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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34호] 내 시간을 상상할 여유
내 시간을 상상할 여유
기본소득 정책 실험 참가자들을 만나다
전국 각지에서 시대의 변화를 준비하기 위한 다양한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지방정부나 공공기관이 주체적으로 움직이기도 하지만 민간에서도 다양한 시도를 펼친다.
대전 역시 마찬가지다. 기본소득대전네트워크는 지난해 ‘띄어쓰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띄어쓰기 프로젝트는 비수도권에서 최초로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기본소득을 실험한 사례다.
기본소득대전네트워크는 2017년 기준 최저임금 6,470원 이상의 돈을 후원한 사람 가운데
추첨을 통해 세 명을 뽑아 ‘띄어쓰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띄어쓰기 프로젝트는 2017년 3월부터 8월까지 진행했으며 참가자들에게 6개월간 50만 원씩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이후 대전 청년 혁신네트워크 혁신청도 ‘청년수당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혁신청은 2017년 2월부터 7월까지 1기 청년수당을 진행한 후 같은 해 12월부터 2018년 5월까지 2기 청년수당을 진행했다.
2기 청년수당은 추첨을 통해 대전에서 활동하는 청년활동가 2인에게 6개월간 30만 원씩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이들 모두 절차나 증빙 없이 자유롭게 기본소득을 사용했다. 기본소득 실험 참가자들에게 기본소득은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띄어쓰기 프로젝트와 청년수당 프로젝트 참가자들을 각각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 기본소득을 제공받으며
느낀 일상의 변화는 무엇인가요?
장경춘 “지금은 직장을 옮겼지만, 작년에는 월급이 많지 않았어요. 빠듯하게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본소득을 받으면서 몸도 마음도 여유가 생겼어요. 여유롭게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고 고민하지 않고 음식을 사 먹을 수 있었죠. 그런 소소한 일상을 굉장히 행복하다고 느꼈어요.”
김가람 “기본소득을 받은 이후로 다음 달이 기다려지더라고요. 당시 자취를 하며 생활비로 10만 원에서 15만 원 정도를 썼기 때문에 하루살이나 다름없었어요. ‘내일은 어떻게 보내야 하나’라는 걱정이 앞섰죠. 기본소득을 받으면서 미래를 계획할 수 있었다는 게 가장 큰 변화였어요. 취미로 밴드 활동을 하고 있거든요. 그때는 지금보다 더 자주 모이고 공연도 했어요. 기본 소득이 없었다면, 밴드 활동은 어려웠겠죠. 일주일 중에 가장 즐거운 시간인데, 그 시간을 포기하지 않게 돼서 좋았어요.”
전정현 “원래 개인 사업을 하면서 아르바이트 두 개를 병행했어요. 청년수당 프로젝트에 선정될 즈음에 혼자 하던 회사를 정리하고 취직을 했거든요. 그런데 월급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병행할 생각이었어요. 생활비를 벌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죠. 그런데 청년수당 프로젝트에 선정되고 나니까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생활비가 충당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어요. 그게 가장 큰 변화였고 즐거움이었죠.”
김다영 “원래 카페에서 음료 하나를 선택할 때도 아메리카노만 마셨어요. 가성비에 집중하느라 선택의 폭이 좁았죠. 그런데 기본소득을 받고 난 이후에는 ‘다른 음료를 마셔 볼까?’ 하는 생각이 들고 사소한 여유가 생기더라고요. 엄청나게 큰 변화를 겪은 건 아니지만, 숨통이 트이는 생활로 바뀐 건 사실이에요. 작지만, 여유가 생긴 즐거운 생활이었죠.”
# 매달 지급받은 기본소득은 어디에 사용했어요?
장경춘 “생활비로 사용했어요. 월급에 돈을 보태서 밥을 사 먹고,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죠. 운동 트레이너가 직업이니까, 운동에 투자하기도 했고요.”
김가람 “전역하고 아르바이트해서 모아 놨던 돈이 100만 원 정도 남아 있었어요. 띄어쓰기 프로젝트에 선정되고 난 이후에 그 돈으로 월세를 미리 내고 기본소득 생활비로 사용했어요. 생활비로 사용하면서 이 돈을 모아 여행을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6개월 동안 100만 원을 모아서 일본 여행도 다녀왔어요.”
전정현 “기존에 받는 월급에 30만 원을 더해서 생활비로 사용했죠. 정말 밥 한 끼 사 먹고, 생필품 사고, 휴대폰 요금을 내면서 딱 생활비로 썼어요. 별거 없죠?
김다영 “당시에 영어 공부를 하려고 아르바이트를 하나 더 알아보는 상황이었거든요. 기본소득을 받게 되면서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 학원에 다닐 수 있었어요. 생활비로도 사용했죠. 그리고 평소에 여행 다니는 걸 좋아해요. 그때 여행에 대한 갈증도 있었고요. 그래서 일본 여행을 다녀왔어요.”
