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39호] 달력을, 만들어 보세요

달력을,

만들어 보세요

정덕재의 일상르포


남아 있는 나뭇잎이 하나둘 떨어지고 가지가 야위어 가는 11월이 되면 마음속 시계는 급속도로 빨라진다. 일상을 둘러싼 환경이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저무는 한 해를 바라보는 태도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1981년 11월 2일, 한 신문의 사회면에는 새해 달력을 보는 사람의 모습을 담은 사진 한 장이 실려 있다. 표지까지 포함해 7장으로 된 달력이 당시 도매가격으로 6백 원에서 7백 원 사이에 거래됐다. 11월 초에 신문이 달력 소식을 전한 것은 연말연시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지난여름부터 나만의 달력을 만들고 있다. 달력과 다이어리를 겸한 삶의 자잘한 풍속과 우리 사회의 빛과 그림자를 살펴보기 위해서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새해가 되기 전에 다 만들 수 있을지, 아니면 내년까지 이어 가야 할지 아직은 장담할 수 없다. 그동안 정리한 새해 달력의 일부분을 발췌해 소개한다.

 

달력 혹은 일기

1월 1일, 최저임금제 시행 (1988년)
역사상 가장 가난한 왕이 최저임금이라고 말하는 최대출 씨는 새해 첫날에 새 신발을 신는다.
닳아 가는 것은 구두 뒤축만이 아니다. 오랜 노동에 닳아 버린 관절 사이로 바람이 들어온다. 바람 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일이다.

 

1월 3일,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조성기의 <만화경>이 지면에 실림 (1971년)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혼자가 되어 버린 나는 말할 수 없는 외로움과 현기증과 새벽냉기 속에서 무릎을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옆집 수길이네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스마트폰이나 전자시계 알람에 맞춰 일어나는 게 습관이 된 이들이 많다. 아침에 일어나 하루의 시작이 행복한 이가 얼마나 될까.

 

1월 4일, 서울 반도호텔 앞에서 우편배달부가 호텔에 편지를 배달하러 간 사이 오토바이에 실려 있던 연하장 157장이 도난당하는 사건 발생 (1972년)
소설가 이청준은 우편배달부를 꿈꾸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언덕에 앉아 사연 가득한 편지를 읽은 뒤 그 편지를 강물에 띄워 보내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다. 1985년 대전시민회관 별관에서 있었던 강연회에서 그가 한 말이다. 2018년 가을 대전 대흥동의 한 공원에는 느린 우체통이 설치됐다. 느린 우체통은 자신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직접 손 글씨로 작성해 우체통에 넣으면 1년 뒤 배달된다.

 

1월 9일, 텔레비전 드라마 모래시계 첫방송 (1995년)
한 사람을 알고 평생 그 사람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아가씨가 있어서 난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재희 역을 맡은 이정재의 대사 중에서). 누구에게나 가슴 시린 사랑의 추억이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추억은 빛바랜 앨범 속으로 들어가고, 불현듯 그녀와 얽혔던 한 장면이 빛의 속도로 지나가면 가슴은 뛴다. 아 사랑이 살아 있구나.

 

1월 10일, 우리나라 오리고기를 처음으로 일본에 수출하기로 함. 전라도에 있는 한 식품회사가 일본 다이꼬 식품회사로부터 오리고기 1000킬로그램 수출을 의뢰한 신용장을 받음 (1978년)
“앞으로 1년간/ 오리고기를 먹지 않을 것이다/ 고기를 좋아하는 아들이/ 폭탄선언을 한 것은/ 개나리가 학교 담장을 감싸 안은/ 고3의 봄날/ 야간 자습 땡땡이치고/ PC방에 갔다가/ 선생에게 걸려/ 오리걸음 벌을 받고 돌아온 날/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내가 오리고기를 먹으면 아빠 아들이 아니야// 열흘이 지나지 않아/ 훈제오리를 먹고/ 아들이 아닌 행세를 하느라/ 아비를 아비라 하지 않고/ 아저씨라 불렀다”  - 졸시 <봄날의 오리> 일부

 

1월 12일, 서울민사지법에서 아동문학가 이오덕 씨 초청 강연회 열려 (1994년) 
이오덕 선생은 이 자리에서 판결문에 어려운 한자말이나 생경한 일본어투를 써야 권위가 서고 쉬운 우리말을 쓰면 시시해 보인다는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정신의 병폐이자 권위주의라고 지적했다. 우리말 바로쓰기 운동을 열심히 펼쳐 온 이오덕 선생은 1962년부터 세상을 떠난 2003년까지 일기를 썼다. 일기장은 98권에 달했다.

