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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35호] 기연미연, 그 사이 갈 곳 잃은 사람들
기연미연,
그 사이 갈 곳 잃은 사람들
손주왕 작가
후배 졸업전시에서 마주친 손주왕 작가의 작품 속에는 큼지막한 정장을 입고 발에 맞지 않는 큰 신발을 신은 어린아이들이 있었다. 머리털도 없이 퉁퉁 부은 눈을 감고 있는 아이들은 아빠 정장을 몰래 입은 듯했다. 마치 엄마 몰래 화장대 앞에 앉아 엄마 화장품을 찍어 바르고, 구두를 신고서는 어른 흉내를 내던 나의 어린 시절 같다. 어른이 되면 무엇이든 다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멋지게 살아갈 것 같았던 나의 어린 날. 과거로 돌아간다면 꼭 말해 주고 싶다. 어른이 되어도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순 없어. 포기해야 할 순간이 늘 따라다니거든.
나의 설화, 나의 중간인 시절
‘기연미연’, ‘기연가미연가’. 손주왕 작가의 작품 제목이다. 이 두 단어 모두,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 분명하지 않은, 모호함을 나타낸다. 중간인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단어가 있을까 싶다.
손 작가는 중간인을 소재로 ‘나의 설화’라는 이야기를 만들기도 했다. 이야기 속 중간인은 매일 죽고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밤이면 죽고, 아침이면 다시 태어난다.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뜨고 잠을 자는 개념과는 조금 다르다. 늘 오늘만 있고, 내일은 없는 삶을 살지만, 같은 풍경도 늘 새로워 모든 것을 특별하게 여겼다. 이들이 사는 마을의 숲은 아름다웠고, 이들이 가장 아끼는 것이다. 어느 날 마을로 몸에 털이 수북한 장사꾼이 찾아와, 마을 사람들에게 영원한 삶과 윤기 나는 털을 가질 수 있는 다색 옷을 판다. 옷값을 대신해 중간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흙과 풀을 조금씩 가져가겠다고 말한다. 마을 사람은 호기심에 소중한 것을 잊은 채, 너도나도 옷을 사기 시작한다. 다색 옷을 구입한 사람들은 이제 하루가 아닌 영원한 삶을 살고 서로를 기억한다. 서로 다른 털 길이로 뜨겁고 따끔거리는 묘한 감정을 느낀다. 경쟁할 이유와 질투의 감정이 생겨난 것이다.
작가가 지어 낸 ‘나의 설화’와 작품을 번갈아 보면, 마치 동화책을 읽는 기분이다. 이야기와 빗대어 본다면 작품 속 울고 있는 중간인은 아마도 다른 중간인의 털이 자신의 털보다 더 길다는 박탈감을 느껴서는 아닐까.
그림 역시 설화에 초점을 맞췄다. 작가는 설화에 걸맞게 오래된 그림의 느낌을 살리려 긴 시간 작업한다. 테이프를 오려 모양을 만들어 붙이고 물감을 뿌리는 등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여러 과정이 섞여 조금 번거로운 작업이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설화적 요소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느꼈다.
“제 작품과 이야기는 실제 경험에서 얻어 온 것이에요. 아직 이룬 것이 많이 없어서인지 제가 원하는 게 현재 상황에 의해 제한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럴 때면 주로 현재 상황부터 처리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제가 원하는 것은 작아져 있었죠. 그때 ‘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생겼죠. 그 고민을 작품과 이야기에 녹여냈어요. ‘설화’라는 말이 판타지적 요소를 담고 있잖아요. 그 판타지적 요소가 현실을 말해주는 장치를 포함하고 있고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며 서 있는 제 모습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나의 설화’라고 이름 붙인 거예요.”
비용을 위한 생활의 소비
손주왕 작가는 올해 막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을 다니며, 아르바이트 대신 조교 일을 하고 있다. 대학을 다닐 당시에는 4년 내내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택배 상하차, 패스트푸드 매장, 고깃집, 미술학원 등 안 해 본 아르바이트가 없다. 그렇게 받은 월급으로 빠듯하게 생활했다. 철저히 생활비에 맞춘 한 달이었다.
“대학 생활 내내 늘 생활비에 맞춰서 며칠을 살아냈어요. ‘살아냈다’라는 의미는 생활의 주체가 내가 아닌, 생활비고, 결국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것이죠. 개개인의 적절한 삶과 안정된 사회를 위한 집단의 약속을 ‘현실’이라고 한다면, 내가 옳다고 생각하거나 꿈꾸는 것은 ‘이상’이에요. 그렇다면 개인의 입장에서 ‘현실’은 수단이고, ‘이상’은 목적인 셈이죠. 하지만 무엇이 수단(현실)이고 목적(이상)이었는지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 삶에서 튕겨져 나가요. 아르바이트하면서 생활하던 그때가 딱 그랬어요. 삶에서 튕겨진 나, 그날의 경험이 지금 작업의 계기가 됐죠.”
목적과 수단을 인식하지 못하는 불균형적 삶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 괴리감을 이기지 못하고 현실과 이상 사이 어딘가에 놓인다. 손주왕 작가는 현실과 이상, 그 사이 어딘가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중간인’이라 칭한다.
“중간인은 현실과 이상 사이, 어디쯤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생활비에 맞춰 살던 생활은 저에게 있어서 ‘생활을 위한 비용의 소비가 아닌, 비용을 위한 생활의 소비’였어요.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에 관한 판단이 흐려졌죠. 당시의 저 역시 중간인이었어요. 지금은 조교 일을 하면서 금전적, 시간적 여유가 생겨 생활이 나아졌지만, 그때는 무엇을 위한 생활인지 확신할 수 없었죠.”
금전적 어려움은 있었지만, 한 번도 자신의 꿈이 헛되고, 불투명하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은 없다.
“그림 그리는 일은 아주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이어 왔던 꿈이었어요. 생활이 어렵다고 해서 그림을 그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그리고 금전적 문제는 특정한 직업을 가진 누군가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 생각에 작가의 가장 큰 고충은 관심이 아닐까 생각해요. 작가는 많은 사람의 관심이 필요한 직업이에요. 금전적 문제가 꿈의 방향을 바꾸는 가장 큰 이유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손주왕 작가의 작품에는 몸에 맞지 않는 품이 큰 옷을 입은 아이들이 나온다. 작가가 말하는 중간인이다.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들은 성장하지 못한 어른의 형상 같다. 사회의 맞춰진 틀 안에서 훌륭한 어른 상에 도달하기 위해 개인적 소망, 욕망을 미뤄 두고 살아가지만, 뭉그러진 소망에 관한 미련을 품은 사람. 어디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해 완전히 자라지도, 여전히 어린이지도 못한 사람들이 바로 중간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