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37호] 내 이름이 꽃씨다

내 이름이 꽃씨다

꼬씨꼬씨



대흥동에 오래된 표구사 건물 사이로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골목 하나가 나 있다. 그 골목 끝에 지난 6월 복합문화공간이 문을 열었다. 마치 옛날 시골 할머니 집처럼 대문이 활짝 열려 있고 딱히 반기는 이도 없다. 조금은 어색하면서도 재밌다. ‘나도 꼬씨다’라는 문장이 방문객을 먼저 반기는 이곳은 복합문화공간 ‘꼬씨꼬씨’다.




꽃이 피는 공간
길가에 빼꼼히 고개를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붙어 있는 작은 간판은 꼬씨꼬씨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린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엔 약간 비좁은 골목을 지나면, 꼬씨꼬씨가 보인다. 활짝 열린 대문 사이로 노래가 흘러나오고 누군가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닿은 소담한 정원이 먼저 반긴다. 
꼬씨꼬씨는 어릴 적 명절 때마다 찾아가던 시골 할머니 집이 떠오르는 작은 주택이다. 한눈에 봐도 최근에 생긴 건물은 아니다. 옛날 주택이 그렇듯 높이 역시 현저히 낮은 탓에 고개를 조금만 들어도 맑은 하늘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늘과 함께 시야를 가로막는 건 주변의 높은 빌딩과 비슷하게 생긴 네모난 시멘트 건물들이다. 우뚝 솟아 있는 건물들은 마치 이 공간을 호위라도 하듯 주변 하늘을 에워싼다.
낮은 지붕 위에 질서 없이 놓인 타이어에는 예쁜 꽃을 그렸다. 지붕 위 타이어는 주변 건물을 도화지인 양 배경으로 삼았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누수로 지붕을 천막으로 덮으면서 놓은 타이어란다. 그냥 덩그러니 타이어만을 놓을 수 없어 타이어에 꽃을 그렸고 그것이 나름의 작품이 되어 공간과 어우러졌다. 
꼬씨꼬씨는 갤러리 파킹을 운영하던 박석신 화가와 정진채밴드의 정진채 씨가 새롭게 문을 연 복합문화공간이다. 박석신 화가는 높은 임대료를 견디지 못하고 갤러리 파킹을 정리한 이후 아쉬움과 속상함이 교차했다. 이내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공간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문화공간이 대흥동에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박석신 화가는 표구사 건물 사이에 숨어 있는 폐가를 발견했다. 이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면 좋겠다는 마음에 만류하는 건물 주인을 설득하고 직접 보수, 공사에 나섰다. 오랫동안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아 절로 음산한 분위기를 내뿜던 폐가는 정성스러운 손길이 모여 꽃씨가 자라나는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처음에는 공간을 내주기 어렵다고 이야기했던 건물 주인을 비롯해 걱정을 하던 주변 상인도 공간이 변하는 모습을 보며, 응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여러 사람의 응원과 도움 속에서 꼬씨꼬씨가 문을 열었다.


공간에서 묻어나는 이야기
꼬씨꼬씨는 갤러리와 커피를 내려주는 주방,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공간으로 나뉘어졌다. 세 공간이 ‘⊃’자 형태로 작은 마당을 바라본다. 마당 곳곳에 놓인 나무 기둥은 왠지 모를 편안함을 안겨 준다.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공간에 앉으면, 창가로 쏟아지는 햇살이 그대로 느껴진다. 일부러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것 같은 회색 벽에는 몇몇 작품이 걸려 있다. 오래된 선반 위에는 물감도 있고 아직 정리하지 않아 접혀 있는 의자도 보인다. 완벽하게 정리하지 않은 느낌이 참 좋다. 그곳에 잠시 앉아 비가 오는 날에 찾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열린 문과 창문 사이로 내리는 빗소리와 함께 책 한 권을 읽으면 더없이 좋은 휴가가 되지 않을까.
박석신 화가가 공간을 새롭게 꾸리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바로 마당이다. 잔디를 깔고, 꽃을 심으면서 이 작은 마당에서 다양하고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길 바랐다. 어느 공간에 앉아 있어도 마당이 쉽게 보인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여름에 듣기 좋은 팝송’ 소리에 맞춰 지붕에 달린 풍경(風警)을 흔들어 본다. 맑은 풍경 소리는 도심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게 만든다.
갤러리에 들어서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붉게 열 오른 얼굴을 식혀 준다. 갤러리 한편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있고 작품들 사이로 작은 나무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다. 천장 나무 기둥에 쓰인 ‘별의 씨앗이 이곳에 떨어져 꽃씨가 되었다’라는 문장이 눈에 띈다. 꼬씨꼬씨를 가장 잘 나타내는 문장이다. 갤러리 안에 있는 피아노부터 의자까지 모두 주변 지인들이 선물해 준 것이다. 여러 사람의 애정으로 만들어져 그런지 사연 없는 물건을 찾기 어렵다. 
요즘 트렌드처럼 화려하고 깔끔한 인테리어는 아니지만, 공간에 세월의 흔적과 사람이 묻어나면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보수가 필요할 이 공간에 어떤 사람들이 다녀가고, 어떤 이야기가 흘러나올지 궁금해진다.


뭐든 재밌는 게 중요하지
“앞으로 이 공간에서 뭘 할지가 중요하지. 이 공간에서 어떤 문화가 자생하느냐가 중요하지 않겠어? 예술의 가치가 삶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게 꿈이었는데 어느 정도 이루고 있어. 공간을 운영하고 드로잉콘서트를 하면서 예술이 내 삶에 얼마나 밀접하게 관계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해. 내가 하는 모든 일의 핵심 원동력은 ‘재미’야. 엄청난 수익이 나는 사업도 아닌데 재미도 없으면 이 일을 어떻게 하겠어. 내가 생각하는 예술이 그래. 내 작품도 그렇고. 재미없으면 못 할 일이지.”
드로잉콘서트 ‘이름꽃씨’ 상설공연을 목적으로 ‘꼬씨꼬씨’라는 이름이 탄생했다. 박석신 화가는 꽃씨는 꽃의 시작이라고 이야기하며, 누구의 이름이든 꽃씨라고 이야기한다.
드로잉 콘서트와 함께 오는 12월, 특별한 전시를 계획하고 있다. 화가의 꿈을 가졌지만, 이루지 못한 열두 명의 엄마가 한자리에 모인다. 미술관 탐방부터 스케치 여행까지 전문가와 청년 봉사자들이 함께할 예정이다. 그림을 대신 그려 주는 것이 아니라 참가자들의 미적 감각을 깨워 주고 작품으로 승화할 수 있도록 컨설팅하는 것이 프로그램의 목적이다. ‘엄마’라는 이름에 가려 정작 자신의 이름은 진즉에 잃어버린 그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기획이다.
이곳에서는 전시는 물론이고 앞으로 다양한 공연도 진행할 예정이다. 사실 오픈 이후 매주 공연을 기획했는데 연일 이어지는 폭염 덕분에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아무래도 마당에서 진행되는 공연이다 보니 날씨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된 나무 의자에 앉아 정진채 씨가 내려준 핸드드립 커피를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박석신 화가의 요청으로 정진채 씨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반주가 시작되면 화가와 가수의 은은한 하모니가 이어진다. 작은 갤러리는 순식간에 무대로 변한다. 박석신 화가가 작사하고 정진채 씨가 작곡한 곡이 이어진다.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과 함께 두 사람의 노랫소리는 어느새 공간의 틈을 가득 메운다.





글 사진  이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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