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39호] 문화예술 창고, 앙트르뽀

문화예술 창고,

앙트르뽀

 

P.

익숙한 공간은 예측 가능하다. 아파트를 떠올렸을 때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가 있다. 한옥이라는 낱말을 들었을 때도, 학교, 공장, 창고…. 모두 마찬가지다. 머릿속에 습관적으로 그려지는 그림이 여지없이 무너졌을 때 묘한 흥분이 인다. 본래 기능을 벗겨 내고 새로운 기능을 부여한 공간은 익숙한 꼴과 예상치 못한 기능이 어울리며 전혀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1.

대전프랑스문화원이 운영하는 복합문화공간 ‘앙트르뽀entrepôt’는 대전천 옆 석교동에 들어섰다. 이 부근에 사는 사람은 ‘계수약국 사거리’라 부르는 곳에서 대전천 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바로 보인다. 완만한 삼각지붕에 통으로 지은 직사각형 공간이 두드러진다. 창고 혹은 공장이 떠오른다.
앙트르뽀가 들어서기 전, 이곳에는 주물 공장, 빨간 다라 만드는 공장, 전구 공장이었다. 지금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공간에도 유사하게 생긴 건물이 한 동 더 있었다. 제조시설을 근린생활시설로 바꾸면서 건물 두 동 중 한 동을 없애 주차장을 만들고 건물 주변에는 화단도 조성했다. 주차장 지면과 닿아 있는 창 높이는 이 공간을 더욱 이국적으로 만든다. 낮게 만든 창의 비밀은 내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널찍한 내부는 카페를 주요 기능으로 하는 복합문화공간이다. 곧고 시원하게 뻗은 공간 끝에는 널찍한 무대를 만들었고 층고가 높은 공간 특징을 그대로 활용해 ㄱ자로 꺾인 복층 도서관을 만들었다. 서가는 벽을 따라 붙여 놓았다. 계단을 따라 오르면 프랑스 관련 서적과 일반서적을 만날 수 있다. 곳곳에 등받이 없는 의자를 두어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출입구 쪽에는 프랑스 만화책이 한가득이다. 원서도 있지만 우리말로 번역한 책도 많다. 복층 아래로 아늑한 공간과 제법 많은 사람이 함께 앉을 수 있는 중앙 홀 공간까지, 신경을 많이 쓴 구성이다.
H빔으로 보강공사를 했지만 오래된 철제 트러스를 그대로 두었다. 새롭게 페인트를 칠한 철제 트러스를 노출시켜 공간 분위기를 묵직하게 붙들며 흥미를 높인다. 지붕을 새롭게 손보면서 채광면을 살려 오후로 넘어가는 햇살이 공간에 스며든다. 따뜻하다.
카페, 도서관, 문화예술 공연을 펼치는 공간이면서 프랑스 관련 미디어 파일을 접할 수 있는 ‘미디어테크’ 구실도 함께 한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10시까지 문을 열어 두니 하루 종일 구석구석 살피며 놀아도 좋겠다. 직접 만든 샌드위치와 쿠키 등과 맛볼 수 있다. 월요일은 휴관이다.

 

2. 

“처음 이곳에 올 때는 동네 주민이 손님으로 많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곳 마을 커뮤니티가 잘 구성되어 있더라고요. 놀랐어요. 그분들이 이 공간에서 이것저것 일을 꾸며요. 저도 지역 화폐 네트워크에도 가입했어요. 그런 일이 즐겁죠. 우리가 뭘 다 하는 것보다 이 공간에서 영감을 얻는 분들이 다양한 활동을 하면 좋잖아요.”


공간을 만들고 운영하는 전창곤 원장 얘기다. 그는 2년 전까지 7년 동안 대흥동에서 프랑스문화원 분원을 운영했다. 커피도 마시고 다양한 프랑스 문화예술을 접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공간이 있던 골목을 “프랑스문화원 골목”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점점 늘어날 때쯤, 세 들어 있던 건물이 매각되면서 공간도 함께 사라졌다. 이후 새롭게 문을 열 곳으로 다양한 곳이 거론되었지만, 그중에 석교동은 없었다. 전 원장에게도 묻는 사람이 많았단다. “왜 하필, 석교동인지….”
이 질문과 의구심은 그 자체로 불편한 불경스러움이다. 변방에 대한 편견과 구별 짓기가 은연 중에 담겼다.
“대전에 오면서 문화의 어떤 전달자로서 역할을 하기로 마음 먹고 왔으니까요. 그러려면 기본적인 공간이 있어야 하고, 그래서 대흥동에서 떠나고 난 후에도 계속 공간을 물색하고 이곳에 이렇게 문을 열게 된 거죠.”
전 원장의 공간 운영 원칙을 들어보면 오히려 석교동은 적절하다. 다양한 마을 공동체 활동과 사업이 벌어지고 주민 여럿이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펼친다. 이런 흐름 안에서 ‘앙트르뽀’는 마을 생태계에 살짝 부족했을 법한 어떤 부분을 채울 수 있다. ‘앙트르뽀’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 작은 공간 하나가 마을 전체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는 기대할 만하다.
“어느 날인가, 나이가 지긋한 분이 오셔서 ‘이곳에 이런 공간을 만들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하더라고요. 정말 진심으로 건네는 인사였어요. 그 인사를 하러 일부러 찾아오신 것 같았는데….”
‘앙트르뽀’가 완결일 수는 없다. 전 원장은 주변에 새로운 콘텐츠를 담은 공간이 하나둘 늘면 또 다른 풍경을 만들어내지 않겠는가, 기대한다. 앞으로도 프랑스의 문화와 예술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계속 진행하겠지만, 공간을 활용해 펼칠 다양한 시도와 실험은 언제든 환영할 생각이다.

 

E.

공장 혹은 창고가 가진 물리적 특징은 층고 높은 직사각형이다. 무엇을 만들어 내기에 최적화된 공간 특성이다. 창의적인 무엇인가가 그 공간에서 펼쳐지는 것이 낯설지 않다.
문닫은 공장이나 창고 단지를 다시 예술 공간으로 재생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석교동 대전천 옆, ‘앙트르뽀’가 마을 풍경에 녹아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지는 않다.
‘앙트르뽀’는 창고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다.


글 사진 이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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