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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34호] 오장환 시인의 생애와 문학세계
오장환 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기고
오장환 시인의 생애와 문학세계
1. 1933년 《조선문학》에 시인으로 등단
2018년에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 문인으로는 소설가인 한무숙(韓戊淑, 1918~1993)·박연희(朴淵禧, 1918~2008)·조흔파(趙欣坡, 1918~1980), 시인인 김경린(金璟麟, 1918~2006)·문익환(文益煥, 1918~1994)·오장환(吳章煥, 1918~1951)·심연수(沈連洙, 1918~1945)·박남수(朴南秀, 1918~1994)·황금찬(黃錦燦, 1918~2017) 등을 들 수가 있다.
2018년 5월 15일은 오장환(吳章煥, 1918~1951) 시인 탄생 100주년이 되는 아주 뜻깊은 날이다. 그는 1918년 5월 15일 충북 보은군 회북면 중앙리 140번지의 해주오씨(海州吳氏) 가문에서 부친인 오학근 씨와 모친인 한학수 여사 사이에서 4남 4녀 중 셋째 아들(서자)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에는 말수가 적고 귀여웠으며 진실했다. 서당교육을 받고 회인보통학교에 입학해 3학년까지 다니다가 안성보통고등학교로 전학해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서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30년에 안성보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하여, 중등학교 속성과를 수료한 뒤 이듬해에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33년에 수업료를 내지 못해 휴학을 하고 있다가 1935년에 자퇴를 하고 말았다. 휴학 중인 1933년 11월 《조선문학》지에 시 〈목욕간〉을 게재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1934년 2월에는 소파 방정환이 발행하던 《어린이》지에 〈바다〉를 비롯한 세 편의 동시를 발표하고 1934년 7월부터는 김기림의 소개로 《조선일보》에 동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여 〈애기꿈〉, 〈소꼽놀이〉, 〈맴맴〉 등 40여 편을 1937년 6월까지 발표했다.
2. 일본에 유학했으나 친일 시 단 한 편도 쓰지 않아
오장환 시인은 도일하여 지산중학교 4학년에 편입해 1936년 3월 수료했다. 그는 일본에서 최하층의 노동생활을 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이념에 동조하는 습작 시를 썼다.
1936년 4월 귀국 후 김달진(金達鎭), 김동리(金東里), 여상현(呂尙玄), 서정주(徐廷柱), 함형수(咸亨洙), 민태규(閔泰奎), 윤곤강(尹昆崗), 이병각(李秉珏), 임화(林和), 이용악(李庸岳) 등과 《시인부락》, 《낭만》 등의 시동인회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면서 본격적인 시작 활동을 전개했다. 1937년에는 이성범(李成範), 이상(李箱), 이육사(李陸史), 박재륜(朴載崙), 김광균(金光均), 신석초(申石艸), 함형수(咸亨洙), 정훈(丁薰), 서정주(徐廷柱), 전형(全馨), 윤곤강(尹崑崗), 김상원(金相瑗), 이병각(李秉珏), 정호승(鄭昊昇), 여상현(呂尙玄), 민태규(閔泰奎), 신백수(申百秀), 유연옥(劉演玉), 이해관(李海寬) 등과 《자오선》 동인으로 참여해 활발한 창작활동을 전개하여 ‘시단의 새로운 왕이 나왔다’는 찬사를 듣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대부분의 문인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조국을 배반하고 노골적으로 친일활동을 했는데, 오장환 시인은 일본 유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친일적인 시를 단 한 편도 쓰지 않았다.
오장환 시인은 1940년 정릉 입구로 이사하여 남만서방이라는 헌책방을 경영하였다. 주로 일본에서 사 온 시집, 화집을 비롯하여 문학과 철학 서적을 팔면서, 그는 거기서 두 번째 시집 《헌사》와 함께 김광균의 《와사등》, 서정주의 《화사집》을 펴낸다. 하지만 장사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고 이봉구, 김광균 등과 어울리면서 자유분방함으로 살다가 결국 건강을 해치게 되었고 병원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3. 해방공간에서 탄압과 테러를 당해 1948년 월북
일본에서 귀국 후 시작 생활에만 전념하던 오장환 시인이 좌익계 문예운동에 가담한 것은 1946년 제1회 전국 문학자 대회에서 조선문학가동맹 서울시지부 사업부위원, 문화대중화 운동의 위원이 되면서부터였다.
