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41호] 이야기가 물든 곳

이야기가 물든 곳

부여 송정그림책마을

 

따뜻한 햇볕이 겨울 추위를 잊게 해 준 날이었다. 새벽까지 내렸던 눈은 어느새 녹아내리고, 오후 햇볕은 그저 따뜻하기만 하다. 부여군 송정그림책마을은 버스가 하루에 한 대만 다니는 시골마을이다. 한때는 80가구 이상 살던 큰 마을이었지만, 현재는 약 30가구 정도가 산다.
마을 입구에 도착해 송정그림책마을찻집으로 향했다. 오후 햇살이 찻집을 가득 채운다. 고요한 찻집에서 들리는 인기척 소리에 주방에 앉아 있던 두 바리스타 할머니가 손님을 반긴다. 
“아이고, 어디서 왔데?”


 

송정그림책마을 그림책 정거장

 

마을에 찾아온 변화 
작고 조용한, 여느 시골마을과 같았던 부여 송정마을은 2010년부터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송정그림책마을이 되기 전에는 부여군 최초의 벽화마을로 송정그림마을이라 불렀다. 2010년 1월부터 8월까지 8개월간 한국전통문화학교 학생들이 마을 곳곳에 벽화를 그렸다. 부여군 최초 벽화마을로 이름을 알린 송정마을은 2015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그림책 읽는 마을 찻집 조성 사업’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송정그림책마을 앞을 지나는 양화북로에 독특한 버스정류장이 있다. 여느 시골 정류장과는 사뭇 다른 모던한 디자인에 내부에는 작은 도서관을 만들었다. 몇 명이나 저곳에 들러 도서관을 이용할지 궁금할 수도 있지만, 그 기능보다는 마을 정체성을 드러내는 작품으로 보였다. 버스정류장 뒤편으로는 커다란 느티나무와 소나무가 자란다. 과거에는 훨씬 더 나무가 많아 여름이면 인근 주민이 더위를 식히기 위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위에서 보면 땅이 보이지 않고 온통 파란 나뭇잎만 보여 마치 용꼬리 같다 하여 ‘청룡’이라 부르던 곳이다.  
송정그림책마을은 여유롭게 산책하며 돌아보기 좋은 소담한 마을이다. 담벼락 곳곳에 그려진 벽화는 지나온 시간만큼 색이 바랬다. 집마다 문패를 대신해 집주인이 그린 그림과 이름을 넣었다. 그림 문패를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이 집에 사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 든다. 다른 시골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마을 곳곳에 그려져 있는 그림 덕분인지 마을을 바라보는 시선이 특별해진다.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보이는 오래된 건물이 야학당이다. 박상신 이장은 이 야학당을 송정그림책마을의 “중심이자 정신”이라고 이야기했다. 광복 전후로 송정마을에 깨어 있는 사람이 모여 야학당을 운영했다. 당시는 초등학교 문턱조차 밟기 어렵던 시절이었다. 매일 밤이면 남포등 하나를 켜고 작은 교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수업을 들었다. 덕분에 마을 사람 중에는 초등학교도 못 나온 사람은 있어도,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 그 야학당에서 주민에게 한글을 가르치지 않았다면, 지금와서 그림책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건 불가능했을 거여. 지금 송정마을을 있도록 만들어 준 공간이니까 우리 마을의 중심이고 정신이라 말할 수 있는 거지.”
주민이 찾아오기 편하도록 마을 한가운데 단층으로 만든 야학당은 어린 시절 공부했던 학교 교실 한 칸을 작게 축소해 만들어 둔 듯하다. 비록 지금은 그 쓰임을 다해 비어 있지만, 야학당은 송정그림책마을을 찾는 이에게 꼭 소개하는 장소이다. 어렵고 힘든 시절, 마을 사람이 모여 함께했던 추억이 서렸다. 송정마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박상신 이장

 

