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42호]흐린 날, 장에서 놀다

흐린 날,

장에서 놀다

판교 오일장

 


왁자지껄한 장터를 만나리라 기대했다. 충청남도 3대 우시장이라 불린 판교 우시장이며, 세모시장이 열렸다는 판교 오일장. 예전 같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시골 장터만의 정겹고도 활기 넘치는 분위기를 만날 줄 알았다. 하지만 드문드문 전이 펼쳐진 공터는 휑했고 장을 보러온 사람은 겨우 서넛 눈에 띌 뿐이었다. 

 

 

 

 

오전 11시를 조금 넘긴 시간, 날이 흐리다. 서천군 판교면 현암리의 낡은 건물이 늘어선 거리를 지나 판교 오일장이 서는 장터를 찾아갔다. 장터 입구에 장미사진관이라 불리는 일본식가옥이 남아 있었다. 해방 이후 이 건물은 장이 열리기 전 숙소 역할을 했다고 한다. 소가 1천여 마리 묶여 있던 우시장이 번성하던 그 시절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장미사진관은 판교 오일장의 흥망성쇠를 다 지켜보았다. 아직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판교 오일장은 오늘도 어김없이 장미사진관 앞 공터에 펼쳐진다. 
어둑한 하늘 아래 펼쳐진 판교 오일장의 풍경은 한없이 쓸쓸했다. 천막 아래 펼쳐진 너덧 개의 어물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장터 한쪽에 자리한 장옥 주변으로 옷과 과일, 건어물 등을 늘어놓은 트럭 두어 대가 보였고, 옛 우시장 풍경을 그려 둔 담장 앞에 예닐곱 명쯤 되는 아주머니들이 직접 기르거나 채취한 농산물을 들고 나와 팔았다. 그리 넓어 보이지도 않는 공터가 휑하게 넓어 보일 정도로 장사꾼도 별로 없고, 장을 보러 나온 이들도 별로 없었다. 공터 중앙 뻥튀기 트럭에서 풍기는 고소한 냄새가 적막한 공기를 달래 주고 있을 뿐이었다.
1930년 장항선 판교역이 개통된 이래 번성했던 판교장이지만 1980년 우시장이 사라지고 자연스레 그 규모가 줄어들었을 터였다. 장터를 지키고 있는 어르신들의 기억 속에만 그 번성하던 시절이 남아 있을 뿐, 지금의 판교 오일장은 그 북적이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한 어르신에게 옛 판교장 이야기를 물었다. 백윤구(75세) 씨는 창고를 하나 두고 제일잡곡상회을 운영했다. 이곳에서 잡곡을 사서 도시에 내다 파는 것이 그의 일이다.
“(사람을) 잃어버리면 못 찾았어요. 찾질 못했어. 그 정도로 많았어. 지금은(장에 온 사람) 숫자를 세려고 해도 세겠네.”
우시장이 서던 시절 판교 오일장의 모습을 떠올리며 백윤구 씨는 말한다. 그는 열네 살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아이스케키 장사부터 시작해서, 잡화를 팔았다. 지금은 장에 나온 시골 농부들의 잡곡을 조금씩 산다. 들고 나온 잡곡을 판 이들은 장에서 그 돈으로 생선도 사고 옷도 사간다. 그게 이 오일장의 재미다. 
문산면 문장리에 살았던 그는 새벽 밥 먹고 자전거를 타고 짐을 지고 와서 어둡도록 잡화를 팔았다. 그때는 사람이 많아 제법 벌이가 괜찮았다. 그렇게 해서 큰딸, 큰아들, 작은아들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 다 보냈다. 그는 오늘은 판교장, 내일은 한산장, 모레는 서천장, 또 그다음에는 장항장에 간다. 이렇게 돌아가며 장을 다니는데, 오전 일찍 나와서 점심쯤이면 집으로 간다.
“중학교를 못 갔어. 먹고 살려고 아이스케키 장사를 시작했지. 애들 가르치고 집 사고 논 사고, 열심히 살아서 자식들은 편키 살지. 큰 아들은 사업하고.”
백윤구 씨는 자식 자랑에 신이 났다. 그만큼 자랑할 것이 많은 자식들이다. 부지런히 살아, 이만큼 자식 농사를 잘 지어서인지 그의 표정은 여유롭다. 그는 의자에 앉으며 담배를 빼물었다. 오래된 저울 앞에 말린 대추를 넣은 망태기, 잡곡이 담긴 자루가 그 앞에 놓였다. 오늘 산 물건인 모양이었다. 그 물건을 판 이들은 이 장터에서 무엇을 사갔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장을 둘러보다가 옛 우시장 벽화가 있는 담장 앞쪽으로 갔다. 분홍색 모자, 분홍색 잠바, 분홍색 스웨터를 입은 고운 할머니 한 분이 콩이며, 검은 깨며, 달래며, 딱 한 봉지씩만 종류도 다양하게 갖다 놓고 앉았다. 보자기만 한 전에는 없는 것이 없다. 하얗고 더덕 비슷한 것이 있어 무엇이냐 물으니, 노란 당근이라고 한다. 다 농사지어 온 거다. 혼자 다 짓느냐고 하니 셋이라고 한다. 

