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05호] 19살은 0살이다


 
20대 초반에는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달라진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보다. 스무 살과 스물한 살 때가 다르고 스물셋과 스물넷이 다르다. 잠이 많아지고 술이 안 깨는 걸 말하는 게 아니다. 뭐랄까. ‘속’이 생겼다. 

스무 살도 더 전에는 서일 여자고등학교에 다녔는데 그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점심 저녁 급식이 뭐 나오는지 그것만 중요했다. 그날의 메인 요리임을 알리는 급식판 가운데 반찬 자리에 코다리 조림이나 마파두부가 얹힐 것 같으면, 선생님 몰래 교문 빠져나가서 치즈라면 사 먹을 궁리나 했다. 아, 연애도 했지.
아무튼, 나는 수업시간에 리액션하기, 짝꿍이랑 장난치기, 야자 어떻게 뺄지 고민하기 등을 주 업으로 삼는 학생이었기에 밤 열 시까지 자습이랍시고 의자에 붙어 있는 게 고역이었다. 아프다는 거짓말이 안 먹혀서 야자를 못 뺀 날에는 학교에 딸린 도서관에서 소설책을 빌려다 읽기도 했다. EBS 수능특강 푸는 것보다 재미있을 거였다. 

그런데 이놈의 학교가 웃긴 게, 야자감독 선생님이 책 읽는 나에게 눈치를 줬다. 누가 내 책상을 툭툭, 쳐서 돌아보면 야자감독 선생님이 텅 빈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건 공부가 아니라는 거였다. 국어 선생님이 야자감독을 하는 날이면 달랐을까? 책 읽는 게 어떻게 공부가 아니지? ‘수능 공부’를 하라는 뜻인 건 알았지만, 집에 가서 양말을 벗을 때까지 기분이 나빴다.
다음 날 독서대를 사 왔다. 크고 튼튼한 걸로. 반항이었다. 수업이 시작했다. 책상 위에 올리고 그 위에 <은교>를 펼쳤다. 술술 읽혔다. 귀가 빨개졌는데도 선생님한테 안 걸렸다. 그때부터 거북 목 증후군이 생겼다. <은교>를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시간을 처리하는 나만의 방식이 생긴 거다. 그렇게 몇 달 살다 보니 나는 언어영역 시험지를 긴장 없이 풀어도 2등급 밑으로 안 내려가는 학생이 되었다. 원래도 잘하긴 했지만, 빨려 들어갈 듯 소설을 읽은 경험이 시험지의 지문을 읽을 때도 작용했을 거다.
책을 읽는 경험이 나를 언어영역 계의 최상급 한우 암소로 만들어 준 것 말고 해 준 게 또 있을까? 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도가니>를 읽은 밤, 야자가 끝나고 나서 복도 벽을 발로 차면서 집에 갔다. <도가니> 이야기가 실화라는 게 화가 나서. 

분명 중학생 때부터 사회과목을 배웠는데 교과서에 나오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기회가 주어지고 능력만큼 얻을 수 있는 사회’같은 말에 왜 한 번도 질문을 안 했을까? 그러니까, “사람마다 가지고 태어나는 능력치가 다른데 능력만큼 얻는 게 어떻게 공정한 사회예요?”라거나, “우리랑 서울에 사는 애들이랑 기회가 똑같은 거 맞아요?”라는 식의 질문들. 그때의 나는 그 말의 진위를 가려볼 생각이 없었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교과서 속 글자들을 빨아들였다가, 시험지를 적시기만 하면 되었다. 물의 성분을 따질 이유가 없었다.  

따지는 법을 가르치는 곳이 학교여야 하지만, 정의가 무엇인지는 죽어 없어진 철학자들이 이야기했고 앞으로 살아갈 당사자들인 우리는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지, 어떤 삶이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는지 한마디도 못 했다. 노자의 무위자연을 알았지만, 무위자연을 실천하는 삶을 상상하지 못했다.
학교에서 아프리카 가난 얘긴 들었어도 지금, 여기의 빈부격차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을 안 했다. 누구네 엄마는 왜 마트 계산원으로 일하면서 살고, 누구네 엄마는 백화점에서 종일 살 수 있는지, 궁금했지만 물을 수 없었다. 사회 교과서를 가지고 사회 선생님께 ‘사회’에 대해 배웠지만, 한국 사회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했다. 내 친구들도 그랬다. 우리는 호기심을 거세당한 채로 뭘 계속 배웠다. 

우린 모두 생각이 없는 사람들일? 이제는 안다. 학교가 우리에게 가르칠 생각이 없었다는 걸. 그간 뇌 용량 아깝게 죽은 지식을 빨아들였다. 욕이 나오려고 한다. 한창 머리 잘 돌아갈 시기인데. 그 시절 너와 내가 급식 메뉴에만 관심이 있었던 건, 8할이 학교 탓이다.어찌어찌 대학에 왔다. 남이 쓴 글을 읽고 내 생각을 정리하는 게 ‘공부’가 되었다. 대학도 학원이나 다름없는 시대지만, 지난 12년간 다닌 학교들에 비해서 주워들을 게 많다. 그래서인가 보다. 20대 초반은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달라진다는 게.

수능이 끝났다. 19살은 0살이다. 진짜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나이. 이 글을 읽은 엄마, 아빠들은 0살에게 책을 선물해야 할 의무가 있다. 도가니든, 은교든, 뭐든. 
 
서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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