# 왜 기본소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전정현 “자신이 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 게 있는 사람에게 엄청난 기반이 된다고 생각해요. 저 같은 경우만 봐도 아르바이트를 할 시간에 제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수 있었어요. 그 돈으로 저는 시간을 번 거죠.”
김다영 “내 시간을 상상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해 주는 좋은 제도라고 생각해요. 생각해 보면, 단조로웠던 일상에 다양한 색을 입힐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단순히 ‘돈을 주는 게 좋다’라는 생각만으로 기본소득이 생겼으면 하는 건 아니에요. 기본소득을 통해서 나한테 일어나는 변화를 체험하고 나니까, 제도적으로 정착된다면 사회가 전복될만한 효과를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사실 생계 때문에 꿈을 포기하고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도 많잖아요. 그런데 기본소득이 있으면 적어도 생계 때문에 직장을 선택하는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요?”
# 기본소득에 대한 근로의욕 저하, 사치 등
부정적인 의견도 많아요.
김가람 “사실 이걸 경험하기 전에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기본소득을 경험한 이후에는 생각이 달라졌어요. 저도 대가 없이 생기는 돈이라 낭비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아니었어요. 오히려 어떻게 하면 이 돈을 더 잘 쓸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전정현 “악용될 수 있다는 생각은 들었죠. 원래 모든 게 완벽할 순 없잖아요. 그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 어떤 제도와 방안을 마련하느냐가 중요하겠죠.”
# 대전시에서 어떠한 기본소득 정책 실험이
이뤄지면 좋을까요?
전정현 “성남시에서 청년배당을 지역 화폐로 진행했잖아요. 저는 그 모델을 굉장히 긍정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지역민이 낸 세금으로 지역의 청년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준 거잖아요. 그런 시도도 굉장히 좋다고 생각해요.”
김다영 “대전에서도 기본소득의 일환으로 청년취업희망카드를 진행하고 있잖아요. 올해는 바뀌었지만, 지난해 희망카드 절차가 굉장히 복잡했다고 들었어요. 기본소득 취지에 맞게 누구나 쉽게 신청하고 받을 수 있도록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시에서 진행하는 청년 정책의 자격요건을 보면 대전시가 상상하는 청년은 대학을 졸업했거나 졸업을 앞둔 사람이에요. 폭이 굉장히 좁다는 생각이 들죠. 그리고 지급하는 돈은 취업을 위한 공부에만 사용할 수 있고요. 대학을 가지 않았거나, 일반적인 회사에 들어가기보다 새로운 꿈을 꾸는 청년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에서 좀 더 넓은 범주에 청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그런 이해가 기반되어야 그에 맞는 정책이 나오겠죠.”
# 기본소득 실험이 본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궁금해요.
장경춘 “그냥 좋았어요. 그걸 어떻게 더 표현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네요. 제 일상에 정말 많은 도움이 됐거든요. 별거 아닌 일로 정말 행복했어요. 편하게 치킨을 먹고, 카페 가는 게 좋았거든요. 소소한 일상을 즐길 수 있게 된 그런 실험이었어요.”
김가람 “저에게 많은 의미가 담긴 실험이었어요. 처음 알았을 때는 신선한 충격이기도 했고 이와 관련해서 비슷한 제도가 많다는 것도 배울 수 있었어요. 저에게 이 실험은 전래동화에 나오는 동아줄 같은 의미였어요. 그래서 프로젝트를 마치며 아쉽기도 했어요. 이런 실험들이 정책으로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전정현 “기본소득 실험은 저에게 먹고 살 길을 찾는 밑거름이었어요. 내 인생에 없었던 이벤트 같은 일이기도 했어요. 많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기본소득 덕분에 아르바이트 대신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수 있었어요.”
김다영 “계속해서 삶의 여유를 이야기 했지만, 여유로만 정리하면 너무 단편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기본소득 실험은 여유도 여유지만, 저에게 있어서 삶의 스펙트럼이 넓어지는 경험이었어요. 그리고 기본소득을 참여한 이후에 이 제도에 관해 설명해야 하는 자리가 많았어요. 기본소득이 왜 좋은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공부하기 시작했죠. 그러면서 관심 범주도 넓어졌어요. 정치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죠. 그런 점도 굉장히 좋았어요.”
실험 참가자들은 기본소득으로 평소보다 넘치는 소비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팍팍하기만 했던 자신의 일상에 쉼표 하나를 더했고, 5천 원짜리 식사 대신 7천 원짜리 식사를 망설이지 않고 선택할 수 있었을 뿐이다. 실험을 통해 참가자들이 얻은 것이 이러한 ‘여유’만은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기본소득으로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다. 지친 일상을 쉬어갈 수 있었고, 배우고자 했던 것을 배웠고, 해야 할 일을 집중해서 해낼 수 있었다. 참가자들이 기본소득을 통해 시간을 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기본소득 실험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한국의 기본소득 실험은 복지 정책에 가깝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발현할 사회문제보다는 청년 실업 문제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 더 넓고 깊게 미래를 상상하고 준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미국이나 핀란드의 사례를 바탕으로 한국 사회에 맞춘 기본소득 실험을 진행해야 한다.
글 이지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