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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39호] 젖은 풀에 가을 햇살 내릴 때 폐사지에 들렀습니다
젖은 풀에 가을 햇살 내릴 때
폐사지에 들렀습니다
보문산 고려시대 문화유산답사
구름 없는 하늘은 높았고 햇살은 따사로웠다. 가끔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은 움츠린 기운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13일 토요일, 황금 같은 주말 아침 고려의 흔적을 찾기 위해, 대전이라는 도시를 알기 위해 기운차게 보문산에 올랐다. 먼 옛날 고려 때의 대전에서 현재를 찾아볼 심산이었다. 그리고 당도한 그날의 날씨는 고려시대 문화유산을 답사하기에 딱 좋은 가을이었다.
고려시대 문화유산들을 만나다
(사)대전문화유산울림은 ‘대전문화유산, 작은 실천 큰 변화’라는 슬로건으로 고려시대 문화유산답사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도심 속에 있는 보문산에 처음 올랐다. 적당히 쌀쌀한 바람에 겉옷을 벗을지 입을지 한참을 고민하다 도로 입었다. 그런 날씨였다.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고 자료를 받았다. 802번 버스 종점인 보문산 공영주차장에서 시작해 을유해방기념비를 보고 보운대, 보문산마애여래좌상, 보문사지를 보는 코스다. 그 후 구완동 청자 가마터와 상감청자 가마터를 보며 휴식을 취하고 여경암, 유회당, 광영정을 둘러본 뒤 투어가 마무리된다. 오전 동안의 투어다. 당일 투어는 일곱 명의 최소 인원으로 진행됐고 인솔자인 이주진 이사의 말소리에 귀 기울이기도, 혹은 다른 데에 집중하기도 하며 도란도란 나아갔다. 최소인원이었기에 예정되지 않은 장소도 볼 수 있었다.
을유해방기념비를 비롯한 여러 기념비들을 둘러봤다. 고려시대 문화유산은 아니지만 보고 갈 가치가 충분했다. 거기 새겨진 시간의 흔적을 좇다 전망대에 올랐고 산 아래 펼쳐진 대전 도심의 모습에 자연스레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보문산의 매력을 느끼기에 그것으로 이미 충분했다. 그러나 볼 것이 많아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고려시대 문화유산의 보문산마애여래좌상은 높이 6미터에 달하는 암벽에 3.2미터의 높이로 부조되어 있었다. 광배 위쪽에 튀어나와 있는 바위는 1년에 5mm씩 더 튀어나오고 있었고, 12년부터 15년까지 3년간 2cm가 튀어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16년 봄에 암벽 위쪽의 큰 나무를 고사시켜 그 움직임을 조금 멈추게 하였다는데, 그 위로 흘러내린 붉은 녹물을 보고 있자니 보존 상태가 걱정이었다.
보문산마애여래좌상
비밀스런 숲속의 공터, 보문사지
폐사지인 보문사지로 향했다. 투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 산책길도, 산길도 아닌 곳으로 걸으며 산행을 하였다. 이리저리 깊게 들어가는데, 풀숲이 우거져 길이 아닌 곳으로 가는 것 같았다. 조금 불안했으나 탐험가가 된 듯 신이 나기도 했다. 줄을 지어 숲길을 헤쳐 나가는데, 마침 새소리가 들려오고 발에 차이는 종아리 조금 넘는 풀들은 솔솔 부는 바람결 따라 나풀거렸다. 해는 높은 데서 우릴 비춰 반겼다. 간간이 보이는 어여쁜 꽃들에 기분이 좋아 그 자연을 느끼기에 여념이 없었다. 물 머금은 흙과 풀에 바짓단이 젖는다. 사방이 다 풀과 나무였는데 저 멀리 문화재라고 세워 놓은 표지판이 보여 신기했다. ‘나 여기 잔존해 있소’ 하는 느낌이랄까.
숲으로 깊게 들어가 끝없이 펼쳐질 것 같던 나무숲에 갑자기 넓게 하늘이 트이면서 보문사지가 자리한다. 꽤 시간을 들여 당도한 공터다. 한때 크게 자리하고 있어 많은 이들이 들렀을 그 장소가 주는 신비함이 퍽 좋았다. 조선말의 기록인 <도산서원지>에 보문사, 동학사, 고산사 등에서 승군 800명을 파견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어 보문사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데, 관리되지 않아 자란 높은 키의 풀들이 전체적인 공간을 확인하는 데 어려움을 줘 아쉬웠다. 제 짝을 잃은 맷돌이 빗물에 쓸려 내려와 박혀 있고, 물 받는 용기로 쓰이던 돌그릇은 땅에 박혀 길이 되었다.
보문사지는 시기념물 제4호로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전 대표 폐사지다. 보문산 정상에서 배나무골로 넘어가는 능선에 있으며, 절터의 범위는 동서 약 70m, 남북 약 50m 정도로 남쪽을 향한 경사면을 계단식으로 만들어 3단을 이루고 있다. 보문사지는 아랫단에 1개소, 중간에 2개소의 건물터가 남아 있으며, 주 건물인 대웅전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가장 윗단이 남아 있다. 아랫단에는 북으로 길이 10여m, 높이 1m에 이르는 축대가 쌓여 있으며, 전면 6칸, 측면 2칸 건물로 추정되는 초석이 남아 있다. 사실상 필자가 정확히 확인할 수 있었던 건 대웅전의 위치와 크기, 괘불지주 정도였다. 괘불지주는 야외법회 때 사용하는 불화인 괘불을 걸어 세우는 기둥을 뜻한다. 그저 그 자리에 박힌 채 고고히 자리하고 있었다.
절이 없는 절터로 가니 그 시간의 흐름과 덧없음이 사뭇 전해 왔으나, 앞서 말한 이유로 아쉬움이 크다. 봄에 풀 정리를 했다고 하는데, 금세 자라난 풀들 사이로 표지판들이 외롭게 서서 그 위치만 간신히 알려주고 있다. 아쉬움과 멋짐 그 사이에서 입맛을 다시며, 대웅전이 있었던 자리와 앞 풀숲을 바라보며 나름의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아름답다. 사실 그 모습 그대로도 아름답다. 고요한 숲속의 공터가 비밀의 장소처럼 그렇게 자리하고 있다.
괘불지주
폐사지를 뒤로하고 이후 일정이 이어졌다. 전체적으로 빠르게 더 많이 볼 수 있었던 일정이었고, 전체적인 대전의 과거를 볼 수 있었다. 유회당에서 듣는 종가의 이야기는 유익했으며, 광영정의 네 개 현판에서는 현인들이 누린 진정한 향유를 엿볼 수 있었다. 지나간 시간의 가치와 생각지 못한 장소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아직 폐사지가 계속해서 내 마음 한켠에 자리 잡아 괜히 마음이 넉넉해진다. 내가 아는 공간이 늘어 느껴지는 넉넉함인 것 같다. 어쨌든 그날 절 없는 절터의 창공은 더없이 높았고, 숲의 하늘이 열리는 순간은 아름다워 머릿속에 박혀 있다. 또 언제, 기회가 되어 폐사지를 들를 수 있을까. 그때 만날 보문사지의 모습은 또 얼마나 빛바래 있을까.
글 김서현
사진 이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