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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33호] 집을 짓고 살던 선동은 어디로
집을 짓고 살던 선동은 어디로
대전 유성구 장대동 동자미마을
1.
도시의 외형적 변화는 주로 아파트의 출현으로 나타난다. 얼마 전까지 옹기종기 주택이 모여 있거나, 논밭이 있던 곳이 형태도 남지 않고 사라진 뒤 아파트가 들어선다. 도심 확장 과정에서 흔히 마주하는 풍경이다. 네모반듯하게 들어선 아파트는 짐짓 처음부터 그곳에 있던 것처럼 천연덕스럽다. 그곳에 우락부락 서서는 내리쬐는 햇볕을 혼자 독차지한다. 새롭게 형성한 신도시 아파트는 그래서 괜히 얄밉다.
월드컵대로를 따라 지나다니면 저쪽으로 노은지구 아파트 단지나 유성초등학교 근처에 들어선 푸르지오 아파트 머리 부분이 눈에 들어올 뿐, 그 사이에 수십 년 흐른 마을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생각하지 않으니 보이지도 않았다.
애써 마을을 찾아 떠난 날은 봄볕이 한정 없이 내리쬐어 겉옷을 벗고 반팔을 입은 채 돌아다녀도 아무렇지 않은 날이었다. 4월 중순까지도 그런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올해 4월 15일까지는 음력으로 2월이었다.
월드컵대로에서 마을로 들어서는 진입로 초입에 차를 세우는 동안 밖에 나갔다가 마을로 들어오는 아주머니 한 분을 발견했다. 급하게 달려갔다. 아주머니는, 큰길 옆에 오렌지를 파는 트럭이 보일 것이고 바로 그 옆에 있는 집 앞에 할머니 두 분이 앉아 있을 터니 그리로 가 보란다. 뛰어온 길을 되짚어 월드컵대로 쪽으로 나선 후에 유성나들목 쪽으로 조금 더 올라갔다. 집과 그 앞에 앉을 만한 공간은 보였으나 할머니 두 분은 보이지 않았다. 그새 집으로 들어간 모양이다. 망연자실 서 있는데, 다른 동네 주민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반갑게 인사를 하니, 아주머니도 반갑다. 그러곤 묻는다.
“저기 길옆에 할머니 앉아 계시는 것 못 보았어요? 그 집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셨는데, 몸이 편찮으셔서 병원에 입원하셨거든. 근데 차를 가지고 지나가다 보니까 할머니가 보이는 것 같아서 들여다보려고 가는 길인데. 그새 어디 가셨지? 이 동네가 도시 안에 있어도 꼭 시골 동네처럼 정이 많아요. 다른 데처럼 개발을 한다는 얘기는 있는데 언제 하려나 모르지. 개발하는 게 뭐가 좋다고? 이렇게 사는 게 좋지. 개발하면 뭐해. 그래도 땅값은 많이 오른 모양이야.”
2.
유성구에 넓게 퍼진 동네 중 하나가 장대동이다. 장대동은 장이 있는 동네라는 말에서 그 지명 유래를 찾는다. 장터다. 장이 있는 동네. 장대 8통에 속하는 동자미도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겠지만, 오래전부터 있던 마을이다.
대부분 주민은 이곳에 들어와 터를 잡은 지 20~30년밖에는 안 되었으니 동자미 마을 이름의 유래를 아는 이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마을 남쪽 구석에 있는 노인회관을 겸한 마을회관에 찾아갔지만 동네 할머니 몇이 소파에 앉아 소담을 나눌 뿐, 마을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었다. 낯선 이에 대한 본능적인 경계심에 더해 구성원 사이에 묘한 긴장 같은 것이 느껴진다. 익숙한 풍경에 낯선 이가 끼어들며 한가로운 봄날 오후의 흐름을 깨뜨렸기 때문이지 싶다. 한쪽 벽에 걸린 액자 사진에는 조금 더 젊어 보이는 남녀가 찍혔다. 어느 하늘 예쁜 가을 날, 마을 주민이 단체로 나들이라도 다녀온 모양이다. 하지만, 이날 노인정 공간에 할아버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곳에서도 동자미 마을 이름 유래를 확인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미 확인한 마을 경계에 다른 주장을 제기하는 할머니를 만났다. 앞서 만난 주민은 이날 답사한 구역이 동자미고 계룡산 쪽으로 더 가면 있는 사회복지시설 천양원 주변이 개명촌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노인정 할머니는 답사 지역도 개명촌에 속하고 동자미는 유성초등학교 부근이라고 설명했다. 이도 틀린 설명은 아니다. 유성초등학교 남서쪽으로는 동잠공원이 있다. 동잠은 동자미를 한자로 변환하면서 나온 지명이다.
이를 토대로 유추하면, 이날 답사한 구역은 동자미와 개명촌이 묘하게 겹쳐진 곳일 수도 있다. 과거에는 집이 많지 않았던, 서낭당이 있으며 소나무 숲에 무덤 몇 기가 놓여 있던 야산일 수도 있다. 이곳이 예전에 산이었다는 건 마을 구석구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대도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마을 곳곳에는 산에서나 만날 수 있는 수형의 소나무도 많이 자란다. 산모퉁이를 돌아 만나는 마을, 바로 그 모퉁이에는 휘영청 휘어진 소나무를 발견하기 일쑤인데, 이곳에서도 보았다.
