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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40호] 모든 건, 그녀의 계획 아래 있다
모든 건,
그녀의 계획 아래 있다
윤순식 씨
윤순식 씨
윤순식 씨는 올해도 어김없이 김장을 담근다. 아들네를 부르기 전에 이미 총각김치 다섯 통은 담갔다. “아주 총각무 다듬느라고 죽을똥을 쌌다.”
총각무를 다듬는 일은 수십 년 해도 힘듦이 가시지 않는다. 윤순식 씨의 총각김치는 입맛이 길든 가족뿐만 아니라 이미 일반 대중에게 정평이 난 맛이다.
“동태탕 끓여 먹으려고 동태는 사다 놓았다. 김장 담글 때는 동태탕을 먹어야지.”
“김장할 때 곁들여 먹어야 하는 음식은 수육이지, 무슨 말씀이세요?”
“김장할 때면 늘 추우니까, 따뜻한 국물이 들어가야 속이 풀리고 몸이 따뜻해지는 것이야. 그리고 수육 거리도 사다 놓았어.”
올해 윤순식 씨는 배추 60포기로 김장을 담글 셈이다. 쌀 소비량이 떨어지는 것과 정비례해 배추김치 소비량도 떨어질 텐데, 김장 배추 포기 수는 도통 줄지를 않는다. 일가 친적 중 이미 김장 담글 힘이 없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김장을 집에서 담그지 못하는 사람들 것까지 챙기다 보니 그렇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쓱 밀어 놓고 간 배추김치 통만 서너 개는 되었다. 몇 해 전,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혼자가 된 윤순식 씨의 생질 얘기다.
“그냥 빈 통만 놓고 가도 되는데 봉투를 집어넣었더라고, 그냥 아들 하나 더 생겼다 생각하고 담가 주면 되는데, 부담스럽게.”
우리가 준비해 온 흰색 봉투에 5만 원짜리 몇 장이 혹시 적은 건 아닌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이장네서 가져왔다는 겉절이에 저녁을 먹다 보니 아내는 소주 생각이 나는 모양이다. 동네 큰길가에 유일하게 있는 가게는 수리 중이라 문을 닫았다. 냉장고를 열어 보니 소주 한 병이 보인다.
“안 돼, 그거는 배추김치 속에 넣을 거야. 이 동네 젊은 사람들 김장 속 양념에 소주를 넣으면 나중에 김장김치 겉에 생기는 곰팡이 같은 게 없다고 하더라고. 그 옆에 보면 먹던 것 있는데, 그거 마셔.”
냉장고 옆에는 바닥을 간신히 채운 소주병 하나가 놓였다. 밥공기에 소주를 따라 마신 아내는 ‘완전 맹물’이라며 혀를 쑥 내민다. 눈치 빠른 윤순식 씨는 그 모습을 보고는 얼른 말을 바꾼다.
“에이, 그냥 마시자. 김장 담가야 하는데, 소주라도 마셔야 어깨가 잘 돌지. 가서 소주 새 병 가져와라. 엊그제 방앗간 아저씨 일해 주러 왔을 때 두 병 사다가 한 병 마시고 남은 건데. 그냥 마시자.”
밥도 다 먹었고 술은 남았으니, 살이 통통하게 오른 꽃게를 삶아다 안주로 삼는다. 아내는 어린 아들을 불러 살뜰하게 바른 살과 게딱지에 달라붙은 맛있는 부속물을 먹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윤순식 씨가 또다시 말을 거든다.
“아들 새끼 그렇게 먹여서 키워 봐야 다 소용없다. 먹고 싶은 건 참지 말고 먹어라. 나중에 후회 안 하게.”
윤순식 씨가 어떤 음식을 못 먹은 것이 그리 후회되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세상엔 묻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 또한 묻지 말아야 할 일이었다.
윤순식 씨는 밥상을 물리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다. 아침 5시에 일어나 배추 60포기로 김치를 담가야 한다.
밤새 소금에 절은 배추는 생기를 완전히 잃었다. 세 군데 물통을 거치며 몸단장을 한 배추는 물기를 빼기 위해 살짝 기울여 둔 평상 위에 몸을 잠시 뉜다.
“그래도 이 물이 지하수라서 손 시렵지는 않지? 날도 푹해서 좋으네. 정말 다행이야. 그나저나 내가 사 놓은 수육 거리를 어디다가 놓았는지 도무지 생각이 안 난다. 어제 분명히 냉장고에 넣으려다가 자리가 없어서 들고 돌아다녔는데, 그다음을 도통 모르겠네.”
윤순식 씨 기억력이 날로 나빠지는 모양이다. 기억력보다 먼저 나빠진 것은 청각이었는데, 이제 어느 정도 밸런스가 맞아 들어간다. 수육보다 동태탕을 우선할 때부터 그녀가 무얼 더 중하게 여기는지 알아챘어야 하는 건데, 시뻘건 배추 속을 눈앞에 두고 수육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김장을 담그는 몇몇은 속이 상한다.
물 빠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아침을 차려 먹는다. 이 모든 프로세스를 사전에 고지하지 않았지만 이미 윤순식 씨는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시뮬레이션했을 게다. 그러곤 효율성에 확고한 신념으로 현장을 일사분란하게 지휘하며 구현한다. 한 치의 오차도 없다.
“넌 칼 가지고 가서 배추 꼭지를 따서 거실로 옮겨라. 꼭지가 좀 심하게 튀어나온 것만 자르면 된다. 모든 배추를 다 할 필요는 없다.”
왼손에는 쪼개 둔 배추를 들고 오른손에는 칼을 쥔다. 꼭지를 따라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꼭지가 아니라 뿌리다. 굳은 땅을 힘차게 뚫고 들어가 자리 잡았을 그 뿌리의 윗부분이다. 배추 뿌리를 우리 맘대로 꼭지로 둔갑시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다섯 번쯤 옮겼을 때 윤순식 씨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수육 거리를 찾았다. 내가 통에 잘 넣어서 김치 냉장고에 둔 것이 생각나더구나. 이제 삶아라.”
수육이 돌아왔다. 처음 분실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어딘가에 있을 것이란 확신은 있었다. 수육을 삶아야 하는 것도 적정한 시간이 있다. 딱 때맞춰 떠오른 그녀의 기억은 어쩌면 빅피처였는지도 모르겠다.
글 사진 이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