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43호] 타인의 은둔 일기를 훔쳐보다

타인의 은둔 일기를

훔쳐보다

 

김운하 작가

 

 

남국의 섬, 제주도.
나는 그곳에서 밤과 고독, 바다라는 존재의 참된 깊이를 알았다.
-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20쪽.

 


 

김운하 작가

  

김운하 작가의 장편소설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가 3월 11일 출간된다. 소설가이자 문화비평가로 소설책과 비평서 등 다양한 인문학 도서를 집필하고 발간해 왔지만, 소설책 출간은 2001년 《137개의 미로카드》를 마지막으로 처음이다. 북카페 이데의 사장님으로 토마토와 인연을 맺은 후로 《월간 토마토》에 오랫동안 칼럼을 게재하고 대전에서 꾸준히 활동한 그의 책을 도서출판 월간토마토에서 펴내게 되었다. 출간에 앞서 북카페 이데에서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가본을 앞에 두고 만났다. 가본은 도서 출간 직전 책의 꼴을 갖추어 샘플로 만든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 이런 모습이 떠오른다. 어두운 밤, 책상 앞에 스탠드를 켜 놓고 앉은 한 남자가 있다. 남자는 책을 뚫어져라 쳐다보거나, 펜을 들어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고양이 한 마리. 줄무늬의 통통한 고양이 한 마리가 그의 발치에서 가르릉 댄다. 책은 아주 두꺼운 것이라야 한다. 양장으로 된 고전. 책의 갈피마다 인생의 철학적 진실이 흘러나온다. 책을 읽으며, 글을 쓰며 사색하는 남자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경계를 지우며 흐른다. 
이 소설은 여러 고전의 이야기들과 ‘나’의 현재가 만나는 지점에 서 있다. 무작정 제주도로 떠난 한 남자는 고독 속에서 책 속의 여러 이야기들을 전전한다. 그리고 그 고독과 책을 마주하며 인생의 이면과 자기 진실을 발견한다. 
사람들은 제주도로 무작정 떠나곤 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은둔의 시간 속에서 자기 자신과 대면하고 인생을 살아갈 힘을 얻어 돌아온다. 김운하 작가에게 이 소설의 모티브가 된 그 시절의 이야기를 물었다.  
 

“이 소설을 구상한 건 오래전 일이에요. 10여 년 정도 된 일인데, 제가 제주도에서 1년 가까이 혼자 머무른 적이 있어요. 인생에서 처음으로 갖는 휴식 기간 같은 거였어요. 아무 일도 안 하고 바닷가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서 책 읽고, 쉬고, 산책하고, 그런 시간을 가졌는데, 그때 여러 가지 많은 걸 깨닫게 되었어요.  
소설가가 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때여서, 문학적인 고민도 많았고 작가로서 살아갈 삶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하던 때였죠. 그 모든 문제를 제주도에 머무는 1년 동안 고독 속에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정신적인 혼돈, 방황의 시간을 가졌던 거죠. 물론 아름다운 자연이 있었고, 그렇기에 힘들지는 않았지만 그 시간을 통해 글쓰기에 대해 새로운 자각을 가지게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런 내적 방황의 이야기들을 이 소설에 담아내고 싶었어요.” 

 

김운하 작가에게 있어 이 시기는 의미 있는 전환의 포인트였다. 이전의 인생과는 완전히 단절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단계였기 때문이다.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계획도 세워야 했다. 작가로서의 삶을 받아들이는 시기였다.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가 화두였으며 ‘운명’이라는 주제가 소설에 녹아들었다.  
10여 년이 지났기에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지만 ‘기억’이 10여 년 후에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떠올랐다. 세월이 흐른 후에야 경험과 생각들이 보다 명료하게 드러났다고 그가 말한다. 그 간극이 갖는 의미에 대해 깊이 고민하면서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를 써 내려갔다. 
김운하 작가는 이 책의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도 허구는 허구이되, 많은 부분 에세이 양식과 실제 경험을 뒤섞어 놓은 파편적인 이야기”라고 설명한다. 강렬하게 자리잡은 과거의 한 시기, 제주라는 섬이 경험하게 해 준 햇빛과 바다, 바람, 밤… 문학적 열정에 사로잡힌 영혼이 넘나든 고전의 세계가 이 소설에 파편적으로 뒤섞여 윤슬처럼 반짝이며 일렁인다. 그가 오랜 시간 동안 탐구한 인문학적 세계가 이 소설에 자연스럽게 응축되었다. 제주에 은둔한 추사 김정희도, 처형을 앞두고 《철학의 위안》을 써 내려간 보에티우스도, 그리고 오이디푸스도 ‘인간의 삶’이라는 어쩔 수 없는 운명에 묶여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걸 그의 소설은 보여 준다.  