수줍게 써 내려간 이야기 
“객지에서 조그만 사업하면서 살다가 은퇴하고 고향에 내려왔지. 2012년에 내려왔어. 근데 2013년부터 마을 이장을 보라고 해가지고 뭐 어쩔 수 없이 동네일을 봤지. 여기가 경관이 좋잖여. 저수지 있고, 저기 서동요 드라마 세트장 있고. 그래서 부여군 우수마을 선정도 되고, 공공디자인 사업도 선정돼서 마을 돌담을 정비했지. 저기 청룡 정비한 것도 그것이여. 그러고 나서 창조 지역사업으로 찻집 조성하고. 그렇게 2015년부터 네 개 사업을 턱턱 했지. 그림책은 그 창조지역사업으로 컨설팅 회사에서 하자고 해서 한 거고. 처음에는 찻집만 생각했었어.”
송정그림책마을의 박상신 이장은 송정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성인이 되기 전 고향마을을 떠났다가 은퇴 후에 송정마을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편히 쉬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주변 사람들 권유로 이장을 맡았다. 창조지역사업 시작 당시에는 그림책은 생각도 없었다.  
“무슨 농사꾼이 책을 만들어. 책만들기가 보통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
창조지역사업 선정 이후 마을에서 좀 독특하고 다른 사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농촌 지역에 워낙 많은 사업비가 내려왔고 각 마을이 테마로 잡는 것들이 유사하고 비슷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수소문 끝에 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이라는 곳을 찾았고, 그곳과 컨설팅 계약을 체결했다. 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 제안으로 마을에서 그림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책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마을 어르신이 감히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오랜 시간 이어진 대화와 노력 끝에 송정마을 23명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엿한 작가로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그림책을 세상에 내보였다. 
“처음에는 이야기허는 그림책을 많이 갖다 주더라고.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읽어 주려고 했었지. 그런데 그렇게 읽은 이야기 그림책이 우리 이야기를 만드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어. 우리는 뭐 처음에 생각도 못했어. 글 쓰는 것도 쓰는 것이지만, 그림 그리는 게 제일 어려웠지. 그림 그릴 때도 한 4~5개월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단체로 회관에 모여 가지고 그림을 그렸어. 다들 자기는 그림 못 그린다고 챙피하다고 그러고. 밭으로 일 나간다고 도망가 버리면 잡으러 다니고. 처음에는 다들 쑥스러워했어도 실력이 다 비슷하니까 서로한테 위안을 얻기도 하고, 나중에는 실력 늘었다고 칭찬도 해 주고 그랬어. 아마, 혼자 했으면 못했을 거야. 그렇게 주민이 모여서 같이 하니까 할 수 있었던 거지.”
그림책이 나온 이후 총 두 번에 걸쳐 서울에서 ‘원화’ 전시회를 진행했다. 서툰 솜씨로 그린 그림이었지만, 전시회장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는 기분은 남달랐다.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작가 이름을 달고 전시회를 하는 엄마, 아빠, 아내,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러 온 가족들에게도 전혀 새로운 경험이었다. 마을 어르신들은 ‘○○ 엄마’, ‘○○ 아빠’ 대신에 자기 이름을 찾았다. 이제는 어엿한 작가로서 사람들을 만나며, 자신의 이야기를 전한다.  

 

찻집에 오후 햇살이 한가득 쏟아졌다

 

특별하지 않아서 더 특별한 
그림책마을찻집은 현재 마을 할머니들이 돌아가면서 운영 중이다. 할머니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스케줄을 정해 찻집을 맡는다. 이곳의 모든 음료와 요깃거리는 할머니들이 직접 만든 것이다. 식혜부터 미숫가루까지 할머니들 손이 닿지 않은 음식이 없다. 직접 만든 미숫가루와 식혜의 맛은 한번 맛보면 잊기 어렵다.
찻집 중앙에는 송정마을 어르신들이 그린 책들이 놓여 있고 한쪽 벽에는 원화가 걸려 있다. 서툰 솜씨로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그려 나갔다. 그림 하나하나마다 펜 끝에 쏟은 힘이 느껴진다. 빼어나거나 특별하지 않아서 마음에 더 와 닿는다.  
송정그림책마을은 사람은 물론이고 많은 매체가 다녀갔다. 날로 높아지는 마을의 인기를 실감하면서도 아직은 얼떨떨하다. 50명 이상의 단체 손님이 찾아오는 날도 많다. 손님이 찾아오는 날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돌아가면서 직접 책을 읽어 준다. 소담하지만, 진정성 있는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하기에 충분하다.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사인을 요청하는 사람도 많다. 쑥스러워하면서도 할머니, 할아버지는 자신의 이름을 한자 한자 정성스럽게 써 준다. 작가와의 만남 자리에 작가로 당당하게 서는 것이다.
《우리 할머니》를 쓴 김옥이 씨는 어릴 적부터 자신을 돌봐 준 그리운 할머니 이야기를 책에 담았다. 9살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자신을 돌봐 준 할머니가 생각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내가 9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우리 할머니가 그렇게 나한테 잘했어. 아버지 대신에. 내가 할머니를 참 의지하고 살아서 우리 할머니 이야기를 썼지. 내가 열다섯 살에 돌아가셨어.”
지금 할머니에게도 너무나 그리운 할머니가 있었다는 당연한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찻집 주방에 둘러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이어갔다. 자발적으로 마을을 위해 나서는 주민들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활발하게 찻집을 운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찻집을 지키는 마을 할머니들은 마을의 변화에 대해 입을 모아 “좋다”라고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오가며 조용했던 마을은 이전에 없던 활력이 생겨났다. 손님을 맞이하는 마을 어르신들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마을을 찾아오고,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들에게 그저 고마운 마음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점점 인구가 줄고 고령화되는 농촌마을에 다양한 정책자금이 쏟아져 들어간다. 마을 주민을 비롯한 다양한 자원을 소비하고 소진하는 형태의 사업이 즐비하다. 송정그림책마을이 특별했던 건, 프로젝트 중심에 주민이 당당하게 섰다는 사실이었다. 평생 누구 엄마, 누구 아빠로 불리며 노동 현장에 있었던 그들 삶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자존감을 부여했다. 한 인간으로서 충분히 의미 있고 가치 있음을 드러내며 삶을 당당하게 곧추 세웠다. 마을을 찾는 외지인에게 주는 감동의 원천은 바로 그것이었다.
할머니들이 농사짓고 빻아서 물에 타 준 미숫가루 한 잔을 들고 창가 테이블에 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본다. 한가로이 앉아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한참 마을을 둘러보고 다시 마을 입구로 내려왔을 때는 계절 탓인지 해가 뉘엿하게 지기 시작했다. 그날의 마지막 햇살이 넓은 창으로 한가득 쏟아져 들어오고, 노랗게 내리는 노을이 마을에 그대로 물든다.


글 사진 이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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