만, 로스 본인이 이런저런 병으로 입원하고 생사를 오간 이야기들은 있다. 그렇다면 수많은 ‘구멍’들에 끌린 남자는 어느 쪽일까? 확신할 수는 없다. 단지 내가 아는 것은 작가 필립 로스의 첫 결혼은 더 이상 나쁘기가 어려울 정도로, 정말이지 소설처럼 시작해서 소설보다 더 소설같이 끌려 다니다 우연으로 한순간에 끝난 안 좋은 인연이고, 두 번째 결혼도 썩 동화 같지는 않더라는 것뿐. 하긴, 소설은 사실을 재료로 온갖 양념을 버무린 결과물인지라 소시지를 보고 돼지의 특정 부위를 유추하긴 어려운 법이다. 잘 써진 소설일수록 더더욱.
필립 로스는 85세를 맞은 올해 5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내세를 믿지 않고, 신은 허구이며 지금 이것이 자신의 유일한 삶이라는 사실을 의심의 여지없이 믿고 있는 사람”(《에브리맨》, 176쪽)이었을 그는 산보하듯 가볍게 떠났으리라. 단지 남아 있는 독자들만 아쉬워할 뿐. 나도 벌써 주커만과 케피시가 그립다.
…그나저나 새로운 자세는 이제 어디서 배워야 하려나?
글 로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