 

“이 소설은 형식 자체가 독특해요.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일관된 서사 줄거리가 있는 소설과는 다른 파편적인 에피소드들의 모음처럼 보이죠. 예를 들면, 미국의 리차드 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라는 책처럼요. 꽉 짜여 있는 소설은 별로예요. 자유분방하고 실험적인 소설을 더 좋아하고 저한테 맞는 것 같아요.”

 

자유롭게 써 내려간 소설이기에, 거기서 무엇을 읽어 내느냐도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각 에피소드 속에서 자신과 만나는 순간순간으로 채워진 이 소설은 각자 자신의 운명 속에서 자기 자신이 어디쯤, 어떤 지점에 서 있고 내 삶에서 의미 있게 생각하는 건 무엇인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게 해 준다. 
이 소설의 배경은 제주도이다. 제주는 유명한 관광지이지만, 한편으로는 한반도의 좁은 땅덩어리에서 유일하게 은둔과 도피가 가능한, ‘먼 곳’으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제주를 사랑하고, 일상을 떠나 숨을 수 있는 제주가 있어 다행이라고 여긴다. 

 

“이 소설의 주제가 바로 ‘자기 은둔’이에요. 사람들은 타인과 어울려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그와 동시에 사람은 저마다 혼자이고 고독한 존재이죠. 그렇게 부대껴 살다 보면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가 와요. 요즘은 여행을 떠나죠. 진짜 여행은 고독한 여행이에요. 제가 말하는 은둔은, 일상의 현실에서 스스로 벗어나서 고독함 속에서 자기와 대면하고 또 다른 자아를 찾아가는 그런 시간이에요. 
제주는 섬이잖아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고. 대화 상대가 나밖에 없잖아요. 나, 자연, 바다만 있죠. 누구에게나 그런 시간이 필요하고 자기 은둔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찌든 일상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또 인생의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힘을 얻기도 합니다. 누구나 그런 시간을 갖고 싶어 한다고 봐요. 타인의 은둔 일기를 읽으면서 자기 자신의 내면적인 은둔을 꿈꿔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당이 있는 단독 주택에서 세 마리 고양이와 함께 김운하 작가는 책 읽고 글 쓰는 삶을 평화롭게 이어 가고 있다. 지금 데리고 있는 고양이의 증조할머니쯤 되는 고양이와 처음 인연을 맺었고, 4대째 집사로서 충성하고 있다. “다음 생에는 고양이로 태어나고 싶어요.” 하느님이 고양이를 사랑해서 그런지 고양이는 존재 자체로 기쁨과 행복감을 준다.
소설 주인공이 제주로 떠나며 들고 간 책 열 권 중에 추천할 만한 책을 물으니 그는 스피노자를 권했다. 궁극적 인간의 자유로운 삶을 탐구한 스피노자의 철학은 읽는 이에게 힘을 준다.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는 긍정적인 철학이다. 
작가로 살아가기 위해 용기와 운명애가 필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세속적인 것을 버리고 글쓰기를 예술로 추구하겠다는 다짐이 필요한 일이다. 오랜 시간 작가로 살아온 그에게 글쓰기란 무엇일까.

 

“글쓰기는 사고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어떤 책을 읽었어요. 머릿속으로는 책을 다 아는 것 같아요. 하지만 글을 써 보면 알아요.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내 사고가 이 책과 어떻게 깊이 관련을 맺고 있는지. 글을 써야지만 명료하게 내 생각의 핵심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알 수 있죠. 예술 창작에서 글쓰기란 무엇인가는 예술이란 무엇인가와 직접 관련이 되어 있어요. 평생 고민할 문제죠. 글쓰기 자체가 커다란 철학적 주제예요.” 

 

글쓰기 자체가 커다란 철학적 주제라는 말이 인상 깊다. 어쩌면 《월간 토마토》의 존재 이유와도 닿아 있겠다. 대전이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이 세계를 만나고 사유하는 글쓰기의 방식이 《월간 토마토》라는 형태로 10년이 넘게 계속된 셈이다. 김운하 작가의 말을 빌려, ‘토마토의 글쓰기 자체가 커다란 철학적 주제’라고 확장해서 말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김운하 작가는 정말 오랜만에 낸 소설책을 월간토마토에서 내는 것도 운명적인 느낌을 준다고 말한다.

 

“《월간 토마토》에 애정을 가지고 있어요. 10년 넘게 잡지가 나온다는 건 역사적 사건이죠. 오래 묵은 것들이 그만큼 소중하게 생각됩니다. 토마토 잡지가 반세기는 더 계속 나와서 이 잡지와 함께 인생을 건너가면 좋겠어요. 《월간 토마토》 구독자 여러분들도 토마토와 저와 책과의 인연을 떠올리면서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에 관심을 가져 주면 좋겠어요.”

 

책 한 권에 담긴 운명을, 3월 11일에 여러분들도 서점에서 만날 수 있다.

 


글 사진 이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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