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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34호] 녹음 짙은 아름다운 마을이 건조함에 버석거린다
녹음 짙은 아름다운 마을이 건조함에 버석거린다
대전여지도 122 | 대전광역시 유성구 구암6통 창말
1.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마을은 박산 자락에 의지했다. 박산은 해발 200m 남짓한 야트막한 야산이다. 이곳이 박산인 이유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어사 박문수 조상 묘가 이곳에 있어 박산이라고도 하고 고령 박씨 문중 소유 산이라서 박산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한밭대학교와 유성CC, 32호 국도와 1호 국도 등 인간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인공구조물을 걷어 내면 계룡산부터 흘러내린 산줄기가 곳곳에 봉우리를 만들고 이즈음에 박산 봉우리도 만들었음을 쉬 짐작할 수 있다.
유성대로를 따라가다 구암동으로 방향을 틀면 호남고속도로 아래를 통과해 마을로 들어설 수 있다.
“옛날에는 과수원도 많이 하고 벼농사도 많이 짓던 마을이지. 유성배 유명하잖아. 호남고속도로하고 50m도로(유성대로)가 나면서 마을이 갈라져서 그렇지 옛날에는 정말 큰 마을이었어. 마을도 시끌벅적하고 행사 있으면 함께 어울려 놀던 마을이었어. 지금은 밖에서 들어온 사람이 많지만.”
아래뜸 초입에서 만난 한 주민 얘기다. 사람 만나기 어려웠던 마을에서 발길을 돌릴 때쯤 만난 반가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낯선 이에게 경계를 좀처럼 풀지 않았다. 이제 논농사를 지어서는 타산이 맞지 않아 매실나무를 심고 돌보다 들어오는 길이라고 했다. 젊었을 때 주로 타지에 살다 다시 나고 자란 고향에 돌아왔지만 이제는 마을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먼저 집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온 아주머니는 명함을 받아 들고서야 조금 안심하는 듯했지만 정체 분명치 않은 낯선 이가 역시 편하지 않은 눈치다.
대전광역시 구암 6통에 속하는 ‘창말’은 둘로 나뉘었다. 남서쪽으로는 우뜸, 북동쪽으로는 아래뜸이라 불렀다. 대전시립박물관 대전지명 편에는 아래뜸 대신 ‘동촌’이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아래뜸이든 동촌이든 지금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아래뜸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마을 중심부에 다다를 수 있다. 한눈에 보아도 마을회관으로 보이는 건물과 제법 너른 광장이 있다. 광장 한쪽에는 쓰레기 분리수거를 할 수 있는 공간을 설치했고 쓰레기차가 들어와 한참 쓰레기를 옮겨 싣고 있었다. 그곳에 가까이 다가가자 쓰레기를 무단투기하면 촬영해서 과태료를 부과하겠다는 위협적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주억거리며 고개를 들어보니 감시카메라와 함께 소형 스피커가 눈에 들어온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일상적 감시를 당하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온통 푸른빛이 가득한 시골마을에서 이런 위협을 당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접근하는 모든 이를 잠재적 무단투기자로 설정하고 위협하는 것이 영 마뜩잖다. 마을 풍경과 현실이 너무 이율배반적으로 느껴졌다. 감시 카메라가 미치지 못할 것으로 짐작되는 공간으로 급히 이동했다.
2.
마을회관에는 할아버지방, 할머니방과 함께 그냥 ‘슈퍼’라고 적힌 작은 가게가 있었다. 가게 문은 닫혔다. 가게 문에는 필요한 일이 있으면 전화하라고 친절하게 전화번호를 적어 두었다. POP 글씨로 정성껏 써 붙였는데 기분 탓인지 힘이 없어 보인다. 기척을 하고 할머니방 문을 열었다. 할머니 세 분이 바닥에 길게 누웠다. 모두 잠이 들지는 않은 눈치였다. 부시럭거리며 일어나 앉아 머리 매무새를 만진다.
창말이 고향인 할머니 한 명, 벌곡에서 시집온 할머니 한 명, 신도안에서 시집온 할머니가 또 한 명이었다.
“할아버지방에는 사람이 없어. 아 원래 없어. 다 돌아가셨어. 근데 어디서 왔댜? 여기 뭐 볼 게 있다고. 방송국에서 온 겨?”
질문이 쏟아진다. 바닥에 내려놓은 카메라를 보고 녹음을 하는 중이냐고 묻는다. 할머니는 언젠가 광수사에 갔다가 묻는 말에 대답을 했더니 방송에 나와 여기저기서 전화를 받았단다. 그것과 같은 것이냐고 여러 번 묻는다.
“여기 마을회관도 조금 있으면 뜯긴댜. 넓은 길이 난다는디, 유성중학교 사거리에서 여기 마을을 지나서 저기 축구장 있는 데로 길이 난댜. 거기 마을에 깃발 꽂아 두었잖어. 마을 회의를 해서 여기 뜯기면 마을회관은 다시 안 짓기로 했어. 지어 봐야 뭐, 모일 사람이 있어야지. 이제는 밖에서 들어온 사람이 많아서 여기 올 사람도 없어.”
곧 부숴 버릴 마을회관에 들어앉은 할머니 세 분은 무슨 얘기를 해도 심드렁하기만 했다.
“뭐 예전에 듣기에는 쌈을 할 적에 쓰는 활이나 창 같은 것을 넣어 두었던 창고가 있었다는 겨. 무기 같은 거.”
