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한나
2016-12-08여름에 친구들 몇 명이랑 우리 과 교수님이랑 막걸리를 마셨다. 교수님은 생년월일을 말씀드리면 간이사주를 보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셨다. 내게 이러저러한 성격이라고 말씀하시더니 (그간 나와의 경험을 바탕으로 말씀하신 것 같기도 함) 내년부터 쓸데없는 일들로 매우 바빠질거라고 하셨다. 대놓고 부정적인 결과는 아니었으나 헛웃음이 나오긴 했다. 그게 뭐야, 싶어서. 난 바빠질 내 생활을 기다리면 되는건가? 아님 운명에 맞서봐?
교수님의 신묘한 능력이 그날은 고장 났던건지 아니면 내 사주가 급행인건지, 지난 시월부터 나는 거의 엑소만큼 바빠졌다. 쓸데없는 일은 아니지만. 내가 중요한 일이라고 여기는 일들을 위해 해야 하는 부수적인 일들이 많아졌다. 친구가 말했다. “열 두시에 일어나니까 바쁘지.” ...천잰데?
사는 곳 주변에서 또래 청년들과 BOSHU라는 잡지를 만들고 있고, 기본소득을 시민들에게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 내가 하는 일은 크게 이 두 가지이고, 가끔 이렇게 글을 써서 내기도 하고. 잡지에 실을 내용 수렵 채집 하러 다니고, 관련된 사람을 만나고, 홍보물을 만들고, 어디 가서 BOSHU 홍보하느라 말도 하고, 말 하려면 준비해야 하니까 준비하고. 하루를 띄어쓰기 없이 살다보니 맑은 날 야외에서 책보는 일도 잘 못한다. 열시에 일어나면 할 수 있겠으나...
아 이런. 일상의 여행에 대해 쓰려고 했는데 여행 없는 일상을 말해버렸네. 12월에 발행할 BOSHU 7호에서는 ‘포토팀 없는 포토 기획’이라고 해서, 포토그래퍼를 제외한 나머지 팀원들이 사진을 찍고 직접 편집하는 꼭지를 싣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 우린 일회용 카메라를 두 대 주문했고, 배송이 오자마자 이어달리기 식으로 주고 받으며 각자 촬영 중이다. 유성에서 일회용 카메라 들고 다니며 여기저기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으면 높은 확률로 우리 팀원일 거다.
나는 한 컷을 찍고 다른 팀원에게 돌려주어야 해서 일정이 끝난 오전 세시 사십분에 일회용 카메라를 들고 집 밖으로 나섰다. 카메라 뒷면에 주의사항이 적혀있었다. ‘밤에는 촬영하지 마시고...’ 충남대학교에서 엑스포까지 길 따라 쭉 갔다. 사방에 차가 없었다. 강물이랑 주황색 빛이랑 나무를 보면서 노래를 틀었다. 혁오의 Hooka, 좋았다.
이십키로로 슬금슬금 가면서 오른쪽을 계속 봤다. 창문을 내리니까 신선하고 찬 공기가 코로 훅 들어왔다. 주변에 사람이나 차가 안보이니까 이 세상 산소를 나 혼자 마시는 것 같았다. 보통 이런 글은 [바쁜 일상,그 속에서의 여유,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발견하는 것은 어떨까?]로 끝나던데 난 바쁜 일상을 어떻게든 정리할 생각이고 (사주와 싸워 이기겠다) 소소한 일상의 여유를 소소하지 않은 규모로 키워 내 인생을 여유로 잠식해버리는 게 꿈이다.
찍어야 할 사진은 못 찍었다. 주제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었는데... 찍고 싶은 장면이 있었지만 그냥 안 찍었다. 흐르는 순간을 포착하려고 구도를 잡는 것 보다 상황에 젖어버리는 게 편하다. 난 사진을 잘 못찍으니까. 사진기를 켜느라 hooka의 후렴을 제대로 들을 수 없으니까. 사진기를 대느라 잠시 숨을 멈춰야 하니까. 그러는 사이에 풀 냄새랑 공기 냄새가 익숙해지고 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