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 134호] 21세기 안나는 어떤 모습일까?
로와의 책탐
21세기 안나는 어떤 모습일까?
소설 <하우스프라우>를 읽고
《안나 카레니나》에 《보바리 부인》과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섞은 작품 - 타임
《하우스프라우》는 위 선전문구 때문에 펼치게 된 책이다. 에로틱한 시로 알려진 미국 시인 질 알렉산더 에스바움의 첫 장편소설. 21세기 안나는 과연 어떤 모습이며 결말은 어떨지 몹시 궁금했다.
독일어로 된 소설 제목은 집(Haus)과 여자(Frau)의 합성어로 기혼여성, 주로 가정주부를 뜻한다. 미국인 안나는 28세에 결혼하여 벌써 9년째 취리히 인근 디틀리콘에 살고 있다. 되돌아보니 어쩌다 태어나, 어쩌다 결혼하고, 어쩌다 어머니가 되어 버린, ‘어쩌다 인생’을 사는 중이다. 확고한 나름의 철학이 없는 한, 사회가 주입한 대로 교육받은 인간은 때가 되면 결혼하고 후대를 생산하기 마련이니까. “안나는 그렇게 어머니가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 안나는 겁이 났다. 내가 다른 인간을 책임져야 해? 작고, 무력하고 필요한 게 많은 인간을? 그래도 안나는 임신했다. 그리고 다시, 그런 후에 또다시.”
어느덧 세 아이 어머니가 된 37세 안나. 돈만 벌어다 주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은행가 남편 브루노, 그녀를 손주 만드는 도구로만 취급하는 시어머니, 알아들을 수 없는 스위스의 독일어 방언 슈비쳐뒤치로 둘러싸인 남편 고향에서 안나는 외롭고, 슬프고, 권태롭다. “난 슈퍼마켓에 살아. (…) 나는 고용된 도우미야. 가사 도우미. (…) 내가 어딘가로 떠나면 사람들이 그리워해 줄까? (…) 여기가 바로 내가 남은 평생을 보낼 곳이야. (…) 여기가 바로 내가 죽게 될 곳이야.”
안나는 브루노의 권유로 정기적인 정신 상담을 받는다. 안나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는 장소지만 그곳에서조차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 첫 번째 애인 스티븐 -2년 전 크리스마스, 길거리에서 부딪히고는 서로 어수룩한 슈비쳐뒤치로 사과하던 그는 안식휴가로 스위스에 온 열화학자였다. 안나에겐 불꽃같던 사랑이지만 스티븐에겐 유희였던 3개월이 지난 후, 뱃속에 남았던 아기가 이제 곧 돌이 되는 셋째다. 외동딸 셋째가 남편 브루노의 유전자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 이것이 안나의 일급비밀이다.
스티븐이 화끈한 해외 정사 기간을 마치고 후련하게 떠난 후, 안나는 독일어 학원에 가는 척하며 애인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애인은 짭짤한 과자나 마찬가지지. 하나 집으면 멈출 수가 없어”라며 애인을 수집한다. 한 명과 섹스 중에 다른 애인으로부터 밀회장소 알림문자를 받아 가며, 하루에 두 명과 섹스할 정도로 바쁘고 열심이어도, 안나는 여전히 슬프고 공허하다.
안나는 섹스를 좋아하면서도 좋아하지 않았다. 필요하면서도 필요하지 않았다. (…) 원해진다는 것에 대한 욕망. 그녀는 누군가에게 원해지고 싶었다.
그녀는 그저 사랑받고 싶고, 원해지고 싶었다. 애인이 보고 싶으니 간다기보다는 애인이 원하니까 간다는 식으로, 그녀는 지극히 수동적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타는 열차 속에서 안나는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승객(passenger). 수동적(passive). 나는 내 삶을 직접 이끄는 기술자가 아니지. 선로 위에서든 아니든. 나는 그렇게 훈련받았어.” 안나 벤츠는 150년 전의 러시아 안나처럼 한 남자를 향한 열정 때문에 가족도 사회도 저버린 게 아니었다. 그저 권태를 잠시 잊기 위한 강력자극제로서의 도피성 섹스라니, 그건 상대에 대한 모욕이자 섹스에 대한 모독이 아닌가. 평생은 불가능하다 해도 만나는 동안만큼은 상대의 유일성을 인정해 줘야만 ‘벗은 몸을 내던져’ ‘만유혼음의 그리움’을 구체화한 몸의 대화로 ‘이 난해한 세계와의 합일’(김훈, 《풍경과 상처》)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연상된다는 장면이 어디인지 부지런히 책장을 넘겨 찾았다. ‘열정이 아니면 기술이라도 있겠지.’
