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35호] 어떤, 새벽을 보다

어떤 새벽을 보다

오승훈 작가

 

 

 

 

 사람이 새벽을 보러 다녔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처 만나지 못한 새벽 시간 마주친 공간의 느낌을 그림에 담는다. 어슴푸레 밝아 오는 빛 속에 평범한 도심의 풍경이 새로운 호흡으로 떠오른다. 환한 대낮과 흥청거리는 불빛 속에서 미처 마주치지 못했던 고요와 적막이 거기 있다. 오승훈 작가가 새벽을 떠돌며 만난 그곳은, 우리가 매일 무심코 지나쳤던 대전의 어느 거리이지만 한 사람의 호흡과 손길로 완전히 새롭게 드러난다.
우리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대전의 새벽이자, 우리가 잃어버린 고독과 침묵의 시간이다.
 

 


 

새벽을 그리는 이유
  오승훈 작가는 광주에서 태어났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대전에 살았다. 대전예고를 다녔고, 목원대 회화과 한국화전공, 그리고 동 대학원의 동양화전공을 졸업했다. 그는 새벽을 그린다. 갤러리아, 이안경원, 궁동과 같은 도심지부터, 짐잠향교, 취백정, 궁남지, 장태산 가는 길 등의 한갓진 외곽지까지. 다양한 풍경을 그리지만 이 모두가 새벽 시간대의 푸른빛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같다.
그가 새벽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시기는 군에서 제대하고 복학한 스물세 살부터였다. 바로 그리지는 않고 염두에 두고 있다가 대학원 들어갈 스물여섯 즈음부터 그렸다. 속으로 되새기던 새벽과 빛에 대해 본격적으로 갈피를 잡고서였다. 
“군복무를 강원도 양구에서 했어요. 사람이 많지 않은 곳에 있다가 제대하고 동서울터미널에 내렸는데, 사람들이 바쁜 걸음으로 다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식은땀이 났어요.”
쫓기듯 흘러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는 현기증을 느꼈다.
모두들 치열했다. 함께 그림을 그리던 친구들도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저마다 이 도시에서 자리 잡기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함께 작업하던 친구들이 모두 돌아가고, 학교 작업실에 남아 그림을 그릴 때면 평온함이 찾아왔다. 홀로 텅 빈 캠퍼스를 바라보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과 부딪치는 스트레스를 벗어날 나만의 안식처,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혼자서 집중이 제일 잘되는 시간이 새벽이었어요. 푸른색이 마음에 안식을 준다고 느꼈고요. 거의 대전을 많이 그렸어요. 어려서부터 살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부분만 알고 있지, 다른 부분은 잘 모르고 있더라고요.”
새벽에 만나는 도심의 풍경은 그에게 특별한 인상을 주었다. 그는 그곳에서 남들이 보지 못한 공간을 만났다.
“도시 안에서도 저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때가 있어요. 둔산도 시끌벅적하다가 새벽이 되면 조용하잖아요. 그런 느낌 때문에 새벽을 그리게 되었어요. 별다른 뜻은 없어요.”

덧칠된 시간
  오승훈 작가는 부지런히 새벽 시간 돌아다녔다. 새벽이라는 특별한 시간대에 잠깐 드러났다가 사라지는 공간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그의 작품 〈거닐다―귀가(歸家)〉는 아파트 단지 내의 풍경을 담았다. 차분한 푸른색 사이로 안개에 싸인 듯 희미한 아파트가 우뚝 서 있다. 그리고 아직 채 가시지 못한 어둠이 수풀과 건물 안쪽에 고여 있으며, 가로등에서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온다. 아파트와 수풀 사이 흐리게 지워진 부분에, 그리지 않았음에도 확실히 느껴지는 공간이 있다. 아무도 없다, 는 것이 느껴지는 새벽. 그 무위의 푸른빛에서 날선 하루는 위안받는다. 모두가 여기서 시작되고, 또 지워질 것이라고 담담한 푸른색이 말해 준다. 
그는 새벽을 찾아다니며, 어떤 순간을 포착해 자신만의 방법으로 그림에 담는다.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포토샵으로 원하는 색상으로 만진다. 그런 다음 화선지를 덧댄 커다란 캔버스에 바탕색을 칠하고, 셀 수도 없이 여러 번 덧칠하며 그 공간의 빛깔을 찾아간다. 한 번 덧칠하고 말리는 데는 30분에서 한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들을 기다려, 덧칠하고, 또 덧칠한다. 그는 이를 ‘쌓는다’라고 표현한다.
“동양화는 덧칠을 하기 때문에 공간감이 생기는 거 같아요. 저는 형상(形象)을 위주로 그림을 그려요. 새벽에 걸어 다니다 보면 평소에 집중해서 보지 않았던 것도 보게 돼요. 어두워지면 형상만 보이잖아요. 불빛도 없는데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면 점점 형상이 보이게 되죠.”
사라졌다가 다시 떠오르는 형상. 최소한의 빛이 있는 곳에서 세부는 지워지고 단순화된 조각의 덩어리처럼 사물은 새벽빛에 드러난다. 그의 그림은, 죽었다가 살아난 존재의 알몸을 푸르스름하게 비춘다. 그 시선이 한없이 차분하며 따스하다.
푸르스름한 빛, 노란 빛, 그리고 이제 막 어둠에서 새벽으로 이어지는 경계선에 존재하는 미미한 빛까지. ‘빛’이야말로, 그가 표현하려는 공간의 느낌을 드러내 주는 유일한 매개체이다. 그 빛의 강약이 아니고서야 표현할 수 없었을 순간들이다.

공간을 보다
  오승훈 작가는 새벽 시간, 돌아다니며 그림에 담고 싶은 순간들을 포착한다. 그는 그 순간들을 작가노트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요하지만 그 고요 속에서 가장 고독한 시간에 홀로 거리를 거닐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서 형상(形象)이 보인다.” 그는 장자의 왕덕설에 나오는 “오묘한 어둠속에서 사물을 보고 소리 없는 고요 속에서 소리를 듣는다”라는 문구를 작가노트에 인용하기도 했다. 
그는 새벽을 계속 그리겠다고 한다. “이게 좋아서”가 이유이다. 새벽은 그를 고독 속에 깨어나, 홀로 경이로움에 빠져들게 하는 시간이다. 지극히 현대적인 풍경이지만, 그래서 그의 그림에서는 동양화가 전통적으로 추구해 온 조화로움과 평화가 느껴진다.
그는 이 도시에서 자신의 그림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소박하게 이야기한다.
“그림으로 잠깐 쉬어 가는 안식처를 만드는 것도 좋더라고요. 자기만의 공간이 있고 시간이 있고. 사람들이 지치거나 힘들거나 할 때 안식처 같은 걸 보여 주고 싶어요. 값진 시간이라고 느끼는 순간이 있는 거죠. 사람들이 제 그림을 보며 그런 걸 떠올리거나 느꼈으면 좋겠어요.”
지금의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안식이나 고요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이 분명 있다. 그는 ‘공간을 본다’라고 표현했다. 빛과 시간이 스며든 그의 공간은 이 도시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강요된 일상에서 아주 살짝, 비껴난 곳이었다.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혹은 목요일에서 금요일로 넘어가는 그 어둠과 빛의 경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뒤척일까.
물기가 마르기를 기다려 덧칠해 온 이 빛들은, 쉼이라고는 없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다. 그가 홀로 깨어 발견한 그 푸른빛을, 바라본다. 

 


 

글 사진  이혜정

작품사진  오승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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