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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40호] 버스도 안 들어오는 안쪽 마을
버스도 안 들어오는
안쪽 마을
공주시 정안면 대산리 안소랭이마을
안소랭이마을을 두 번 들렀다. 10월에 한 번, 11월에 한 번. 그 두 번을 다녀온 사이 풍경은 퍽 달라졌다. 들판을 채웠던 누런 벼들은 다 베어지고 하얀 마시멜로 모양 볏짚 묶음만 남았다. 팥을 심었던 밭도 다 거둬, 이제 마늘을 심으려 땅을 갈아엎고 거름을 주었다.
가을볕으로 반짝이던 들판은 겨울이 가까워져 한결 서늘해졌다. 대전여지도 취재의 재미는 이 잠깐 사이 하늘과 들의 변화를 가늠하는 순간에도 온다. 이렇게 변하는 계절처럼 사람들의 낯빛도 잠깐 사이 어둡거나 밝아진다. 계절의 변화뿐 아니라 사람들 표정의 변화도 잘 담아내는 것, 그것이 대전여지도의 소소한 재미이다.
공주의 ‘소랭이’라는 지명은 정안면의 광정에서부터 산성까지를 이르는 말이다. 지난 호에 소랭이마을 가운데 하나인 월산리를 들렀고, 이번에는 ‘소랭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안소랭이마을을 찾았다.
정헌채 씨와 효자비
안쪽에 있어, 안소랭이
처음 안소랭이를 찾았을 때는 차로 동구를 지나 안소랭이마을까지 들어갔다. 그렇게 지나온 것이 아쉬워 두 번째 방문에서는 동구에 차를 대놓고 마을까지 걸었다.
동구에는 돌장승 둘이 서 있다. 나무 사이에 금줄이 쳐 있고, 꽤 높이 쌓은 돌탑이 이곳이 예사 장소가 아니라는 걸 드러낸다. 나무로 깎은 오릿대가 길 양쪽 나무에 기대다시피 섰다. 깊은 나무 그늘로 사방이 어둑해서인지, 인기척도 없는 이곳에 산신령이 자리한 듯 등골이 서늘하다. 이곳에서 매해 음력 1월 14일마다 산제를 지낸다. 원래는 호환을 막기 위한 제사였다 하니, 이 마을이 얼마나 산 속 깊은 곳에 자리했었는지 가늠된다. ‘성치탑’이라 부르는 돌탑에서도 제를 올린다고 한다.
돌탑 너머 커다란 바위 안쪽으로는 사람 하나가 들어갈 법한 공간이 있다. 몸을 숨기기 적당한 그 사이즈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사람이나 짐승이 숨어 비바람을 피하기 딱 좋아 보인다. 동구를 지나 천천히 걷는다. 오른쪽으로 맑은 물이 흐른다. 계곡이 꽤 깊다.
5분 정도 걸어가니 마을이 보인다. 안소랭이는 산 안쪽에 자리한 자그마한 마을이다. 비탈진 마을에 햇볕이 가득하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길과 마당의 경계 없이 자리한 집이 보인다. 바로 강원도에서 피난 와서 이곳에 정착했다는 권병열 씨의 집이다. 그리고 그 집을 드나드는 할머니는 권병열 씨의 아내 안영환 씨다. 안영환 씨는 정안면에서 나고 자랐다. 이 집 둘째 아들이 마을 입구의 축사에서 소 여덟 마리를 키운다. 안쪽이라 피난을 많이 왔다는 안소랭이마을. 권병열 씨는 아내가 다듬은 무청을 축사 한쪽 벽에 건다. 벽에 걸린 무청을 보노라니 겨울이 이제 바짝 다가왔다는 것이 실감난다.
마을의 한 아주머니 이야기로는 버스가 안 다녀서, 버스가 다니는 큰 길로 가려면 30분은 걸어야 한다고 한다. 노인이 걸어 나가기에는 멀다. 마을이 그만큼 안쪽으로 깊이 들어와 있기에 안온한 느낌을 준다. 이 안쪽까지 피난을 와서 정착했다는 권병열 씨의 이야기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옛적에는 더 깊고 먼 마을이었을 터다.