안나는 한 번도 전희에 열광한 적 없었다. (…) 그녀의 욕망은 기본적이었다. 집어넣어, 빼내. 가능한 한 오래 반복해. (…) 얼마나 거칠게 섹스를 했던지 그 후에는 둘 다 걸을 수도 없었다.
안나 벤츠는 나와 성적 취향도 능력치도 매우 달랐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지가 소설에 쓰여 있었더라면 좋았으련만, 그런 건 없었다. 눈앞에 그려질 듯한 상세 묘사도 부족하다. 《그레이…》와의 비교가 무색하게도, 창의적 섹스 방법에 대한 체계적인 탐구도 없었다. 안나와 애인 아치는 오직 대화 속에서만, 말로만 애널 섹스를 한다. 차라리 독자가 기대하지 않게 언급하질 말던가! 수갑, 채찍, 결박, 하다못해 안대 하나 없이 대체 어딜 봐서 《그레이…》에 비견된단 말인가. ‘난 선전 문구에 낚인 거야.’
갑작스런 둘째의 교통사고 사망에 연이어 셋째는 외도로 태어난 자식임이 드러나자, 안나는 쫓겨난다. 운전면허증은커녕 은행 통장조차 없던 그녀는 도저히 자립할 수가 없다. 애인들은 마침 자리에 없었고, 상담의도 외면했다. 하다못해 독일어학원 동료조차도. 그제서야 안나는 헤어진 후 처음, 스티븐에게 전화한다. 그가 받았다. 잠시 당황하던 그는 곧 업무상 동료로부터의 전화라도 되는 듯 능숙히 응대한다. 안나가 잘 지냈느냐며 안부를 묻자 스티븐은 최근 태어난 아이와 부인 모두 건강하다며 쾌활한 어조로 답한다. 미국의 그는 그저 성실한 아빠였다. 셋째 언급 없이 통화를 마친 안나는 핸드폰을 강물에 던져 버린다. 더 이상은 아무 쓸모가 없었으므로. 안나는 기차역으로 향했고, 결국 다가오는 기차에 몸을 던진다. 카레니나 같은 정열 때문이 아니라 오직 수동성 때문에. 작가는 소설 초반부에서 “수동성(passivity)과 정열(passion)의 시작은 비슷하다. 다른 것은 어떻게 끝나는가일 뿐이다”라고 했지만, 소설 내 캐릭터의 끝은 같고, 단지 소설 자체의 수명은 매우 달라지리라 본다.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기를 포기한 사람에게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마 당장의 동물적 쾌락일 거다. 안나는 섹스에 탐닉했지만, 이제는 섹스도, 심지어 먹고 자는 기본 생활조차도 막막해지자 그녀의 선택은 자명했다. 믿기 어려울 지경이다. 21세기에, 여성작가가 그린 ‘21세기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가 고작 이런 모습이라니! 놀라움을 넘어선 충격이다. 기차역이라는 장소나 자살 장면, 주인공 이름 등 다분히 《안나 카레니나》를 염두에 두고 쓴 《하우스프라우》는 《안나 카레니나》의 오마주도, 패러디도 되지 못했다. 대신 “어디 감히 이 따위를 《안나 카레니나》와 비교하려 해?”라는 호통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하우스프라우》는 예술적 에로 소설도 아니고, 우울증에 빠진 현대여성의 현실과 원인을 그려낸 리얼리즘 문학도 아니며, 은근하게 페미니즘 관점을 드러내는 철학소설은 더더욱 아니다. 어떤 면으로도 함량 미달이다. 희미한 주제의식, 어중간한 정사 장면,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페미니즘적 고찰. 주인공 이름은 안나가 아니라 ‘엠마’ 벤츠가 더 어울렸다!
만약 ‘엠마’ 벤츠가 다가오는 기차에 몸을 던지는 대신 그 기차를 타고 떠났더라면,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그레고리우스처럼 늦었더라도 자기 삶의 주인이길 선택했더라면, 수동성 따위 핸드폰에 가둬 강물에 던져 버린 후 능동적으로 홀로서기를 시작했더라면, 그랬더라면 나는 기꺼이 그녀를 ‘안나’ 벤츠라 부르며 ‘21세기 안나’라는 표현에도 수긍했으리라. 혹시 또 아는가. 기차 속에서 그녀가 또 다른 ‘안나’를 만나 서로 힘이 되고 발전하는 ‘21세기 안나 커플’이 탄생할지.
책 뒤표지 선전 문구를 난 이렇게 고치고 싶다.
《안나 카레니나》 주인공과 이름이 같지만 《보바리 부인》의 엠마 보바리보다 더 주관 없는 여주인공이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말로만 흉내 내다 결국 자살로 마감하는, 애매한 소설. (주의: 읽고 나면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싶은 마음이 매우 강렬해지는 부작용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