오장환 시인은 해방 후 1947년 7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테러가 자행되면서 몸을 심하게 다쳐 1948년 2월경 치료를 위해 시인 임화(林和, 1908~1953)를 따라 월북했으나, 남로당계로 분류되어 숙청되었다.
그는 월북하기 전까지 약 10여 년간 《성벽(城壁)》(풍림사, 1937), 《헌사(獻詞)》(남만서점, 1939), 《병든 서울》(정음사, 1946), 《나 사는 곳》(헌문사, 1947) 등 모두 네 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이외에 수필 일곱 편과 평론 여덟 편, 번역시집 《에세닌 시집》을 1946년에 동향사에서 낸 바 있으며, 1987년에 창작과 비평사에서 《오장환 전집》 전 두 권을 간행하였다.
오장환 시인은 1948년 2월에 테러를 당해 스스로 월북한 후 북한의 남포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지병을 치료하면서 〈모다 바치자〉, 〈김일성(金日成) 모스크바에 오시다〉, 〈씨비리달밤〉 등의 시편과 소련 기행 시집인 《붉은 깃발》을 발간했다.
한국전쟁 중에 서울에 나타났던 그는 1951년 34세의 젊은 나이에 지병인 신장병으로 병사했다.
4. 1988년에 해금되자 재평가
오장환 시인은 월북했다는 이유로 광복 후 40여 년간 논의조차 하지 못하다가 1988년에 해금된 이후에야 전집, 평론, 시집, 연구논문 등이 발간되어 한국 국민들에게 서서히 일려지기 시작했다.
오장환 시인은 청록파 시인인 박두진(朴斗鎭, 1916~1998)
과 함께 안성보통고등학교를 다녔고, 1931년 4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정지용(鄭芝溶, 1902~1950) 시인을 만나 시를 배웠다.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 《휘문》이란 교지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1933년 2월 22일에 발간된 《휘문》 임시호에는 오장환 시인의 첫 시인 〈아침〉과 〈화염〉 두 편이 게재되었다.
민족시인이자 생명 시인인 윤동주(尹東柱, 1917~1945)
는 정지용 시인과 오장환 시인의 시를 읽고 감동을 받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
오장환의 시적 편력은 대체로 네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비록 습작품이기는 하나 초기 작품 〈목욕간〉, 〈캐메라 룸〉, 〈전쟁〉에서 보여 주듯이, 새로운 세계를 동경한 나머지 전통과 낡은 인습을 부정하는 단계, 둘째는 시집 《성벽》, 《헌사》의 시편과 같이 낡은 전통과 인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인 해항지대(海港地帶)를 방랑하고 관능과 퇴폐를 바탕으로 하는 탈향지향(脫鄕志向)의 단계, 셋째는 시집 《헌사》의 시편 일부와 《나 사는 곳》의 시편이 보여 주는 탈향지향에서 귀환하는 귀향의지의 단계, 넷째는 시집 《나 사는 곳》의 시편 일부와 《병든 서울》의 시편들이 보여 주듯이 오장환은 광복 후에 좌우 이념의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면서 좌경 단체에 가담하여 좌경적 이념과 사회주의를 노래한 프롤레타리아 문학 지향의 단계이다.
오장환 시인은 정지용 시인의 제자로 백석, 이용악, 서정주, 유치환 등과 더불어 1930년대 후반 한국을 대표하는 생명파 천재시인으로 한국 아방가르드 시단의 선구자로 꼽히고 있다. 특히 오장환 시인이 서정주, 이용악 시인과 함께 1930년대 한국 시단의 세 천재로 불리게 된 이유는 오장환 시인이 치열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생명파에 속하면서도 생명파와 구분되는 독자성을 보여 주고, 모더니즘 시인에 속하면서도 모더니즘의 한계를 뛰어넘는 시적 성취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오장환 시인은 식민지 현실을 예리한 통찰의 눈으로 짚어 간 진보적 리얼리즘 시인이었다. 그의 시에 나타난 당대 현실에 대한 관심은 대략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대한 반대와 전쟁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고발이다. 두 번째는 봉건적 인습에 대한 비판과 고발이다. 세 번째는 식민지 근대도시에 대한 비판이다. 네 번째는 당대 농촌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이다. 다섯 번째는 해방기의 근대국가에 대한 열망이다.
