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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40호] 나는 영혼을 믿지 않아. 영혼이란 어둡고 차가운 것.
"나는 영혼을 믿지 않아.
영혼이란 어둡고 차가운 것."
연극 <나비군인>
러시아의 ‘자유극단’은 제9회 대전 국제소극장연극축제에 연극 〈나비군인〉(연출 막심 노비코프)을 선보였다. 11월 9일, 상상아트홀은 러시아에서 온 극단을 만나기 위한 사람들로 붐볐다. ‘러시아’에서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대가 됐다. 체호프,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러시아라는 이름만으로도 뭔가 남다를 것만 같다. 연극 〈나비군인〉은 잘 알려진 고전을 각색한 것도 아니라서, 자막만 보며 연극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빠르게 넘어가는 글자를 따라가느라, 정작 무대 위의 동선을 놓치곤 했다. 연극의 반 정도만 겨우 이해했다. 그럼에도 세 명의 러시아 배우가 뿜어내는 기운과 그들이 선보이는 액션의 활달함에 눈과 귀가 시원했다.
연극 〈나비군인〉은 아주 추운 국경의 한 수비대를 배경으로 한다. 무대에는 철판 세 개만이 매달려 있고, 그 뒤로 군인 하나씩이 섰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안드레이 대령, 다소 뚱뚱해 보이는 바가예프 중대장, 니콜라이 이등병은 상대적으로 키가 작고 예쁘장하게 생긴 남성이다.
안드레이 대령은 자신이 군인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천상 군인이다. 연극학교를 1년 다니다 퇴학한 신병 니콜라이는 군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저를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저는 이곳에서 서서히 죽어 갑니다.”
소위 말하는 ‘고문관’인 그를 제대로 훈련시키기 위해 안드레이 대령은 더욱 강하게 그를 몰아붙인다. 그러던 어느 날, 니콜라이는 여자로 변하고 만다.
바가예프 중대장이 이 소식을 안드레이에게 알린다. 그렇지만 안드레이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니콜라이를 더욱 매몰차게 훈련시키면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한다. 재미있게도 오히려 니콜라이 이등병을 따라서 안드레이 대령과 바가예프 중대장은 연극 연습을 시작하게 된다.
얼떨결에 연극 대본을 들게 된 안드레이 대령에게 니콜라이 이등병은 말한다.
“극장은 순서대로 대화하는 곳입니다. 읽으세요.”
군대라는 억압적인 공간은 이들이 주고받는 연극, 혹은 대화를 통해 인간적인 곳으로 탈바꿈한다. 웃고 울고 소리 지르고, 아름답게 꾸미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꿈을 이야기하고, 인간을 드러내는 장소가 된다.
〈오셀로〉, 〈말괄량이 길들이기〉 등 연극을 배우는 도중에 안드레이 대령은 니콜라이 이등병과 다양한 대화를 나누며 인간의 본질이며, 잊고 있던 자기 자신에 대해 다시금 깨닫는다. 안드레이 대령은 연극에 깊이 빠져들고, 새벽에도 니콜라이 이등병을 찾아가 연극 연습을 하자고 조르기도 한다. 안드레이 대령은 아내가 떠난 이후 10년 동안 술로 세월을 보냈다. 개인적 생활이라고는 없던 그에게도 과거는 있었다. 어린 딸이 폐렴으로 죽고, 아내마저 떠난 그에게는 사실 아무런 위안도 없었던 것이다.
배우들은 키가 컸다. 니콜라이 이등병 역할을 한 배우는 그렇게 덩치가 크지는 않았지만, 러시아 배우들의 육중한 몸집에 이미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맨 앞자리 오른쪽 구석에 앉아서 배우들의 옆얼굴과 발걸음을 쫓아다녔다. 쿵쾅대며 호흡하며 발성하는 그들은 군인이 여성으로 변하는 ‘변신’ 모티브 속에서 모든 억압에 대해 저항하는 ‘여성적’인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결국 안드레이 대령의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건, 폐렴으로 죽은 여자아이의 두 눈이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무엇, 가장 소중한 무엇이란 가장 연약한 것이었다. 안드레이 대령이 눈물을 흘리며 죽은 딸아이를 회상할 때, 단단한 군복 속에 감춰진 그의 선한 본성이 드러나 보였다.
그는 여자로 변한 니콜라이 이등병을 통해, 잊으려 했던 그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안드레이 대령은 연약한 존재이자, 아름다운 존재인 니콜라이 이등병을 지켜 주고자 전쟁터로 그를 보내지 않으려 한다. 괴로워하며 끊임없이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니콜라이 이등병은 바가예프 중대장의 강제 소집으로 결국 전쟁터로 나가게 되고, 장갑차에 깔려 죽고 만다. 마지막 순간 장갑차 앞에 서 있던 니콜라이 이등병의 얼굴은 많은 말을 해 주고 있었다. 그러고는 암전. 공중에 매달린 철판 테두리를 따라 작은 불꽃이 움직인다. 바닥에는 니콜라이 이등병이 떨어뜨린 옷자락이 놓여 있다.
어느 대목에서인지, 누가 한 말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대사가 있었다.
“나는 영혼을 믿지 않아. 영혼이란 어둡고 차가운 것.”
러시아는 현재 강력한 정권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젊은이들은 군대에 가야 한다. 한국은 또 오랫동안 군부가 권력을 장악한 나라였다. 인간을 폭력으로 억압하는 거대한 힘 아래서 인간성을 발견하며 살아가기란 녹록지 않다. 연극, 예술, 그리고 여성. 군인으로 상징되는 폭력적 남성 세계관과 대비되는 평화의 존재인 여성적 세계관은 그래서 중요하다.
이 어둡고 차가운 영혼으로 가득한 무용한 세상에서 강철 위로 한 마리 나비가 날아오른다면, 그것만한 희망이 또 있을까. 그것은 연약해 보이지만 강하다. 그래서 이 연극의 제목은 참으로 적절하다. 나비, 그리고 군인. 니콜라이 이등병은 결국 죽었지만 연극을 매개로 끝까지 저항하고, 인간 본연의 가치를 찾아가려한 그의 꿈은, 마지막에 철판을 따라 움직이는 불꽃으로 되살아난 느낌이었다. 그 불꽃이 나비이자, 또 다른 저항의 시작이었을까. 우리는 무엇에 저항해야 하는 것일까. 연극 〈나비군인〉은 짧은 시간에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하는 연극이었다.
글 그림 이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