 

모시를 짜서 우시장에 팔기도 했다는 할머니의 전. 직접 수확해 들고 온 잡곡이며 농산물들이 소박하다

 
“시어머니, 남편, 나.”
시집온 지 45년, 올해 71살이라는 할머니는 지금도 시어머님과 함께 산다. 서천군 마산면에서 왔다는 할머니는 다른 장은 안 가고 여기만 온단다. 이 동네 산다는 아주머니 두 분이 와서 한 봉지에 5천 원 하는 엿질금 두 봉지를 사 갔다. 
할머니는 모시를 짜서 자식을 다 키웠다. 장에 모시를 짜서 나오면 사람들이 마중을 나올 정도였다. 모시가 그만큼 유명했다. 
“글 쓸 줄 알았으면 책 꽤나 낼 만해. 딸이 그래. 엄마 복 하나는 악착같이 타고 났어. 일복은 타고 났어, 그래.”
북적북적하던 옛 판교 우시장에서 할머니는 모시를 짜서 팔았다. 한 필에 10만 원 정도 받았다.
“그때는 돈이 마뎠으니까.”
요즘처럼 돈이 헤픈 시절이 아니었으니, 그 당시 모시를 짜서 판 돈은 그래도 살림을 하기에 괜찮았던 모양이다. 직접 마를 키워서 짜기도 하고, 다른 데서 구해서 짜기도 했단다. 얼마나 많은 시간 베틀 앞에 앉아 있었을까, 오죽하면 딸이 엄마에게 일복을 타고 났다 했을까, 싶다. 할머니는 사진 찍자는 말에, 잡지에 이야기를 싣는다는 말에 가만히 입을 다문다. 책도 낼 만하다는 그 이야기가 궁금했지만, 좌판만 찍었다. 곱게 다듬어 놓은 달래 한 줌을 샀다. 노지에 이제 막 올라왔을 달래가 싱그럽다. 할머니의 청춘도 달래처럼 싱그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절 그녀의 청춘을 짜서 만든 모시는 새벽 장터에서 제값을 주고 팔렸을 것 같다. 사람으로 발 디딜 틈 없는 장을 그녀는 어떤 모습으로 오갔을까. 서둘러 모시를 팔고 집으로 돌아가 아침밥을 했을까. 지금도 그때의 그 습관대로 그녀는 오일장에 자신이 가꾼 것들을 들고 나온다. 그 큰 시장이 이렇게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었음에도 그녀의 일과는 변함이 없다. 물론 이제는 모시를 짜지도, 팔지도 않는다.   
담장을 등지고 앉은 아주머니들 가운데서 꼭 자매처럼 나란히 앉은 두 분에게 다가갔다. 한 분은 보령에서 왔고, 한 분은 부여에서 왔다. 우슬초며, 느릅나무 등 파는 물건도 비슷한데 두 분이 나란히 앉아 장사를 같이했다. 두 분 중에 연배가 있어 보이는 분이 부여에서 온 도순예 씨였다.    
“우리 딸이 그래. 독해서 도 씨라고.”
86세라는 나이에도 정정한 그녀는 아들이 태워 주면 이렇게 장에 나와서 논다.
“부여에 살아. 이렇게 나와서 얘기하고 얼굴 보고, 재미있어.”
도순예 씨는 담배를 멋들어지게 피운다. 말씀도 잘하고 웃기도 잘하는 할머니를 뵈니, 담배가 몸에 안 좋다는 말도 다 헛것 같다. 할머니는 횟배 앓는 데 좋다고 해서 14살부터 담배를 태웠다. 
할머니는 젊은 시절, 장항서 배를 타고 군산을 오가며 생선을 가져와 장을 다니며 팔았다. 기차 삯이 백 원도 안 되던 장항선 완행열차를 타고 다녔다. 기차를 타고 장사를 다니던 아주머니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아 아련해졌다.
“내일도 장에 나가실 거예요?”
“내일은 집에서 놀아야지.”
열두 시쯤 되자 젊은 상인 몇몇은 벌써 벌려 놓은 것들을 주섬주섬 정리한다. 마음이 급해져 어물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위에 파란 천막을 치고 그나마 장 같은 모습으로 장사하고 있었지만, 이곳도 사람 없기는 매한가지다. 아주머니 서넛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그들 너머로 맨 구석에 앉아 모닥불을 쬐고 있는 할머니 한 분이 보였다. 윤길상 씨는 태어난 곳도 이곳, 결혼해 살림을 꾸린 곳도 바로 이곳 현암리다. 그렇게 한평생을 이곳에서 살아왔지만, 남은 건 윤길상 씨 한 명뿐이다.
“내 친정이 여긴디 친정은 서울로 이사 가뿔고, 애들도 다 키워서 도시로 내보냈지. 다 떠나고 나만 남은 겨.”
다들 집에 가는데 안 가시냐 물으니 판교장에서 몇 걸음 걸으면 지척에 집이 있다고 말한다. 가면 금방이라고, 어차피 집에 가 봤자 심심하니 그냥 조금 더 앉아 있다가 가겠다고 말하며 꼬챙이로 애꿎은 모닥불만 쑤셨다. 연신 날 추우니 어서 집에 가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아휴 날 추운데, 여긴 뭐 볼 거 있다고 왔어. 추운디 언능 집이나 가. 뭐더러 와서 고생하셔.”

 

그냥 나와 노는 거지. 왼쪽 도순예 씨, 오른쪽 성경숙 씨

  

할머니들에게 인사를 하고 점심을 먹고 다시 장을 들러 보았다. 점심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장은 벌써 파장 분위기다. 가는 비까지 흩뿌리자 남은 이들도 서둘러 갈 차비를 한다. 오늘은 날이 궂어서 사람들이 더 나서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교 오일장은 예전 같은 흥성거림은 사라진 지 오래이나, 누군가에게는 찬거리를 사는 소박한 일상으로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글 이혜정

사진 콘텐츠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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