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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43호] 당신이 켠 TV는 여전히 잘 나옵니다
당신이 켠 TV는
여전히 잘 나옵니다
이정성 아트마스터 대표
비디오아트의 창시자이며,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예술가라 불리는 백남준. 그의 거대한 텔레비전 탑을 보고 있노라면, 사람들은 이 거대한 탑을 백남준 작가 혼자 쌓았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그 작품들이 만들어지기까지 그의 뒤에는 많은 사람의 노고가 함께했다. 그중에 백남준 작가의 전담 엔지니어로 활동했던 세운상가 장인, 이정성 아트마스터 대표가 있다. <다다익선>을 시작으로 백남준 작가와 인연을 맺은 그는 31년째 백남준 작가와 함께한다. 백남준 작가를 떼어 놓고는 그를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인생의 반은 백남준 작가와 함께였고, 현재도 그 인연은 여전히 그의 원동력이 된다. 이야기를 나누며 이정성 아트마스터는 좋아하는 것에 있어 경계가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여전한 열정과 애정으로 백남준 작가의 작품을 쫓는다. 그가 있는 한 백남준 작가의 텔레비전은 단 한 대도 꺼질 일 없다.
이정성 아트마스터 대표
좋아하는 것을 배운다는 것
엔지니어 인생의 시작은 둘째 형님이 사 온 진공 라디오로부터였다. 그 당시 모든 전자기기는 값비쌌다. 텔레비전에는 자물쇠가 있어 주인 없이는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어려웠다. 처음 가져 보는 진공 라디오는 나에게 신세계였다. 그때 라디오 배터리 가격도 굉장히 비쌌는데, 나는 형님 몰래 밤새도록 라디오를 들으며 배터리를 죄다 써 버렸다. 형님에게 매번 혼이 나면서도 끈질기게 라디오를 들었다. 그때 전자기기에 대한 욕망을 키웠다.
양평에서 나고 자란 나는 상경해 기술을 배워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서울 영등포에 사는 누님만 믿고 서울로 떠났다. 1963년, 을지로 2가에 있는 TV 기술 학원에서 텔레비전과 라디오 이론, 조립 기술을 배웠다.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배우는 과정은 정말 즐거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밤을 새워서라도 해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못 견뎠을 정도였다. 영등포에서 을지로까지 거의 매일같이 걸어 다녔지만, 그 시간도 즐거웠다. 내가 만든 라디오며 전축이 우렁찬 소리를 내며 울려 퍼질 때의 희열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당시에는 세운상가를 짓기 전이라, 천막을 치고 장사하는 전파상에서 직원으로 일했다. 그때는 전자 제품을 고칠 수 있느냐, 또는 라디오와 전축을 직접 만들 수 있느냐에 따라 월급이 달라졌다. 나는 라디오, 전축, TV 할 것 없이 고치는 건 물론 만들 수도 있어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많은 월급을 받았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도 했다. 그러면서도 학습을 멈추지 않았다. 관련 서적 중 일본어로 된 책이 많았던 터라 어려움은 있었지만, 매일 들고 다니며 책이 닳도록 읽었다.
“나는 한 번도 배움을 멈춘 적이 없어. 새로운 것을 습득하는 것에 대한 열망이 있지. 계속해서 도전하지 않으면 젊은 사람과의 소통도 어렵잖아. 무엇보다 즐거워. 배우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 이걸 안 배워.”
이정성 아트마스터 대표의 테이블은 그가 사용하는 장비로 가득하다
TV 500대와 1,003대
백남준 선생님을 만난 건 1986년 서울 국제무역 박람회 때였다. 당시 TV 생산이 많았는데, 그래서 매장 디스플레이 역시 중요하고 경쟁이 심했다. 그때 나는 신성전자라는 작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삼성전자 홍보실에서 우리에게 디스플레이 작업을 부탁했다. 500여 대의 모니터를 쌓아 TV 모니터 벽을 만들었다. 백 선생님은 작품 준비를 위해 한국 엔지니어를 수소문하고 있던 차에 나를 만났다. 선생님은 나를 만나 대뜸 TV 1,000대를 쌓아야 하는데 할 수 있냐 물었고 나는 겁도 없이 바로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당시에 나는 자신 있었다. 걱정도 되었지만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말했다. ‘할 수 있다’라는 답을 들은 백 선생님은 미국으로 돌아갔고, 선생님의 아이디어를 토대로 작품을 만들었다.
“작품 제작 기간이 너무 촉박했어. 한 달 반 정도였지. 그 촉박한 시간 동안 죽을힘을 다해 작품을 만들었어. TV를 쌓고 그 벽 안쪽에 들어가 모니터를 연결했는데, 바깥소리가 제대로 안 들리는 거야. TV가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봐도 어디서 들리는 소리인지 모르니까 틈새로 손을 뻗어 ‘여기요, 여기! 이 모니터 잘 나와요?’ 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어. 그렇게 목이 쉬어라 소리 지르며 작품을 제시간 안에 완성했지.”
