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34호] 기본소득이 인간의 존엄성을 높일 수 있을까?

전 세계에서 일어난 기본소득 실험,

우리에게 필요한 정책 실험은 무엇일까?

 

 

몇 달 전, 누구나 정상회담 취재에서 한 중학생을 만났다. 그는 4차 산업혁명이 도래해 기존 일자리를 기계가 대체할 텐데 왜 우리가 지금 같은 교육과정으로 수업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비록 4차 산업혁명이 정확히 무엇인지, 4차 산업혁명으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바뀔지 묻는 말에 뚜렷한 대답을 내놓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영화 《디스트릭트9》으로 유명한 남아프리카공화국 영화감독 닐 블룸캠프의 영화 《엘리시움》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한 시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전체 인구의 상위 1%는 지구를 버리고 엘리시움이라는 행성에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생활한다. 이곳은 가난도, 전쟁도, 질병도 없는 세상이다. 반면 지구에 남겨진 99%는 인공지능이 대체하지 않은 극소수의 직업을 놓고 경쟁한다. 대부분이 무직자며 극심한 빈곤에 시달린다.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대에 접어든 우리가 인간노동의 의미와 부의 불균형, 그리고 이에 따른 기회 박탈 등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제는 흔한 단어가 되어 버린 기본소득은 변화 앞에 놓인 우리가 선택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과연 기본소득이 실질적으로 인류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어떤 형태의 기본소득이 엘리시움이 되어 가는 사회를 멈추게 할 수 있을까. 고민에 빠진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기본소득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복지국가는 왜 기본소득을 고민했나

 

핀란드는 대표적인 복지국가로 알려져 있다. 가족이 아닌 개인 단위로 보편적인 사회복지를 제공하며, 시민권자 아닌 핀란드 거주자에게도 같은 혜택이 주어진다. 소득이 없는 가정주부, 실업자, 병가 중인 노동자 등에게도 국가 보조금을 지급해 일정 수준의 소득을 보장받을 수 있다. 성 평등 수준이 높아 남녀 임금 격차가 없는 것은 물론, 누구나 노력에 따라 사회계층을 이동할 수 있다. 특히 누구나 평등한 교육 수준을 보장받는데, 부모의 교육, 경제 수준이 자녀의 교육 수준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정도다. 그렇다 보니 핀란드인 대부분이 높은 삶의 만족도를 느낀다. 이렇게나 완벽에 가까운 복지국가에서 왜 기본소득을 고민하게 됐을까?
첫 번째 이유는 노동 시장의 변화다. 현재 핀란드 복지정책은 산업화 시대에 만들어졌다. 기존 복지정책은 기술혁신 시대를 온전히 충족하지 못한다. 또 다른 이유는 핀란드에만 있는 독특한 문제, 빈곤함정이다. 후한 복지혜택 제공으로 근로 의욕을 상실한 탈근로유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핀란드가 고민하는 것이 바로 기본소득이다. 실업자든 근로자든 모두에게 최소한의 삶을 유지할 비용이 주어지면 탈근로유인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일자리를 위협하는 시대에서 지금과 같은 다양한 복지제도를 유지하는 것과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 이 중 어느 것이 국민과 국가에 더 좋은지 실험하기 시작했다.
적합한 기본소득 수준을 찾기 위해 서른네 차례에 걸쳐 세율과 기본소득을 조합했다. 실험에 참여할 대상을 무작위로 선정했으며 지방정부가 이들에게 실험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정부 차원에서 진행한 실험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심층적인 분석을 위해 대상과 인터뷰하며 결과를 분석하기도 했다. 2017년에 시작한 기본소득 실험은 올해 말에 끝난다.

 

 

그냥 돈으로 주면 안 될까

 

그렇다면 핀란드보다 상황이 우리와 비슷한 미국의 사례는 어떨까? 미국은 절대 강국이지만 심각한 빈부격차와 빈약한 사회보장 시스템을 가진, 국민 대다수가 절대 빈곤한 아이러니한 나라다. 미국은 연금, 의료보험조차 개인이 부담해야 한다. 이와 관련한 사회문제도 심각한 수준이다. 일자리의 94%가 파트타임이며, 아메리카 드림은 옛말이 된지 오래다. 로비스트 합법화로 정치가 경제와 결탁해 사회에 큰 변화조차 일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인공지능으로 저소득층이 주로 갖던 콜센터 등의 직업마저 사라지고 있다. 이렇다 보니 미국에서는 핀란드와는 조금 다른 부분에 주목해 기본소득 실험을 진행했다.
빈곤퇴치, 인종차별에 대해 연구하는 이코노믹 시큐리티 프로젝트는 기본소득을 현금으로 지급하는 것에 대해 실험했다. 현금으로 이를 지급했을 때 올바르게 사용될지에 대한 논의다. 연방 국가로 주정부 역할이 큰 미국 몇 개 주에선 이미 기본소득 실험이 진행된 바 있다. 워싱턴은 시민배당 형식으로 기본소득을 지급했으며, 실리콘밸리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도시 스톡턴에서는 500달러를 100명에게 지급했다. 스톡턴 기본소득 실험에 참여한 참가자들의 변화는 분명했다.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던 한 여성은 기본소득을 통해 직업교육을 받고 고정적인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실험에 참여한 대부분이 건강을 되찾고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방법을 찾는 데 기본소득을 사용했다.
에어비앤비, 드롭박스와 같은 스타트업 회사를 지원하는 미국기업 와이컴비네이터 리서치도 기본소득 실험을 진행했다. 무작위로 선출한 3천 명에게 매달 1천 달러를 3년간 지급하는 방식이다. 앞으로 단계적으로 참여 인원을 1만 명까지 늘려 실험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들이 주목하는 건 ‘기본소득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가’이다. 기본소득으로 인해 어떤 감정을 갖는지,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할 수 있는지, 저축을 얼마나 하는지, 부모와 아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지 등을 연구한다. 와이컴비네이터 리서치의 결과도 긍정적이었다. 오클랜드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친척과 함께 살던 브리안은 도시 인근에 주거지를 얻고 정규직 일자리도 얻었으며, 아이들을 더 많이 부양하고 조카들까지 돌볼 수 있었다. 또 다른 참가자 아이린도 비슷하다. 여러 개의 파트타임잡을 갖고 있던 아이린은 일하는 시간을 줄여 공부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또한, 지역사회 활동을 시작했고 보다 안전한 동네로 이사 갈 수 있었다.