 

1월 22일, 김광석 출생 (1964)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배우 송강호가 묻는다. “근데 광석이는 왜 죽었대?” 죽음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됐다. 이상호 기자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 논란은 법정까지 이어졌다.
“어느 하루 비라도 추억처럼 흩날리는 거리에서 쓸쓸한 사랑되어 고개 숙이면 그대 목소리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너무 아픈 사랑이었기에 부정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에게 사랑은 무엇일까. 떠나간 사랑은 불가역성인가.

 

2월 6일, 잠실단지아파트 기공식 (1975년)  
이 단지는 1만 4천여 세대 규모의 시민아파트로 13평과 15평이 연탄온돌식으로 난방을 했다. 집이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변한 지 오래됐다. 서울에서 집을 살 경우 월급의 전부를 저축했을 때 30년이 걸린다는 통계는 시대의 우울한 그림자다. 

 

2월 28일, 영산강 하구언 준공 (1981년) 
목포와 영암을 잇는 영산강 하구의 물막이 공사가 완공되었다. 하구언은 길이 4,350m, 최대높이 20m의 토석제 방식으로 건설되었으며, 이로 인해 만들어진 영산호는 저수량이 2억 5,000만 톤이다. 

 

4월 14일, 사회정화위원회, 의식개혁 계획 발표 (1982년)
사회정화위원회는 의식개혁 세부추진계획을 발표했는데, ‘밝고 바르게’라는 표어 아래 정직, 질서, 창조, 책임 등 주요 실천요강별 세부계획을 마련했다.
암울한 시기였다. 억압과 공포는 계속됐다. 국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보고 사회정화라는 미명 아래 민주주의 다양성은 실종됐다.

 

6월 16일, 시인 김수영 교통사고로 사망 (1968년)
시인은 책상 달력에 ‘상왕사심(常往死心)’이라는 좌우명을 써 놓았다 한다. 살면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마땅하다. 생성이 있으면 소멸이 있는 법, 삶과 죽음은 한 몸이다.

 

7월 29일, 서울 수은주 35도 대구 37도 기록 (1977년)
2018년 사상 최고 수준의 폭염이 계속됐다. 8월 6일 경북 영덕의 낮 최고기온이 39.9도로 1972년 기상관측 이래 최고 기온을 기록했다.

 

10월 10일, 티메리 파코, 《지붕 우주의 문턱》 초판 1쇄 인쇄일 (2014년)
작가는 “지붕은 방어의 기능을 가진 폐쇄성과 소통의 기능인 개방성을 가진 모순된 속성이 있다”고 말한다. 책 말미에선 각자의 지붕을 찾아보라고 권유한다. 내 인생의 지붕은 어디에 있는가?

 

11월 12일, 국회 질의 과정에서 사투리 쓰는 교사들 조사 요구 (1971년)
모윤숙 공화당 의원은 교사들의 얘기가 아이들에게 전달될 때 표준말이어야 하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당시 교육감도 브리핑 과정에서 예산을 여산이라고 썼다고 지적했다.
모윤숙은 시인이다. “시몬! 이렇게 밤이 깊었는데 나는 홀로 작은 책상을 마주앉아 밤을 새웁니다” 아름다운 시를 썼던 그녀의 친일 행각과 사투리 운운하는 정치 활동은 헛웃음이 나온다.

  
달력을 만들어 보세요

역사와 사건을 반영하든, 가족사의 성장을 담든 자신의 관점에서 달력을 만들어 보는 것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고, 자신이 걸어가는 의식의 방향을 살펴보는 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달력을 만드는 것은 수시로 생각의 범위를 살펴보기 위해서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상상의 자유를 펼치기 위해서다. 각자가 생각하는 달력 만들기는 고단한 작업일지라도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418년 10월 27일 첫눈이 왔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음력 달력이니 올해로 보면 12월 4일이다. 2018년, 첫눈은 언제쯤 내릴까. 그날을 달력에 담아야겠다. 하얗게.


글 정덕재(시인, 르포작가)

관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