TV 1,003대를 쌓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그때는 영상을 각 모니터에 나눠 주는 비디오 분배기(하나의 영상 신호를 여러 대의 영상 장비로 전송하여 보여 주는 장치)가 국내에 없었다. 해외에는 비디오 분배기가 있었지만 6구짜리밖에 없고 가격도 비쌌다. 1,000대가 넘는 TV를 연결하려면 엄청난 돈이 들었다. 그래서 하나의 입력 신호를 22개의 출력 신호로 분배해 주는 비디오 출력기를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그렇게 고생했지만, 전시 당일 전원을 켜자 아무 문제 없이 1,003대 전체에 영상이 들어오던 순간은 그 고생을 잊게 했다. 그 작품이 바로 <다다익선>이다.
척하면 척
<다다익선>을 성공적으로 만든 후, 백남준 선생님은 나에게 줄곧 작업을 맡겼다. 밤낮 할 것 없이 선생님에게 전화가 오면 나는 채비를 했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던 시대에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낯선 나라를 수도 없이 갔다. 한국에 돌아와 바로 다음 날 다시 떠나기도 했다. 공항 직원이 대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냐고 물을 정도였다. 항상 가방에 부품을 가득 넣고 다녀, 가방이 망가져 몇 번이고 새로 사야 했다. 그 가방 가득 들어 있는 부품만큼이나 나의 열정도 가득 차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선생님의 일을 돕기란 쉽지 않았다. 낯선 길을 익히기 위해 골목을 돌아다니며 ‘탐험’을 했다. 말 그대로 ‘탐험’이었다.
처음 해외 작업에 나설 때는 선생님이 붙여 준 유학생이 나의 입이 되어 주었다. 그러고 다음에 스위스에 다녀올 일이 생겼는데, 선생님은 ‘너 혼자 할 수 있지?’라고 말했다. 통역사를 붙여 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도착해 보니 통역사는 없었다. 큰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작품을 무사히 완성했다. 그 이후로 통역사 없이 해외를 돌아다녔다. 영어를 배울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백 선생님은 시도 때도 없이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그것들을 냅킨, 담배종이 가릴 것 없이 주변에 보이는 아무 종이에 휘갈겼다. 어느 누구도 알아볼 수 없는 내용이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선생님과 식사를 할 때면 항상 작품 구상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선생님이 하는 이야기를 늘 수첩에 적어 기억했다. 선생님이 갑작스레 전화해 ‘우리 전에 어디에서 얘기했던 그거 있지? 그거 해 보자’ 이야기하면, 나는 금방 알아듣고 ‘그거요? 예, 알겠어요’ 하고 대답했다. 남들은 몰라도 오랜 시간 함께 일해 온 우리는 알 수 있는 이야기였다.
백남준 작가와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그때를 회상하고 있다
분명한 나의 몫
“종종 사람들이 물어봐. 명성은 작가가 다 가져가는데, 그럼 너는 얻는 게 뭐냐고. 그런데 애초에 얻을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해. 나는 그저 즐거우면 된 거거든. 전시를 할 때면 선생님 작품 보려고 사람이 엄청 많이 온단 말이야. 그럼 통로가 사람으로 꽉 막힐 때도 있어. 그걸 보면 나는 뿌듯하지. 선생님이 만든 작품이, 옆에서 내가 도운 작품이 사람들한테 엄청난 사랑을 받는 거잖아. 난 그거면 돼.”
내가 비디오 아트를 한다는 건 꿈에도 생각 못 한 일이다. 그저 만드는 일이 즐겁고, 밥벌이였을 뿐이다. 그런 내가 선생님을 따라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보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이었다. 많은 경험을 했고, 선생님 작업을 도우며 여행도 즐겼으니 그거면 됐다.
백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고, 나의 일은 선생님의 작품을 쫓는 일이다. 세계 곳곳에 있는 작품을 유지 보수한다. 선생님은 살아생전에 나에게 <다다익선>의 수리와 교체 등에 관해 모든 권한을 일임한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건넸다. 그 안에는 지금의 부품이 없으면 그 시대의 것으로 바꾸라는 이야기도 담겨 있다.
“선생님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모니터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영상이야. 나는 선생님이 비디오에 열정을 다 바친 걸 잘 아니까,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가 중요하다는 걸 아는 거지. 생전에 함께 작업할 때도 선생님은 비디오만 잘 나오면 상관없다고 하셨어. 모니터가 약간 튀어나와 형태에 왜곡이 있어도 선생님은 개의치 않았다고. 그런데 사람들은 겉모습을 더 신경 써. 그게 아닌데. 그러면 속상한 마음이 크지.”
선생님의 작품을 따라 세계 곳곳을 다닌다. 선생님과 작업하던 그때처럼. 힘닿는 데까지 계속해서 선생님의 작품을 유지하는 것.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선생님 작품을 유지 보수하고 컨디션을 기록해, 후대에도 선생님의 작품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것은 나의 몫이다.
글 이주연 사진 이주연, 이정성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