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35호] 그때는 그렇게 멋있어 보였지

그때는 그렇게 멋있어 보였지

삼복세탁 방정혁 씨




비교적 부모 말을 잘 듣던 시절, 어머니는 종종 세탁소에 다녀오라는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나는 동네를 휘젓고 다니며 동네에서 유일한 세탁소를 오가곤 했다. 매번 세탁소 주인아주머니는 기가 막히게 우리 집 옷을 한 번에 찾아 주셨다. 살던 동네가 재개발되고 우리 집과 덩달아 세탁소도 사라졌다. 유난히 좋아했던 세탁소 냄새도, 정겨웠던 세탁소 풍경도 더 즐길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쉽게 찾아보기 힘든 옛 세탁소 풍경을 발견했다. 젊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대흥동 중심에서 여전히 30년 전과 같은 방식으로 세탁소를 운영하는 방정혁 씨가 궁금해졌다.




비빌 언덕이 있는
대전으로 왔지

삼복세탁 앞을 지나칠 때마다 숨을 깊게 들이쉰다. 다리미가 내뿜는 연기와 휘발유 냄새가 뒤섞인 세탁소 특유의 향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매번 숨을 들이쉬며 세탁소 안을 힐끗 쳐다본다. 그때마다 방정혁 씨는 같은 자리에서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세탁소 안으로 들어가는 두 개의 유리문 사이에 방정혁 씨의 작업대가 놓여 있다. 작업대 위에 놓인 옷은 매번 바뀌지만 옷 위를 미끄러지듯 자연스럽게 누비는 다리미와 다리미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주인 특유의 손길은 언제나 비슷한 템포로흐른다.
69년도쯤, 소년티를 벗은 친구들이 일자리를 찾아 하나둘 도시로 상경하기 시작했다. 전남 고흥의 한적한 마을에서 살던 방정혁 씨도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가기로 결심했다. 친구 대부분이 서울이나 부산으로 떠났지만, 방정혁 씨만은 친척이라는 비빌 언덕이 있는 대전으로 향했다.
19살, 대전에 와 처음으로 잡은 직장은 기름집이었다. 그곳에서 1년 정도 일하던 방정혁 씨는 친척 조카가 일하던 세탁소를 방문하면서 새로운 직업을 꿈꾸게 됐다. 당시 세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깔끔한 와이셔츠에 멋진 넥타이를 매고 일했다. 세련된 차림에 양복을 다리고 옷감을 손질하는 모습이 갓 성인이 된 소년의 눈에 그렇게 멋있어 보였다. 게다가 기름집과 달리 작업장도 깔끔했다. 결국 방종혁 씨는 세탁업을 선택했다.


이제는 다
옛날이지 

세탁업을 시작한 첫 2년 동안은 대동에 있는 친척 조카의 가게에서 일을 배웠다. 기술이 몸에 익자 세탁기사 시험을 봐,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기술자격증을 취득했다. 이후 군대에 다녀와 잠시 1년 정도 기사로 취업해 일을 하다가 스물일곱 살이 되던 해에 지금의 삼복세탁을 인수하며 드디어 자신만의 가게를 가지게 됐다.
“전 주인이 이름을 지어서 삼복이 무슨 뜻인지는 나도 몰라요. (웃음) 예전에는 대흥동에서 세탁소 하는 사람이 더러 있었는데, 지금은 다 못 살고 나갔어요. 왜 나갔는지는 나도 모르죠. 개인 일이니.”
방정혁 씨가 운영하는 삼복세탁은 대흥동 안에서만 자리를 세 번 옮겼다. 처음은 지금 세탁소가 있는 자리 길 건너였고, 그다음은 나사 나이트 바로 옆자리였다. 나사 나이트 바로 옆에서 4년 정도 머물렀던 방정혁 씨는 다시 한번 자리를 옮겨 현재 삼복세탁이 자리한 공간으로 왔다. 몇 미터 되지 않는 거리 주변을 맴돌다 마지막으로 자리 잡은 곳이다.
“지금 볼링장 있는 데가 옛날에는 나사 나이트였어요. 그때 조금 벌었죠. 당시에는 나이트에 공연 온 스타도 더러 손님으로 오고, 도청 있고 하니까 도지사며 별 단 사람들이며 많이 왔어요. 이주일도 오고 그랬죠. 근데 이제는 다 옛날이지 뭐.”


섭섭하긴 해도 어쩔 수 없지

즐거운 일이 있었던 만큼 노동 중에서도 이런 상노동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든 날도 많았다. 체력적으로 많은 힘이 필요했고,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는 게 고될 때도 있었다. 때로는 작은 사고로 손님 옷을 물어 줄 때도 있고,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그냥 미안하다는 말로 손님을 달래는 날도 있었다. 더러 무례한 손님과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더 편한 일을 할까 생각해 본 적도 있지만, 한 번 시작한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모든 일이 다 그렇죠. 좋은 일만 있었겠나요. 그래도 이 일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보면 우리 또래 중에 일하는 사람 별로 없어요. 가끔 공무원 하던 친구들도 놀러 오면 다들 부러워해요.”
방정혁 씨는 “매일 옷이랑 사는 것보다 이젠 어린 손주들을 봐주는 게 더 재밌다”면서도 열심히만 한다면 세탁업도 괜찮은 직업이라 말한다. 그의 말이 마무리 지어질 때쯤 손님 몇몇이 연달아 가게를 드나들었다. 막 머리 손질을 마친 듯한 젊은 남성은 와이셔츠를 맡기며 다림질을 부탁했고, 집에서 막 나온 듯한 젊은 여성은 두꺼운 겨울 스웨터 세탁을 맡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열심히만 한다면 괜찮은 직업’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이해가 갔다.
“그런데 우리는 수선은 안 해요. 예전에는 했는데, 지금은 수선해 달라는 손님 오면 지하상가로 가라고 해요. 거기도 먹고 살아야지. 그래서 지하상가로 보내지.”
먹고 살려고,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세탁업을 시작한 지, 벌써 햇수로 3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강산이 세 번 바뀔 동안 매번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해 온 셈이다. 이제 곧 강산이 한 번 더 변할 순간이 다가온다.
“계획은 앞으로 4~5년 정도만 더 하다가 그만하려고요. 지금이 예순 여덟인데 그쯤 되면 일흔이 넘잖아요. 이제는 쉬면서 살아야지 그때까지 돈 벌라고 해도 힘들어서 못해요. 섭섭하긴 해도 할 수 없죠. 정이 많이 들었어도 그만둘 때 냉정하게 그만둬야지.”




글 사진  오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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