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39호] 따뜻 소박한 시골 영화제에서 무지개를 만나다

따뜻 소박한 시골 영화제에서

무지개를 만나다

2018 책영화제 고창

 

 

쌍무지개가 책마을해리에 떠올랐다. 환하게 갰다가 다시금 흩뿌리기 시작한 가는 비에 펼쳐진 장관이다. 서쪽 하늘은 해가 밝게 비치는데, 동쪽의 먹구름이 낀 하늘에는 무지개가 떠올랐다. 어둠과 빛, 그 간극 사이로 선명한 빛깔의 무지개가 생생하다. 찬란한 빛과 빗줄기, 기쁨과 슬픔, 빛과 어둠, 이 우연한 찰나가 보여 주는 삶의 어떤 진실이 짧은 순간 떠올랐다가 분명하게 지워지고 있었다. 쌍무지개가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가장자리부터 지워지기 시작했다. 무지개의 한 조각만이 남더니, 체셔 고양이처럼 공중에 떠 있던 그 일곱 가지 빛깔은 이내 사라졌다. 

 


 

바닷가 책마을공동체 ‘책마을해리’ 
책과 영화를 함께 만나러 〈2018 책영화제 고창〉이 열리고 있는 고창의 책마을해리를 찾았다. 명사십리 바닷가를 지척에 둔 고창군 해리면 월봉마을의 책마을해리는 이미 그 공간 자체로 아름답다. 플라타너스가 늘어선 학교 운동장과 1950년대 지어진 오래된 학교 건물에 마련한 도서관…. 서해의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작은 바닷가 마을인 이곳에 들르면 마음이 절로 부드러워진다. 
책마을해리는 책을 중심으로 한 책마을공동체이다. 이대건 촌장, 이영남 관장은 이곳에서 시인학교, 만화학교 등 마을학교를 열어 어린이, 청소년, 마을 어르신과 함께 배우고 놀이하며 책도 펴내는 책마을공동체를 가꿔 가고 있다. 
책영화제 고창은 책마을해리가 기획한 소박한 영화제다. 올해로 2회째를 맞는 책영화제 고창은 ‘Life-X 어쩌면 우리의 삶은’이라는 주제로 10월 26일부터 28일까지, 2박 3일 동안 여덟 나라, 스물일곱 편의 책과 영화 이야기를 선보였다. 
책마을해리를 2016년 7월에 처음 들른 이후로 몇 번 더 올 기회가 있었다. 작정하고 취재를 온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그동안 책마을해리는 좀 더 단단해졌다. 곳곳에 새롭게 단장된 공간이 보였다. 바다로 가는 책담, 동학평화도서관, 책마을갤러리 등 2016년 처음 방문했을 때와 달리 새롭게 생겨나거나 단장된 공간들이 눈에 띄었다. 특히, 입구에 플라타너스 고목 위에다가 만든 ‘동학평화도서관’은 어린 시절 한 번쯤 상상하던 나무 위의 집을 실현해 놓아 특별했다. 나무 계단을 타고 위로 오르면, 나무 위에 마련된 작은 책 공간에 감탄하게 된다. 사람 허리 굵기의 플라타너스 가지가 책 공간을 가로지르고 있고, 창밖을 내다보면 나무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이 실감난다.  
영화제에 도착한 27일, 하필이면 날이 흐려 간간이 비가 뿌렸다. 하늘은 맑았다가 흐려지기를 반복했고, 부득이 야외에서 진행하기로 했던 영화 상영과 행사들이 취소되거나 실내로 장소를 변경해야만 했다. 고창의 푸른 가을 하늘 아래서, 혹은 별빛 아래서 영화를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책마을해리 운동장 '책뜰'에 마련된 <책과영화 포스터전>

 

책과 영화가 주는 울림
책을 원전으로 하거나, 책을 모티브로 한 영화를 모아서 상영하는 책영화제답게 이번에 방문해서 만난 두 편의 영화는 너무도 유명한 텍스트를 원전으로 삼고 있는 영화였다. 〈일포스티노〉와 〈동주〉였다. 
〈일포스티노〉는 서너 번은 더 본 영화이다. 작년 영화관에서 20주년 기념 리마스터링 작품을 틀어 주는 것도 보았다. 중학교 때 이 영화를 비디오테이프로 빌려 보고 너무나 좋아서, 비디오테이프를 구입했고 좋아하던 친구에게 빌려 주기도 했다. 영화음악도 좋아해, 라디오에서 들려주는 영화음악을 녹음해서 들었다. 이 영화를 보고 영화의 원작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읽었고, 네루다의 시를 접했다. 그러니 흔히들 말하는 ‘인생영화’인 셈이다. 
책숲시간의숲에서 상영 중인 〈일포스티노〉를 거의 영화가 끝나갈 무렵 들어가서 보기 시작했다. 마리오가 죽고, 그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다음 네루다가 홀로 바닷가를 산책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그 표정을 바라보는데 슬픔과 절망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작년에 볼 때는 이탈리아를 떠난 후 마리오에게 소원했던 그가 원망스러웠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네루다를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쩔 수 없는 무력감. 네루다는 시인이자 혁명가였지만 불의에 맞서 죽어간 민중들을 모두 구할 수는 없었다. 그저 애도하고 기억할 뿐. 오래 살아남은 자로서 그는 깊이 절망하고 그들을 사랑했다.
영화가 끝나고 송기역 작가와 함께 영화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는 전태일문학상으로 작가가 되었다. 마리오처럼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존재들에게 다가가는 글을 썼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필명을 ‘기역’으로 지었다는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그는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들이 무엇이었는지 질문하며 대화를 이어 갔다. 아버지의 서글픈 그물소리, 밤하늘의 별이 빛나는 소리를 녹음하는 장면 등 〈일포스티노〉가 사람들의 가슴에 남겨 놓은 장면은 다양했다. 송기역 작가는 마리오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성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고,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민중을 사랑하게 되는 걸 배우게 됩니다.”
〈일포스티노〉의 주인공 마리오는 네루다에게서 ‘메타포’를 배우고, 사랑을 배우고, 그리고 민주주의를 배운다. 책숲시간의숲 도서관 책장을 뒤에 두고, 영화 스크린에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바닷가가 배경으로 펼쳐졌다. 아주 먼 이탈리아의 작은 바닷가 마을의 이야기가 고창의 작은 바닷가 마을로 이어지고 있었다. 
〈동주〉를 이번 영화제에서 처음 보았다. 〈동주〉를 보는 내내 숨을 죽였다. 섬세한 연기와 시가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강성률 교수의 〈동주로 동주를 읽다〉 시간, 그는 “식민지라는 억압적 공간에서 무력적으로 싸우는 방법을 찾는 몽규와 끊임없이 성찰하며 살아가려고 했던 동주는 결국 방법은 다르지만 같은 길로 가려고 했다”고 말했다. 동주는 몽규의 그림자처럼 고요했지만 결코 허약하지 않았다. 그는 강인하게 시로 저항한다. 
〈일포스티노〉와 〈동주〉, 두 작품 모두 ‘시’를 소재 삼아 시대를 넘어선 진실한 울림을 전했다. 소박하고 작은 공간에 많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앉았지만, 한 명 한 명에게 전해지는 영화의 울림은 컸다.