‘창말’이라는 마을 이름 유래를 묻자 모두 모르겠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광수사에서 엉겁결에 방송출연을 한 적이 있다는 할머니가 성의껏 대답한다. 창말이라는 지명이 아주 낯설지는 않다. 다른 고장에서도 만난 적이 있고, 대부분 할머니 말처럼 정부에서 곡식을 모아 두거나 무기 등을 넣어 두었다는 유래를 가지고 있다. 대전시립박물관 대전지명 편에는 창말은 구암동 굴바위 마을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이곳에 사창이 있어 곡식을 쌓아 둔 창고가 있었다고 기록해 두었다. 무기 대신 곡식이지만 여하튼 창고가 있었던 것은 들어맞았다.
마을에 관해서는, 큰 도로가 난다는 것과 지금 구암역 뒤로 유성버스터미널이 새로 들어서면 아무래도 살기가 좀 나을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대전복합터미널에 가 본 적이 있다는 한 할머니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고 부연설명을 한다. 예전에 농사 많이 짓지 않았냐는 말에 논농사를 좀 지었고 구수막지에 들어가서 밭농사를 지었다는 말도 나왔지만 말이 별로 없던 할머니 한 명이 느닷없이 퉁을 놓는다.
“아니 뭐하러 일을 햐. 뼈 빠지게. 그냥 후비후비해서 먹고 사는 거지. 나는 여자 일하는 거 보면 웃겨. 남자가 돈 많이 벌어다 주면 왜 일을 햐.”
말을 마치며 개구지게 빙그레 웃는 할머니 말이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정말로 일을 안 한 것인지. 아니면 하도 일을 많이 해 한이 맺힌 소리를 쏟아 놓는 것인지. 한참을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그만 일어서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신발을 벗을 때 벗겨졌던 양말을 다시 신었다. 발바닥만 적당히 가리는 양말을 보고는 할머니 한 명이 “세상에 무슨 저런 양말이 다 있느냐?”며 한참을 웃는다.
머쓱해져 일어서는데 책상 위에 올려 둔 시계가 눈에 들어온다. 이미 오후에 들어선 지 한참이 지났는데 시계는 이제 막 10시를 가리킬 참이었다. 시계 바탕 상단에는 국회 마크가 박혀 있고 아래에는 ‘바르고 큰 가슴 국회의원 조영재’라고 적혔다. 후에 찾아보니 유성구에서 1996년부터 2000년까지 15대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이다. 벽걸이 시계 한 개로 마을을 살뜰하게 챙겼다.
3.
마을회관을 빠져나와 마을 고샅길을 거닌다. 그리 복잡하지 않다. 야트막한 박산에서 완만하고 넓게 흘러내린 자락 위에 들어선 마을은 산에서 만날 수 있는 싱그러운 녹음이 가득하다. 골목은 깨끗하고 고요하다. 새로 말끔하게 지은 그럴듯한 주택과 시간이 쌓인 주택이 적당히 섞였다. 그 가운데 인기척을 느낄 수가 없다. 마을 중심을 벗어나 흡사 숲길을 닮은 오솔길을 따라가니 이런저런 농작물을 심어 둔 농장과 만난다. 인기척을 느낀 개 한 마리가 뛰어나와 요란하게 짖으며 위협한다. 좁은 오솔길 한가운데 떡 버티고 선 모습이 흡사 장판교에서 장팔사모를 들고 선 장비만큼이나 두렵다. 저 너머에는 그저 농원이 있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발길을 돌렸다.
골목 구석구석을 돌며 위협적으로 짖어 대는 많은 개와 ‘개 위험’이라는 경고문을 보고 잔뜩 위축되었다. 작은 자동차를 청소하는 주민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했지만 자동차 청소가 끝나는 대로 급하게 나가야 한다면서 주택에서 한참 전지 작업을 벌이는 다른 아저씨를 소개해 준다. 아저씨는 이사 온 지 20여 년밖에 안 되었으니, 통장을 찾아보란다. 축사가 있는 집이니 찾기 어렵지 않을 것이라며 친절하게 설명한다. 통장 집은 비어 있었다. 절망감 비슷한 걸 느꼈다. 초여름 뜨거운 태양 아래, 마을 한가운데 소박하게 놓인 밭을 일구는 사람도 여럿 만났지만 모두 창말 주민이 아니었다. 그리고 찾아 들어간 몇몇 집도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집이었다. 더군다나, 낯선 이와 길게 이야기하는 것이 영 불편한 눈치였다.
“이사 온 지도 얼마 안 되었고요. 잘 몰라요. 왕래가 별로 없어요. 옆집 아저씨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는데요.”
박산에서 이어 내려온 푸르름에 가득 물든 아름다운 마을이 갑자기 사막으로 변해 버린 것마냥 가슴이 먹먹했다. 길을 잃었다.
창끝처럼 마을을 관통하는 이런저런 도로가 창말을 갈기갈기 찢었다. 그를 아쉬워하거나 안타까워할 사람도 남지 않은 푸르른 마을엔 그래서 쓸쓸함이 더하다.
발길을 돌려 마을에서 나오는 길에 써레질을 끝낸 논을 유유히 노닐며 먹잇감을 고르는 오리 몇 마리가 눈에 띄었다. 언제까지 창말에서 먹잇감을 구하며 유유자적할 수 있을지는 녀석들도 모를 일이다.
그곳 전봇대에는 붉은색 고딕체 글씨로 ‘땅’이라고 적어 두고 토지와 주택 등 매물을 구한다는 광고지가 붙어 있다. 그 광고지에 검은색 글씨로 ‘절대비밀 보장’이라는 문구는 왜 붙어 있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입안에 모래가 한 움큼이다. 해감 덜한 조개를 먹은 것처럼 입안이 버석거렸다.
글 사진 이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