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35호] 사람이 있다, 시가 있다

사람이 있다, 시가 있다

신용목 시인





신용목 시인에게 물었다. 이 도시에서 시가 존재하는 이유는 뭘까요. 그는 싱겁게 대답했다. “사람이 존재하니까.”
이 도시에는 사람이 산다. 그 사람들 사이에 하루에도 수많은 언어가 오간다. 요즘에는 전화로 하는 대화보다 카카오톡이나 SNS로 문자 소통을 많이 한다. 많은 언어가 오가지만 정작 내밀한 소통을 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도시를 부유하는 수많은 단어들은 개인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수단이 된다. 언어의 날카로운 껍데기들이 가슴속에 남아 오래 잠을 뒤척이기도 한다. 허탈하게도 처음 그 말이 던져진 순간의 의미란 가뭇없이 사라져 버렸는데도 말의 껍데기가 남아 한참을 버성긴다.
언어의 본래적 의미를 되찾기 위해 우리는 시를 읽고, 시인은 언어의 의미를 끊임없이 해체하기 위해 시를 쓴다. 한밤중, 불면의 밤 뭉툭하게 갈아 놓은 그의 시어에서 위안을 얻는다.
“나무는 자신의 절반을 땅속에/묻고 있으므로,/내가 거울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자신의 목을 조르는 밤을 견디는 것처럼(〈절반만 말해진 거짓〉 부분,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그의 네 번째 시집을 읽으며 단어 자체의 의미를 넘어서, 끊임없이 확장해 가는 의미의 파장을 읽는다. 그것은 바람과도 같아서, 의미로 시작해, 의미를 죄다 지워 버린다. 단어로 그려진 이 만다라는 비어 있으면서 동시에 중심을 향하고 있다. 언어가 주는 의미의 과잉 속에 살아가는 도시인들에게, 날카로운 껍데기를 뭉개 버린 언어의 덩어리들이 위안으로 다가온다. 해석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이 도시에서 덩어리로 존재하듯이 그것은 묵직한 실감으로, 시라는 ‘진흙’ 속으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거기에 근원적 고독, 근원적 갈망이 부서진 언어의 조각들과 함께 완벽하게 미끄러워진 세계가 존재한다. 그렇게 그 세계와 만나기 위해 우리는 기꺼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것은 의미의 덩어리이며, 무의미의 덩어리이기도 하다.





