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40호] 나는 비행기 태워 줄 딸만 일곱이야

나갈 자식만 낳았다고?

나는 비행기 태워 줄 딸만 일곱이야

 

권정숙 씨

   


 

권정숙 씨

 

“자녀가 몇이에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권정숙 씨는 늘 ‘애들한테 물어보세요’라든가, ‘몇일 것 같아요?’라고 답했다. 여섯째 딸의 증언이다. 충청남도 청양군 산골에 위치한 남천리 새울 고랑에서 권정숙 씨를 물으면 ‘아 그 딸 부잣집?’이라는 말이 자동적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그 마을 안에서 제일 딸이 많다. 아니 딸만 있다. 
권정숙 씨의 고향은 공주시 우성면 방흥리다. 그녀는 눈이 펑펑 내리던 겨울에 방흥리에서 차를 타고 20분 정도 걸리는 남천리 새울로 시집 왔다. 스물다섯 살이었던 그녀에게는 그 당시 조금 늦은 결혼이었다. 권정숙 씨는 어릴 적에 꿈이 무어냐 물으면 항상 ‘선생님에게 시집가는 것’이라 대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결혼은 이웃마을에서 논 몇 마지기를 일구며 살던 가난한 농부와 했다.
“엄마 얘기를 들어 보면 우리 집 아저씨가 종종 우리 동네를 들르곤 했대. 동네에 친척이 있었다고 하더라고. 아무튼 그래서 동네 어르신이 애들 아빠를 평소에 좋게 봤는지 양쪽 동네에서 우리를 중매해 줘서 결혼했지. 그 어르신이 우리 엄마한테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해서 엄마가 나한테 이야기를 했어. ‘나이는 스물아홉이라는데, 얼굴은 마흔 같아 보이더라’라고 말하고서는 보고 마음에 들면 결혼하라고 했지. 그때 우리 아저씨가 고생을 많이 해서 얼굴이 폭삭 삭았던 겨. 그래도 그렇게 얘기한 거 보면 엄마도 마음에 들었나 봐. 나도 실제로 만나 보니까 사람이 괜찮아 보여서 결혼했지.” 
결혼을 하고 이듬해 여름에 첫째를 낳았다. 그리고 두 해가 지나 둘째를 낳고, 그렇게 내리 일곱을 낳았다. 권정숙 씨는 사실 아들, 딸 가리지 않고 딱 둘만 낳아 기르고 싶었단다. 그런데 남편 이석수 씨와 시어머니는 다복한 가정을 원했고, 아들을 낳길 바랐다. 장남이기에 대를 이를 아들이 필요했고, 농사일에 자식이 많은 것은 큰 힘이 되었다. 그땐 그런 시대였다. 아들이 없으면 안 되는 그런 시대 말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들을 낳으려 노력하다 보니, 딸만 일곱이 되었다. 
“다들 아들을 원하니까 나도 아들을 낳겠다고 계속 자식을 낳았어. 근데 결국 다 딸이었지. 그래도 나는 괜찮았어. 아들이든 딸이든 나는 다 좋았거든. 그때는 아들 못 낳으면 소박맞는다고 하지만 다행히 우리 시어머니는 아쉬워하긴 했어도 그런 일로 구박하지는 않았어. 가끔 엄할 때는 진짜 엄한데, 그래도 좋은 분이었지.”
비록 아들은 없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크는 재미로 살았다. 아들을 그렇게도 원했던 이석수 씨도 아이들을 예뻐했다. 식사 때마다 자신의 식사는 잠시 미루고 아이들을 무릎 위에 앉히고 손수 밥을 떠먹이며 사랑으로 키웠다. 
자녀가 많은 만큼 사건 사고도 참 많았다. 사내아이 같은 딸이 두엇 있었고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사고를 치고 다녔다. 한 번씩 크게 병을 앓는 것은 기본이고, 화상을 입고, 이마가 찢어지고, 물에 빠져 죽을 뻔한 딸도 있단다. 
“어휴 둘째딸이 유난히 말괄량이에 괴팍해서 엄청 고생했어. 한번은 참새를 잡겠다고 동네 애들이랑 뛰어 다니다가 쌓여 있던 벽돌이 와르르 쏟아져서 그 밑에 깔린 거야. 그때 나는 애들 예방 접종 때문에 병원을 가서 몰랐지. 돌아왔는데 어머니가 둘째 다쳤다고 빨리 병원으로 가자고 해서 헐레벌떡 갔었어. 별로 다치진 않았는데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정말 가슴이 철렁해. 어휴 그놈의 새 잡는다고 뛰어 댕겨서는.”
일곱 딸 모두 사고를 치지 않은 아이가 없었다. 하나가 괜찮으면 다른 하나가 말썽이니 아이들을 키우며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래서 권정숙 씨는 아이들이 말 잘 듣고 공부를 잘하는 것보다도 항상 사고 없이 건강하길 바랐단다. 아이들이 다치는 일이 자신이 잘 돌봐주지 못해서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 참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아이들 인형 하나 사 주지 못해 쓰린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다. 가난한 집으로 시집 와 이석수 씨와 함께 안 해본 일 없이 악착같이 살았다. 밤, 부추, 머위, 표고버섯, 고추, 수박 품종 가릴 것 없이 안 기른 작물이 없고 공주에서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다. 임신을 하고도 쉬는 날 없이 일했고 아이를 낳고는 몸을 추스릴 시간도 없이 다시 일을 했다. 
“진짜 애들 낳고 키우면서 안 해본 일이 없어. 가정 형편이 안 좋아서 그렇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어. 우리 집 아저씨 따라다니면서 온갖 일을 다 하고 다녔지. 농사는 당연하고, 트럭에 과자며 쟁반, 명태 같은 걸 싣고 장이 서는 곳이면 다 갔어. 해뜨기 전에 나가서 해가 지면 들어왔지. 첫째, 둘째가 어렸을 때는 밭에 일하러 가려고 할 때마다 애들이 가지 말라고 울어대는데도 윗집 종조할머니한테 맡기고 나왔어. 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렇게 밤낮없이 일하며 한번 밭으로 나가면 식사하러 들어오는 시간도 아까워 들판에서 냄비 밥을 지어 끼니를 때웠다. 그렇게 쉬지 않고 달려 자식 일곱을 길렀다. 열심히 일하고 아껴 온 덕에 논도 두어 마지기를 샀고, 어려웠던 가정 형편은 소를 키우면서 점차 나아졌다. 권정숙 씨는 그렇게 힘들었어도 누군가에게 빚지지 않고 자식들을 잘 키워 시집도 보냈으니 이만하면 됐다고 말한다. 
“주변에서 나갈 자식만 낳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어. 왜 그렇게 딸만 줄줄이 낳았냐는 말도 많이 들었지. 그럴 때면 그냥 ‘아들 낳으려고 그랬지’ 하고 웃어. 그게 사실이니까 아무렇지도 않아. 우리 둘째 사위가 올해 박사 학위를 땄는데 성적이 우수해서 대표로 상을 받았거든? 나는 그게 그렇게 기쁘더라고. 내가 딸을 잘 둬서 이렇게 좋은 사위를 얻었다고 생각해. 딸은 부모님 비행기 태워 준다는 얘기가 있잖아. 나는 딸이 일곱이나 되니까 복 받은 거지 뭐.”

 


글 사진 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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