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00호] 신도극장의 끝, 또 하나의 클리셰

벨트슈피겔²을 바랐다. 칙칙한 붉은 색 건물도 감각 있는 디자이너의 손길을 거치고 지역 사회의 따뜻한 관심을 받으면 크렘린의 그것처럼 아름다운 색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신도극장은 지금 초라한 퇴장을 준비한다.

 

 

단관시절

신도극장은 하루에 한 편의 영화만 상영하는 단관극장이었다. 영사기에서 쏘는 빛이 돌돌 말린 필름을 비추면 은막에선 윤정희가 울고, 신성일이 웃었다. 이들이 나올 때면 만원을 이룬 극장 전체가 숨을 죽였다. 한 편의 영화에 모두 함께 울고 웃었다. 성남동 사는 김 씨 할아버지에게 신도극장은 60년대 학창시절 그 자체다. <십계>, <벤허>와 같은 영화를 보려면 신도극장에 가야만 했다. 극장 앞에는 몰래 영화 보러 나온 학생을 잡기 위해 주임 선생님이 서 있었다. 까까머리라서 학생인 것이 훤히 드러나기 때문에 선생님의 눈을 피해 갖은 애를 써서 극장에 들어갔다. 그렇게 들어간 극장에서 같은 영화를 두 번, 세 번 돌려 보았다. 신도극장의 입장 가격은 60원이었다. 일류 단판극장이었던 시민관의 입장가는 90원. 신도극장은 저렴한 편이었다. 지금 60원은 푼돈이지만, 당시에는 버스 값이 10원이었으니, 시세로는 지금과 큰 차이가 없다.

“보문산에서부터 날라 온 헬리콥터가 삐라(전단)를 뿌렸어요. 그게 신도극장 삐라였어요. 대단했죠.”

우리세탁소 황정규 할아버지는 신도극장이 전단을 뿌리던 광경을 회상하며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사람들은 표를 미리 끊어놓고 극장 앞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대폿집에서 막걸리를 마시곤 했다. 극장에선 영화 상영도 하고 이주일 쇼, 하춘화 쇼, 이미자 쇼도 보여 주었다. 쇼가 있는 날이면 사람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발전국가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신도극장을 비롯한 단관극장은 애환을 함께한 하나의 추억이었다. 그야말로 ‘단관시절(單館時節)’이었다.

신도극장의 현재

영화(榮華)를 누리던 신도극장을 눈에 담고 싶었다. 7월 중순, 신도극장을 다시 찾았다. 철거를 위한 철제 구조물이 직사각형 패턴으로 건물을 둘러쌌고, 안에서는 철거 인부 여럿이 의자에서 쇠를 분리하고 있었다.

“쓸 만한 고철을 뜯어내는 거죠. 내부 철거가 완료되면 건물을 헐 거예요. 여기다 뭘 지을지는 모르겠어요. 우리도 철거업체라서….”

불쑥 던져진 관심이 달갑지 않았는지 인부는 등을 돌리고는 다시 녹슨 의자에 손을 올렸다. 철거 소음이 꽤 심했지만 주변 약국, 상회 등 지역 주민에게 신도극장의 철거는 ‘반가운’ 소식이다.

“어제는 유난히 시끄러웠어요. 고철 덩어리를 긁어서 트럭에다 싣더라구. 그래도 주민들은 다 참고 있어요. 저 칙칙한 건물 헐고 새로운 건물 올라가면 우린 너무 좋지.”

2000년대 들어 멀티플렉스 상영관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단관극장은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신도극장도 그중 하나였다. 멀티플렉스가 가진 편의성을 따라갈 수 없었던 것은 물론, 둔산동 등 서구 신도심으로 소비 인구가 모두 빠져나간 것도 영향이 컸을 것이다. 1958년 준공하여 무려 반세기 가까이 대전 시민에게 행복한 시간을 가져다주었던 신도극장은 그렇게 초라하게 문을 닫아버렸다. 건물의 갈라진 틈새에서는 풀이 자라고 있고 외벽 전체에 검은 때가 가시지 않을 만큼 짙게 퍼져있다. 오랜 시간 사람이 관리하지 않았던 신도극장의 소슬한 분위기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라는 한 주민의 말을 대변해준다.

또 하나의 단관극장이 추억 속으로

동구청 관계자는 시나 자치단체에서 신도극장에 관심을 가져도 건물 소유주의 권리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에 그 이상 논의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구청에서 갖고 있는 신도극장에 대한 자료도 2002년 등록한 등록대장이 전부였다.

신도극장은 철거 중이다. 이제 대전에 남아있는 단관극장은 개봉관으로서는 대전역 앞 ‘아카데미극장’이 유일하다. 동시상영관 역시 인동의 ‘동화극장’을 제외하고 모두 사라졌다. 신도극장은 이류극장이었다. 신도극장, 대전극장 같은 이류극장에서는 시민관, 아카데미극장 등 일류극장에서 이미 상영한 영화 필름을 넘겨받아 재상영했다. 그래서 값이 쌌고, 그래서 서민들이 즐겨 찾았다.

아쉬웠다. 소재지와 착공일자 등이 단촐하게 적힌 한 장의 등록대장 만큼이나 신도극장의 퇴장은 무척 쓸쓸했다. 극장 근처 주민을 제외한 시, 구, 시민 어느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있다. 공간의 물리적 소멸이 사람들의 가슴에 담긴 추억의 소멸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예상했던 대로 벨트슈피겔의 반전은 없었다.

이렇게 또 하나의 단관극장이 각자의 추억 속으로 사라져간다. 마치 클리셰처럼.

클리셰¹ : 판에 박은 듯한 문구 또는 진부한 표현을 가리키는 프랑스 말. 영화에서는 훤히 예측 가능한 장면이나 내용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벨트슈피겔² : 독일 코트부스(cottbus) 시 중심에 위치한 단관극장으로, 1911년 첫 상영을 시작했다. 2009년 폐업하여 완전히 사라질 뻔 했으나, 지역사업가가 건물을 사들여 디자이너와 뜻을 모아 건물을 증개축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정부와 시의 행정적, 재정적 지원 및 지역 주민의 기금 모음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가 담긴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글 사진 윤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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