대전역사박물관 대전의 지명 자료를 살펴보니 동자미는 80m 높이의 야트막한 산이다. 유래도 분명하다. 이 야산에 선동채화영(仙童採花形)의 명당이 있어 동자산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옛날 한 지관이 노은동에 있는 왕가봉에 올라 이곳을 내려다보며 이 산줄기 끝에 선동의 집이 있다고 말했다 한다. 야트막한 산에 집을 지은 선동이 꽃을 따는 형국이니 상상하면 아름답다. 여하튼 그래서 이곳에 산이 동자산(미)이고 그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 동자미라고 기록해 두었다. 80m 높이의 산봉우리는 푸르지오 아파트가 들어서 유성초등학교 부근에 솟아오르고 완만하게 흘러내린 산자락이 이날 답사한 동자미 마을까지 흘러내렸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동자미든 개명촌이든 그 옛날 큰 장이 섰던 장대마을에 어깨 걸고 살았던 곳이다. 비교적 근대에 호남고속도로가 뚫리고 노은지구에 택지개발이 이루어지고 2002년 월드컵까지 펼쳐지면서 주변 풍광도, 마을살이도 모든 것이 달라졌다.
3.
동자미 북쪽으로는 호남고속도로 유성나들목과 만남의 광장이 들어섰고 마을 동쪽으로는 호남고속도로가 지난다. 마을 서쪽으로는 월드컵 경기장과 그 앞에 월드컵대로가 들어섰고 남쪽으로는 유성에서 공주로 넘어가는 길이다. 적잖은 교통량을 간직한 도로가 마을 사방을 빙 둘러 싸고 있으니, 흡사 섬이다. 이렇게 사방을 둘러싼 길을 들어내면 노은동 쪽에 있는 산, 왕가봉에서 흘러내려 온 산줄기가 이곳에서 봉긋 솟아 80m 높이의 동산을 이루었을 모습이 그려진다.
마을에서 만난 주민은 이곳에 산을 파다가 월드컵 경기장 인근에 있던 연못과 낮은 지대를 메우는 데 썼다고 한다. 거의 절반은 날아갔을 거라 말한다.
“이곳이 옛날에는 전매청에서 운영하는 개성인삼시험장이 있던 곳이에요. 1968년에 개인에게 땅을 불하했지요. 충남대학교에서도 일부를 구입해서 충남대학교 농대 시험포로 활용했지요. 지금 길을 넓힌다고 표시해 둔 곳이 대부분 충남대학교 땅이에요. 과거 이 산에는 서낭당도 있었는데 1970년께 호남고속도로가 개통하면서 사라졌지요. 지금 제가 사는 곳에 아버님이 살았어요. 전매청에서 가지고 있던 사택이었어요.”
녹두를 심기 위해 텃밭을 갈던 장 씨(70) 아저씨는 중학교 때 옥천에서 전매청에 일자리를 구한 선친을 따라 이곳에 이사왔다. 노은동에 살던 강 씨(65) 아주머니를 만나 결혼했다. 알고 보니, 강 씨 아주머니 고향도 옥천이었다. 두 사람의 인연이다. 강 씨 아주머니는 할머니 두 분을 찾아 나선 그 길에 골목길에서 만난 아주머니다.
“옛날 여기에서 살 때는 현충원 뒤에 있는 갑하산, 신선봉까지 가서 나무 해다가 지금 구암역 앞에 있는 장에 가져가 팔았지요. 그때 한 짐을 해 가지고 가면 200원에서 500원까지 받았어요. 쌀 한 말에 20원 할 때니까, 많이 받은 거지요. 땔감이 워낙 귀할 때니까요. 그리고 저기 유성나들목 북쪽으로는 한국전쟁 때 훈련장이 있었다고 해요. 의용군을 모집하며 저기에서 며칠 훈련받고 바로 전쟁터로 향했다고 하더라고요.”
마을 골목길은 거미줄처럼 얽혔다. 여느 시골마을처럼 허물어진 채 방치한 집도 몇 채 보이고 관리하지 않아 점점 세력을 넓히는 대나무숲 오솔길도 예쁘게 남았다. 동산의 정상부로 여겨지는 곳에는 주택이 드물고 남쪽 자락으로 주택이 주로 들어섰다. 동자미마을 메인 스트리트다. 정성껏 가꾼 정원을 둔 예쁜 집이 여러 채다. 골목은 깨끗하고 고요하다. 마당에 묶어 놓은 개들도 나른한 봄 햇살에 졸린 눈만 꿈벅거릴 뿐 낯선 이를 향해 짖을 줄 모른다. 아직 모내기 준비를 끝내지 않은 손바닥만 한 논에는 겨우내 언 땅을 녹일 햇살이 가득하다.
글 사진 이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