권병렬 씨의 집은 금란정에 바짝 붙어 있다
맑은 물이 솟아나는 안소랭이
마을에 들어서서 먼저 눈에 드는 것이 맑은 물이 흘러나오는 샘이다. 권병열 씨의 집에 바로 붙어 있는 샘이다. 지금과 같이 샘이 정비된 것이 88년이다. 권병열 씨는 그때를 기억한다. 샘을 정비하기 전에는 뭔가가 섞여 들기도 했는데, 샘 주변을 정리한 덕에 물은 더 맑아졌다. 두 개의 직사각형 홈 안에 맑은 물이 찰랑찰랑 차 있고, 나머지 다섯 개의 홈 위로 뚜껑이 덮였다. 그 머리맡 둥근 돌에 ‘金蘭井(금란정)’이라는 글씨가 새겨졌다. 맨 위에 자리한 가장 작은 뚜껑을 들어 올리자 위로 솟는 샘물이 보인다. 바가지로 한 모금 떠서 마시자 차고 달다. 공주 20경 중 하나인 ‘금난구곡’은 소랭이의 아홉 군데 명소를 일컫는 말인데 금난정이 그중에 하나이다. 처음 이 마을을 들렀던 날, 정헌채 씨가 마을을 안내해 줬다.
“샘물이 겨울에는 영상 14도로 따뜻하고, 여름에는 아주 차가워. 샘을 금난골에서 난다고 금난정이라 하지. 이 동네가 옛날에 3천 냥의 가치가 있다고 했어. 산신제를 지내는 곳이 1천 냥, 금난정이 1천 냥. 그리고 둥구나무였던 느티나무가 1천 냥. 이 동네 느티나무가 가장 컸는데, 일정 때 마차 바퀴를 만든다고 베어 갔지.”
마차 바퀴를 만들 정도였으니, 그 크기가 상상이 갔다. 마을에서 가장 이야기를 구성지게 한다는 정헌채 씨의 말이다. 그는 1944년에 이 마을에서 태어나, 여태껏 이곳에서 줄곧 살아 왔다.
샘이 보이는 길 왼쪽으로 나란히 비석 두 개가 서 있다. 곱게 잔디를 가꾼 자리에 정성 들여 세운 비석이다. 정헌채 씨는 그 비석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하나는 효자비, 하나는 열녀비다.
“이 마을에서는 전주 최씨가 가장 오래 살았어. 이 효자비가 전주 최씨네 효자비야. 효자 최성이 어머니가 병환으로 누워 있자, 서낭나무 밑 개울 깊은 곳에 가서 한겨울 얼음 위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대. 무릎 닿은 자리가 녹아서 구멍이 생기고, 거기서 잉어를 잡아서 어머니께 끓여 드렸어.”
그렇게 아들이 잡아 준 잉어를 먹고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한겨울에 잉어를 잡는 정성으로 극진히 어머니를 모신 아들의 효성을 기려 이 효자비를 세웠다 한다. 그 후 비가 많이 와서 개울에 떠내려갔던 걸 후손들이 다시 이 자리에 세웠다.
자그마한 마을이다. 언덕에 난 길을 따라 10여 분만 돌면 집을 다 둘러볼 수 있다. 정헌채 씨의 집은 산과 바짝 면해 있다. 이 집 뒤로 다 밤나무 밭이다. 마당 한쪽에 주워 온 밤 가마니가 가득하다. 그의 부모님은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었지만, 그는 결혼을 하고 산 땅에 밤나무를 심어서 수확하기 시작했다. 48년 동안 그 밤나무를 키워 자식들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를 다 보냈다. 지금도 밤 줍는 철이 되면 가족들이 주말마다 동원된다. 밤 줍는 건 여전히 어렵다. 밤을 수확할 때면 허리를 펼 새가 없다. 밤농사가 어렵고 힘들어도, 이 마을만큼 살기 좋은 곳도 없었다.
“옛날에 30호에 200명 정도 살았는데, 지금은 열세 집이 살아. 애들 키우기 참 좋았어. 한 집 식구처럼 마을에 어린 애들을 풀어 놓아도 아무 문제가 없었지. 다들 가족처럼 돌봐 주니까.”
몇 백 년 동안 귀신이 지나는 길목이라 해서 제사를 지내고, 맑은 샘물에 기대어 밥을 끓이고, 한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한 가족처럼 지내던 안소랭이마을. 이렇게 서로 곁을 두고, 아끼던 작은 마을의 분위기가 그런 효자도 효부도 낳았던 모양이다. 안소랭이마을로 또 한 번의 풍요로운 가을이 소복이 안겼다 가고 어느덧 겨울이 다가와 앉았다.
글 사진 이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