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32호] “아무것도 소위 ‘자연 질서’와 조화되는 것은...

"아무것도 소위 '연 질서' 조화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인류의 간계였다."

칼럼_로와의책탐(로와)

 

 

“맨움은 생명과 실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단다. 맨움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모든 땅의 생명이 죽어 없어질 거야. 만일 맨움을 억압하지 않는다면, 만일 맨움이 제지되지 않는다면, 만일 그들이 교화되지 않는다면, 만일 그들이 ‘그들의 자리를 지키지 않는다면’ 생명은 소멸할 거다.”


 

 

  엄마 루스 브램 장군이 긴 논쟁 끝에 맨움해방주의자인 아들 페트로니우스를 굴복시킨 마지막 대사다. 맨움은 뭐고 맨움해방주의는 또 무슨 소리일까? 모르는 게 당연하다. 지금 사회에는 없고 오직 소설 안에서만 존재하는 신조어니까.
  1977년에 출판된 페미니즘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은 단어사전으로 시작된다. 이갈리아라는 가상의 나라에서 ‘움’은 여성 혹은 인간의 통칭, ‘맨움’은 남성, ‘부성보호’는 움이 아이 아버지로 지목했을 때 맨움이 얻을 수 있는 생계 혜택이자 아이를 길러야 하는 의무다. 그럼 ‘맨움해방주의’는? 그건 맨움도 움과 같은 권리, 권력,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신념과 이를 위한 사회활동을 일컫는다. 몇 단어만 훑어봐도 지금 우리가 사는 곳과는 달라도 한참 다른 세상임을 짐작할 수 있다. 소설 기법은 단순하다. 거울 앞에서 내가 오른손을 들면 거울 속에서는 왼손을 올리듯, 현실의 남녀를 거울대칭으로 서로 바꿨다. 이 단순한 변화만으로 이갈리아는 매우 익숙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판타지 세계가 된다.
  주인공 페트로니우스는 권력자의 자식인데도 맨움이라는 이유로 온갖 고초를 겪는다. 아무리 불편해도 ‘페호’라는 남성 성기 가리개를 꼭 차고 다녀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느 밤 낯선 움들에게 겁탈당하자 엄마로부터 “그 시간에 돌아다닌 네 잘못이고 자랑할 일도 아니니 그냥 마음에 묻고 잊어라”는 말까지 듣는다. (우리나라에서 여성들이 흔히 듣는 말 아니던가?) 결국 그는 페호 공개 화형식을 하며 행동파 맨움해방주의자로 거듭나고, 나중에는 《민주주의의 아들》이라는 맨움해방주의 소설까지 쓴다. 브램 장군으로서는 정치생활에 방해되는 골칫덩이 아들인 것이다.
  이 책은 판타지 소설처럼 술술 읽히면서도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들었다. 특히 남녀의 생물학적 다름조차도 문화적 해석 나름이라는 관점은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자연의 불공평함을 치유하는 것은 문명의 임무다”라는 이갈리아의 기초신념조차도 “움을 강한 성으로 만든 것은 생물학적 이유가 아니라 문명일 뿐”이라는 노총각 올모스 선생의 해석과 “생물학적으로 맨움은 아이를 갖는 특권이 없으므로 인생과정에서 완전히 종속적인 기능만 해야 한다”라는 이갈리아 공식 교육지침, 이렇게 두 가지로 상반되게 해석되지 않았던가.
  나는 여태까지 여자와 남자의 생물학적 차이만큼은 자연적이고 근본적인지라 완벽히 기능하는 인공자궁이라도 만들어지기 전에는 개선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 소설은 완전히 다른 가능성을 보여 준다. 이갈리아도 움이 임신과 출산을 전담할 수밖에 없는 생물학적 구조임은 대한민국과 동일하지만, 두 세계에서는 완전히 상반된 해석과 행동양식이 규정된다. “여성이 육아도 전담하는 것이 당연하다. 아이는 자연스레 엄마를 찾으니까”(대한민국)와 “출산을 못하는 무능한 존재 맨움이 육아를 전담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이는 자연스레 아빠를 찾으니까”(이갈리아)라고 말이다. 결국 같은 현상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였다. “아무것도 소위 ‘자연 질서’와 조화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인류의 간계였다. 어떤 종류의 인류는 억누르고 다른 종류의 인류는 그들을 착취하고 기생해서 번성할 수 있도록 하는, 목표를 가진 체계적인 간계였다.” 《비행 공포》의 에리카 종의 말대로 “여태까지 인류의 역사와 책은 모두 생리혈이 아니라 정액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이 사회는 “아이는 엄마가 보는 것이 상식”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역사가들도, 인류학자도 모두 움이니까” 이갈리아의 상식은 정반대가 된다. 자연이 정해 준 상식이란 애초부터 없었다. 사회 유지를 위해 만들어지고 가공된, 의도적으로 조작된 믿음 체계가 교육이라는 수단으로 전수되고 있을 뿐!
  성차별적 사회체제에 대항하던 페트로니우스는 소설 마지막 장면에서 브램 장군에게 철저히 재교육된다. “맨움은 월경을 하지 않으므로 자연과의 친밀함이 부족”하고 심지어 “아이와의 관계조차도 열등하게도 고작 정신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며”, “뭐든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력과 의지력이 부족해서 성취하지 못하는데”, 이 모든 것은 “피할 수 없는 생물학적 조건에 갇혀 있음”을 엄마가 아들에게 친절히 상기시켜 준 것이다. 이갈리아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아 온 페트로니우스는 혼란에 빠진다. 이상하고 불편해서 《이갈리아의 딸들》을 도저히 못 읽겠다며 덮어 버리는 이 사회의 수많은 여성들처럼 말이다! “불쾌한 어떤 것을 드러내는 일은 강한 편견에 부딪힐 수 있지만, 그것은 종종 혐오스럽기보다는 오히려 매력적인 일이기도 해. (…)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하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애제자 멜컴에게 보낸 편지에서 들려주는 충고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지 않으면 세뇌받은 대로 재교육되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이갈리아는 궁극적으로 추구되어야 할 페미니즘의 유토피아일까? 하나의 성이 다른 성을 억압하고 착취한다는 점은 동일한데 단지 강자와 약자의 역할만 바뀌는 것이? 진정 우리에겐 페미니스트가 《이갈리아의 딸들》을 쓰느냐 아니면 맨움해방주의자가 《민주주의의 아들》을 출판하느냐 정도의 선택지밖에 없는 걸까?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명저 《성의 변증법》에 밑줄 그었던 문장이 선명히 떠오른다. “페미니스트 혁명의 최종 목적은 남성 특권의 철폐뿐 아니라 성 구분 그 자체를 철폐하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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