약한 자의 편, 시
  신용목 시인은 2000년에 등단해, 지금까지 네 권의 시집과 한 권의 산문집을 펴냈다. 2004년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2007년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2012년 《아무 날의 도시》, 2017년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그리고 2016년 산문집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까지. 3년에서 5년이 걸려 시집을 한 권씩 낸 셈이다. 18년 동안 시를 써 온 시인에게 처음 시가 찾아온 순간을 물었다.
“초등학교 4학년 코스모스 꽃씨를 따는 시간이었어요. 대궁만 남은 코스모스 꽃밭이었어요. 거기서 노는데 선생님이 불러서 나를 옆에 앉으라 했어요. 옛 사택 섬돌 위에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어요. 코스모스를 바라보고 있는데 선생님이 ‘용목아, 항상 약한 자의 편이 되어야 한다’라고 이야기했어요. 그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았어요.”
평소에 들었던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와, 그 순간의 느낌 같은 것들이 뒤섞여 그에게 묘한 느낌을 주었다. 강해서가 아니라, 외롭고 쓸쓸한 감정, 그와 같은 약함이 시를 쓰게 한다. 그는 그것이 자신이 처음으로 느낀 시적 순간이라 말한다. 그렇게 그는 일찍부터 혼자서 끄적끄적 글을 쓰는 아이였고 자연스레 시에 이끌려 시인이 되었다.
시인으로 살아 온 18년 동안 세상도, 그의 삶도, 그의 시도 많이 변했다. 첫 시집부터 네 번째 시집까지,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에서 구체적인 묘사와 함축적인 주제를 보여 주던 시들은 세 번째 시집과 네 번째 시집에서 길이도 길어지고, 점차 추상적인 병렬식 구조를 가진 시로 변화한다. 더 이상 하나의 이미지와 의미로 모아지지 않는 시는, 기의로부터 뿔뿔이 달아나며 흩어진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의미는 철저하게 지워진다. 
“사람들이 제 시집들이 다 다르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전략이 있는 건 아니고 내 관심사가 변하는 거 같아요. 첫 번째 시집이 유년의 경험이라든지 성장통, 세계에 대해 썼다면, 두 번째 시집은 자기 존재에 대한 고민을 담았고, 세 번째 시집은 응축하면서, 구조를 만들고, 집요하게 바라보고 접근하려고 했어요. 네 번째 시집은 오히려 그것을 내려놓았어요. 세 번째 시집까지는 구체적인 경험에서 관념이나 느낌에 집중했기에, 추상적으로 압축되는 느낌이었던 거 같아요. 네 번째 시집에서는 내려놓았던 거 같아요. 시를 쓰고 있다는 생각을 최대한 안 하고 내게 왔던 것을 그대로 옮겨 놓으려고 애를 썼죠. 세 번째 시집이 구조화시키고, 응축에 공을 들였다면 네 번째 시집은 말을 풀어내고 좀 더 편안하게 나한테 온 것을 대면하려 했어요.”
재미있게도 그는 한때 자신의 뮤즈가 이명박과 박근혜였다고 말한다. 이명박과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있던 시절, 그는 부당한 권력이 지배하는 세계 자체와 마찰하며 시를 썼다. 세 번째 시집과 네 번째 시집의 방향성이 비슷하다고 느꼈는데, 전체적으로 하는 이야기는 비슷하지만 시적 표현 방법은 다르다.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시
  “시가 되려면, 의자를 앉는 물건으로 보면 안 되잖아요. 기표와 기의가 있는데, 거기서 기표만 가지고 와야 돼요. 앉는다는 기의를 빼면 그건 얼마든지 변용이 가능하죠. 의자를 입 벌린 짐승이라고 표현한다든지… 이렇게 기의로부터 기표를 해방시키는 거죠. 기의가 억압으로 존재하기 때문이에요. 앉는 것이라는 의미에 묶이면 다른 것이 불가능해지죠. 기의가 규칙이 되고 규율이 되고, 법칙이 생겨나는 거죠.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시의 속성이잖아요. 기의가 억압으로 존재하는 거죠.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이 시예요. 모든 억압에 반대하는 것이 시의 특성이죠.”
시의 속성이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이듯, 이 도시에서 시가 사람들에게 던지는 의미 역시 그러하다.
“이 도시도 마찬가지고, 제도도 마찬가지지만, 어떤 규격을 원하잖아요. 사람들에게 똑같은 삶을 살기를 요구해요. 인간은 다 똑같지 않아요. 그 똑같지 않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시나 예술밖에 없어요. 내 나이 때 해야 하는 일이 있고, 졸업하면 취업하고, 결혼을 하고 집을 사고… 어떤 규격 속에서 사람을 살아가게끔 만드는 거예요. 살아가는 기계가 되게끔 하려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다 다른 인간들이잖아요. 비가 왜 오냐고 할 때, 과학적 이유가 아니라 비가 오는 나만의 이유가 있어요. 백석이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눈이 내린다고 한 것처럼, 사람마다 특별한 순간을 가지고 있어요. 나라는 존재가 가지는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거죠.”