오장환 시인의 작품세계는 시집에 따라 변모하기도 하지만 변화하지 않는 일관성도 가지고 있다. 그는 어떤 작품이던지 그것이 ‘인간을 위한 문학’이어야 한다는 문학관을 가지고 있었다. 오장환 시인의 ‘인간을 위한 문학’은 반전, 반제국주의, 반봉건의식, 인간존중 사상, 근대도시 비판, 고향과 어머니를 노래한 시, 해방 이후의 리얼리즘 시도 등으로 표현되었다.
오장환 시인의 대표 시로는 〈해바라기〉, 〈바다〉, 〈병든 서울〉, 〈절정의 노래〉, 〈나의 노래〉 등이 있다. 해방의 기쁨을 감격적으로 노래한 〈병든 서울〉은 해방기념조선문학상 최종후보에 올랐고, 시 〈절정의 노래〉는 1947년 중학교 5, 6학년 국어교과서에 실렸다.
눈물은/바닷물처럼/짜구나.// 바다는/누가 울은/눈물인가.
이 서정시는 조선의 한국어 잡지인 《어린이》 1934년 2월호에 실렸던 〈바다〉 전문이다. 〈바다〉는 2연으로 구성된 짧은 서정시이지만 직유법과 과장법으로 일제강점기 우리 한민족의 눈물겨운 설움을 실감나게 잘 표현하여 진한 감동을 안겨 주고 있다.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내 가슴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새로운 묘에는/옛 흙이 향그러//단 한 번/ 나는 울지도 않았다//새야 새 중에도 종다리야/화살같이/날아가거라//나의 슬픔은 오직 님을 향하여
(오장환 시인의 대표시 〈나의 노래〉 부분)
오장환의 대표적인 시들 중 한 편인 〈나의 노래〉는 비참한 현실을 아파하며 희망적인 미래를 갈망하던 오장환 시인의 자전적인 서정시이다.
오장환 시인의 대표적인 평론으로는 〈백석론(白石論)〉(1937), 〈자아의 형벌〉(1948) 등이 있다.
오장환 시인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비운의 한국사 속에서도 항상 어머니와 고향 보은을 그리워하고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아파하며 희망적인 미래를 갈망하던 천재시인이었다.
5. 오장환문학제 개최하고 오장환문학관 개관
보은군은 오장환 시인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06년에 충청북도 보은군 회인면 회인로5길 12에 생가와 문학관을 건립하였고, 1996년부터 해마다 10월 말에 오장환 문학제를 개최하고 있다.
오장환 문학관은 월북시인 문학관으로는 처음으로 2006년 10월에 개관하였다. 오장환 문학관 안에는 휘문고 교지《휘문》에 실린 초기 시, 방정환 선생이 만든 《어린이》지, 《조선일보》 등에 발표한 오장환 시인의 동시, 이육사 시인에게 보낸 친필 엽서, 해방 후 중학교 5, 6학년 교과서에 실린 시 등이 전시되어 있다. 홍보 부족으로 인해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많지 않아 한산하지만, 보은의 문학 지망생에게 문학에 대한 꿈을 심어주는 보은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이다.
울타리에 가려서/아침 햇볕 보이지 않네//해바라기는/해를 보려고/키가 자란다.
가을에 오장환 문학관을 방문하면 오장환 시인의 대표 동시인 〈해바라기〉를 감상하며 만개한 해바라기 꽃을 볼 수 있어 좋다. 그리고 오장환문학제가 개최되어 백일장, 시그림그리기 대회, 시낭송 대회, 오장환 문학상과 오장환 신인문학상 시상식, 문학강연, 오장환 시인 다큐영상 상영 등을 보고 듣고 감상할 수가 있어 좋다.
2018년에 23주년을 맞이하는 오장환문학제는 오장환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출향문인 초청, 오장환 전집 발간 등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어 기대가 크다.
신상구(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