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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39호] 3.4km 월평공원 산책
3.4km
월평공원 산책
문화와 자연, 두 가지 분야에서 이슈가 되는 현장을 한 달에 한 번 같이 걸어 본다. 매력적이다. 대전환경운동연합과 대전문화연대가 함께 기획한 프로그램이다. 10월 21일 첫 번째 프로그램으로 ‘대전의 허파 월평공원’을 진행했다. 두 단체 회원과 월평공원 문제에 관심이 있는 시민이 함께했다.
지금 그대로 좋은
일요일 오전, 풀밭에 맺힌 물방울이 아침볕에 반짝인다. 월평공원의 아름다운 산책로를 걷는 여정이지만 마음이 가볍지는 않다.
월평공원과 갑천은 대전 도심의 생태숲이며 자연하천이다. 위성사진으로 지도를 살펴보면 도심에 둘러싸인 녹색 공간이 섬처럼 떠 있다. 도솔터널, 도안대교, 대규모 아파트단지…. 월평공원이 있는 도솔산과 갑천 일대에 있다는 미호종개, 이삭귀개, 황조롱이 등 멸종위기종과 천연기념물은 과연 아직도 여기에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민간특례개발사업’은 현재 진행 중이다. 월평공원 민간특례사업은 대전 서구 갈마동 일원 115만 6,686㎡ 터 중 85%를 공원으로 조성하고 나머지는 공동주택을 개발하는 사업이다. 강 건너 아파트 건설 터를 둘러싼 펜스가 눈에 들어온다.
연일 아파트 분양, 그리고 호수공원 조성에 대한 기사가 올라온다. 그 기사들에는 새로운 택지 개발로 인한 인기 아파트에 대한 기대감이 가득할 뿐, 이 일대의 환경에 대한 우려는 찾아볼 수가 없다.
월평공원 공론화 시민토론회가 파행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공론화위원회는 시민참여단을 시간과 비용을 문제 삼아 유선전화로만 선정했으며, 무작위 표본 추출 원칙을 지켜야 하는 시민참여단 모집을 SNS로 모집하는 등 상식 밖의 진행으로 절차적 정당성을 잃어버렸다. 월평공원을 둘러싼 일련의 일들이 자꾸만 꼬여 가는 건, 애초에 이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던 탓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점차 그 범위가 좁아지며 가쁜 숨을 내쉬는 월평공원의 모습이 애처롭다. 망가져 가는 자연 앞에서 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무엇을 위해서, 이 아름다운 자연을 훼손하며 아파트를 지으려는 것일까. 시민을 위해 일해야 할 대전시가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꼴이다. 뛰어난 생태적 가치를 지닌 월평공원을 훼손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제방 끝 지점에서 도솔산을 왼쪽에 끼고 가수원교 방향으로 걷는 3.4km 정도가 자연하천이 살아 있는 구간이다. 조금 걸어 들어가자 좀 전까지 포장된 길이 사라지고 흙길이 이어진다. 오른쪽 버드나무가 우거진 자연 그대로의 하천이 맑게 흐르고, 서늘하고 신선한 공기가 코끝에 닿는다. 강에는 흰뺨검둥오리가 무리지어 떠 있다.
길은 울퉁불퉁하다. 물이 고여, 질척거리는 곳도 있고, 자갈이 깔려 발바닥이 아프기도 하다. 강 쪽으로 새파란 풀이 자라 풀밭을 이루고 자연스럽게 자라난 버드나무 군락이 이곳이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곳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데크를 놓거나, 길을 포장하거나, 제방을 쌓지 않았다. 물길이 흐르는 그대로 놓아두었고, 나무와 풀이 자라게 두었다. 그래서 그대로 둔 그만큼 도심보다 몇 도 낮은 서늘하고 맑은 공기가 이곳에 고여 있다.
좋다. 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좋다. 도심 한복판에서 이런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다시금 또 왜라는 질문이 올라온다. 여기에 아파트를 세워서 이득을 얻는 건, 인류가 아니라 극소수의 사람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인류이다. 공기를 마시고, 물을 먹는. 당장에 이 공간이 훼손되는 것이 별것 아닌 듯 여겨질 수 있으나, 과거 사라진 수많은 자연은 이런 방식으로 영영 회복되지 못했다.
3.4km의 자연하천 구간을 지키기 위해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늘이 사라진다. 자연스러운 녹지 공간이 사라지고 마른 흙이 날리는 황량한 길이 드러난다. 뒤돌아보면 가까이 있는 저 짙은 녹색과 그늘이 꿈만 같다. 3.4km, 이 짧은 자연하천 구간을 지키기도 이렇게 버겁다.
대전시는 2020년 7월 1일 일몰제 적용으로 월평공원 공원 지정 효력이 사라져, 땅 소유주들에게 개발 권한이 돌아가면 이 일대가 난개발 될 거라고 말한다. 난개발을 막기 위해 아파트를 짓겠단다. 2020년의 난개발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개발 정책이라 하기에는 몇 천 세대의 아파트 단지 조성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경호 대전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은 공원 지정 효력이 사라진다 해도 대전시의 관리 감독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2020년에 난개발이 일어날 거라는 것도 추상적인 내용일 뿐이다. 그는 민간특례사업이 이 일대 환경을 보존하기 위한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본다. 대규모 개발보다는 개인이 소규모로 개발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
갑천에 남은 3.4km의 자연하천과 그 곁의 도솔산은 ‘월평공원’이라 이름 붙인 자연공간의 마지막 보루이다. 가을날 아침, 그 길을 걸으며 느낀 건 시민의 무력감과 온통 아파트로 아름다운 자연을 지우려는 맹목적인 어리석음이었다.
그 와중에도 갑천은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으니, 이 모습을 몇십 년 후에도 그대로 볼 수 있기를 기대할 뿐이다.
글 사진 이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