우리는 다 다른 사람이다. 개별적이고 유일하다. 하지만, 이 도시와 제도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교육을 받고, 생산 활동에 참여하고, 가족을 이루어 아이를 낳고 살길 바란다. 이 시스템을 유지하는 하나의 구성 요소가 되는 것이다.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거나 못 미치는 이들은 존재감 없이 스러지거나 가치를 부정당한다.
태어나서부터 주어지는 ‘언어’라는 도구는 기표와 기의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언어에 지배당한다. 그 언어로부터의 탈출, 기의로부터의 탈출이 시다. 그래서 시는 저항이다.
우리는 이 도시에서 왜 쓰고 읽는가, 라는 질문은 그래서 정말이지 우문이다. 왜 사는가라는 질문과 같기 때문이다. 살아 있으니까 살고, 사니까 시를 쓴다. 나의 고독한 세계가, 이 단단한 기의의 덩어리인 도시를 넘어 자유로워지고자.
그의 시를 처음 읽은 건 2010년 무렵이다. 그리고 그 후에 그의 시 강좌를 들은 적이 있다. 6년~7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그를 다시 만났다. 여전히 그는 시인이었고, 웃을 때 눈가의 주름이 조금 늘어난 것 외에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 두 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 동안 제대로 질문다운 질문을 하지 못했고, 그는 별것 아닌 질문에 밑줄을 치듯이 반듯한 대답들을 내놓았다.
대답들이 너무 반듯해서, 그를 좀 뒤흔드는 질문을 하고 싶었다. 별건 아니지만, 그래서 그에게 작정하고 따지듯이 물었다. 당신은 주류가 아니냐고, 큰 출판사에서 주는 문학상을 타고, 좋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지금 만족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만족을 한다면 시를 안 쓰겠죠. 문단 권력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때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해요. 가장 중심에 있기에 그렇게 보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안주하면서 유지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문단은 여러 가치가 싸우고 있는 문학의 장이에요. 문단 자체가 가치 투쟁의 장이에요. 문학이나 예술이라는 건 끊임없이 새로워야 해요. 바라보는 세계라든가, 이야기와 같은 새로운 가치들이 생겨나고, 그곳에서는 계속 싸울 수밖에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으로 보이는 건, 문학적 가치가 보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건 미학적 가치예요. 하나로 고정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죠. 새로운 문제가 생기고, 새로운 이론이 생겨나고 그것들이 결합되면서 일어나는 새로운 미학성이 있어요. 한편으로는 그 권력을 무너뜨렸을 때, 권력이 부작용도 있지만 긍정적인 작용도 있다는 거죠. 예를 들어 영화제에서 상을 주는 것은, 영화를 예술적 관점에서 계속 지켜 나가기 위해서죠. 그렇지 않으면 관객이 많이 드는 것이 최고가 될 테니까요. 적어도, 한국 문학장에서 괜찮다는 출판사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자기 글을 가지고 싸우는 장이에요. 요동침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싸우는 곳이죠.”
혹시 내 질문이 기분 나쁘지 않았냐는 말에 그는 웃으며, 늘 받는 질문이라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을 듣고 보니 미안해졌다. 그가 시인으로서 누리는 것보다, 시인이 되기 위해 개인적으로 포기한 것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건 그가 시인이 되기 위해 희생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저, 그는 시인이었고 시인이라 해서 특별히 주어진 권력이니 뭐니 하는 건 없다는 뜻이었다. 그는 그저 시인인 것이다. 18년 동안 시를 썼고, 네 권의 시집을 냈으며 여전히 무력감과 싸우며 시를 쓰고 있는.
카페의 음악 소리가 너무 컸다. 그래서 녹취해 온 파일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기표가 다 뭉개진 인터뷰. 기의만이 남은 인터뷰. 단 한 가지 명확하게 와 박힌다. 시는 언어로부터 끊임없어 벗어나고자 한다. 끝내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투쟁, 그것이 시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비슷한 싸움을 하며 모두들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세상의 모든 외로움이 밥을 먹을 시간이다, (…) 밥을 삼키면,/나는 입을 가졌구나 부드러운 목을 가졌구나 따듯한 배를 가졌구나/알게 된다(〈그리고 날들-Bitter Moon〉 부분,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많은 말들을 나누었는데, 왠지 헛헛해져 그의 시를 읽고 싶어졌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내가 눈을 가지고, 부드러운 감정과 외로운 환상을 가졌다는 걸 알게 된다. 


글 사진  이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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