청년이 아니면 안 되나요

 

한국에서도 이미 성남시와 서울시가 기본소득을 배경에 둔 청년배당과 청년수당을 진행한 바 있다. 성남시는 2016년부터 청년배당으로 재산·소득·취업 여부와 상관없이 성남시에서 3년 이상 거주한 만 24세 청년에게 분기별로 지역화폐를 25만 원씩 지급했다. 이와 달리 서울시는 서울에 거주하는 만 19~29세 미취업 청년에게 구직활동 촉진을 위한 형태로 청년수당을 지급했다. 시가 카드를 발급해 매월 50만 원씩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이었다. 이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지만 구직활동 촉진이라는 취지에 따라 호텔, 주점 등에서는 사용하지 못했다.
대전은 어떠할까? 대전시가 작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희망카드는 서울시의 청년수당과 비슷한 모양새다. 만 18세에서 34세 사이에 있는, 가구 중위소득 15% 미만의 미취업 청년을 대상으로 구직활동과 생활안정 지원 차원에서 희망카드를 지급한다. 이들에게 6개월간 매월 30만 원을 카드형식으로 지급했으며, 취업활동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활동에서만 자유롭게 수당을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대전에 소재한 민간 단위에서도 기본소득 실험이 진행됐다. 기본소득대전네트워크는 ‘띄어쓰기 프로젝트’를, 대전 청년 혁신네트워크는 ‘청년수당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기본소득이 삶의 질 향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확인했다.
6·13 지방선거에서도 기본소득은 뜨거운 감자다. 제주도지사로 출마한 더불어민주당 문대림, 무소속 원희룡, 녹색당 고은영 후보가 각각 전 도민 기본소득, 청년희망 기본소득, 청년수당을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다. 성남시장에 이어 경기도지사 자리를 노리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의원 역시 다시 한번 청년배당을 공약했다.

 

 

한국형 기본소득 실험이 필요하다

 

기본소득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건, 수당이 효율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지다.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수당이 근로 의욕을 저하한다고 주장한다. 앞서 소개한 핀란드와 미국의 실험에서 우리는 해답을 찾을 수 있다.
핀란드는 기존 복지정책으로 인한 탈근로유인을 막기 위해 기본소득 실험을 시작했다. 오히려 기본소득이 근로의욕상실과 복지, 모두를 충족하는 대안이라는 걸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이다. 또한, 기존 복지정책은 허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기초연금과 국가장학금 제도를 통해 기존의 복지정책의 한계점을 보았다. 적용 대상을 명확히 파악할 수 없어 정작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복지를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미국은 현금으로 기본수당을 지급하며 수당의 사용방법과 수혜자가 누리는 삶의 질의 변화에 대해 실험했다. 위의 결과에서 나타난 것처럼 사람들은 기본소득으로 더 안정적인 직업을 찾고, 학업에 열중하고,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한국에서 기본소득의 일환으로 진행한 청년배당, 청년수당, 희망카드 등에는 아쉬운 점이 많다. 핀란드가 정부차원에서 실험을 진행해 무작위로 대상을 선발한 것과 달리, 한국에서 청년을 대상으로만 이뤄졌다. 핀란드와 미국이 실제 기본소득 도입 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대비하려 했던 것과는 다르다. 특히, 청년이라는 특정한 집단에 집중한 수당은 어찌 보면 기본소득의 한 형태라는 프레임을 덧씌운 복지정책의 일환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미국에서 현금으로 기본소득을 지급한 것과는 다르게 지역화폐, 카드발급 등의 방식을 취했다. 제한 없는 기본소득이 실제로 삶의 질을 어떻게 바꿨는지 조사했던 것과 다르다. 지급되는 수당도 적다. 기본소득이라면 인간이 기본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수준의 수당을 지급해 누구든 경제적 이유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일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위해 청춘을 바치는 나라다. 2018년도 지방공무원 9급 공개경쟁채용시험 지원자는 총 210,539명이다. 공무원, 경찰이라는 직업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아도 어느 정도의 안정적인 수입을 얻기 위해 오랜 기간 시험을 준비한다. 기본소득으로 식과 주를 보장받고, 노동으로 얻는 여분의 돈을 위해 직업을 얻는다면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여전히 노량진에서 컵밥을 먹고 있을까?
인터넷 설문조사업체 페널나우가 지난해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 중 58.4%가 기본소득에 찬성한다는 의견을 밝혔다고 한다. 반대하는 응답자는 25.1%였으며, 기타는 16.4%였다. 기본소득에 대한 국민의 열망은 높아졌는데, 정작 진정한 의미의 기본소득을 위한 준비는 미비한 상태다. 이제는 기본소득의 개념을 도입한 형태의 수당을 지급하기보다, 한국에 맞는 실질적인 형태의 기본소득 실험을 진행해야 한다. 핀란드와 미국이 서로 다른 배경에서 실험을 진행했던 것처럼 말이다.

 

 

글 오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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