 

플라타너스 위의 동화평화도서관. 제막식에 앞서 풍물마당이 펼쳐졌다

 

마을 잔치 같은 소박한 ‘작당모의’
영화 상영 외에도 작은 행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시인학교, 만화학교 출판기념회’는 지난여름 마을학교에 참여한 학생들이 책을 출간해 마련한 자리였다. 이대건 촌장은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책을 출간한 저자들을 축하했다. 
“지난여름 생각나시나요, 친구들? 여러분들의 흔적이 짧은 영상에도 남지만 책에도 남습니다. 오늘 아침 7시에 이 책을 받았습니다. 책을 처음 펼치며 설렜어요. 여러분과 함께한 여름이 기억나고요. 책의 저자가 되어서, 여름보다 더 어른스러워진 것 같아요.”
아이들 모두 돌아가며 약속한 듯 “재밌었어요”로 끝나는 소감을 말하고, 자신이 쓴 글을 낭송했다. “소나기에는 소가 없고… 방아깨비에는 방아가 없네.” 이호연 학생이 시를 읽자 모두 박수를 쳤다. 웅얼웅얼, 입안으로 수줍게 낭송해도 시는 시. 책을 낸 아이들은 이제 시인이었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학부모들의 눈에 자랑스러움이 어렸다.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을 가지고, 이렇게 출판물로 만날 수 있는 ‘책’을 중심으로 한 마을학교 프로그램들이 모두에게 뜻 깊은 의미라는 걸 보여 주는 출판기념회였다.
그다음 행사는 동학평화도서관 트리하우스 오픈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로 ‘전주국제영화제’를 운영한 경험이 있는 유기상 고창군수와 함께하는 시네토크와 〈바다로 가는 책담길〉 상영이 있었다.
“책마을해리의 실험이 전국적으로 큰 울림이 되고 있습니다. 책도 만들고 인문학 운동도 하고 영화제도 시작하고, 또 내년에는 지역문화를 살리자는 상징적 행사인 한국지역도서전도 개최할 예정입니다. 이런 것들이 고창의 새로운 기운이라고 봅니다.”
유기상 고창군수는 책마을해리가 선보이는 다양한 인문학 운동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며 2019 고창한국지역도서전에 대한 기대를 내비추었다. 
〈바다로 가는 책담길〉 상영에 앞서 이대건 촌장은 영상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8분 정도 되는 영상입니다. 책마을해리 입구에 있는 것이 책담입니다. 그 책담을 중간중간 쌓아 올려서 서해 바다까지 이어 가는 것이 책담입니다. ‘동학’을 테마로 백년의 이야기를 책마을해리에서 시작해 바다까지 이으려 합니다. 동학은 세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시민혁명 중 하나입니다.”
〈바다로 가는 책담길〉은 동학농민혁명을 테마로, 총 열다섯 개 책담을 서해 바다까지 조성하려는 프로젝트를 영상에 담았다. 책담이 놓인 서해로 이어진 길을 3차원 입체 영상으로 구현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부르는 처연한 목소리를 배경으로 찬찬히 공간을 따라 움직이는 영상이 장엄했다.     

 

출판기념회가 끝나고 쉬는 시간 동안 잠깐 밖으로 나갔을 때 쌍무지개를 만났다. 무지개는 빛과 물방울이 만들어 낸 순간의 작품이었다. 영화도 빛의 예술이다. 암전된 공간에 빛을 쏘아 만나는 헛것이 영화이고 보면, 우리가 무지개에서 희망을 발견하듯 영화도 무지개와 비슷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세상에 없는 희망을 그려 보이는 것. 책마을해리의 시도에 늘 응원을 보내고 싶은 것은 이 작은 시골마을에, 작지만 큰 의미로 가득한 일을 ‘작당모의’ 하기 때문이다. 정성스레 고른 책을 원천으로 한 스물일곱 편의 작품이, 이 작은 바닷가마을에 펼쳐진다는 것만으로도 삶에 대해, 지역에 대해,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에 대해 생각하게끔 하기 때문이다. 책과 의미로 이어진 공동체는 점점 단편적이고 파편화되어 가는 사회에서 서로를 잇는 하나의 길이다.

 


글 이혜정

사진 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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